51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여자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라펠은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 햇살의 반짝임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등 뒤에서 팔을 뻗어 저 가냘픈 몸을 끌어안고, 태양의 온기를 머금은 머리칼에 입술을 비빌 수 있다면 기분이 좋을 테지. 그러나 걸음을 멈춘 아네트가 이쪽을 돌아보는 바람에 라펠은 흠칫했다.
“할 말이란 게 뭐예요?”
라펠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 밝힐 각오는 했지만, 막상 아네트를 마주하자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그는 최대한 고심 끝에 하고 싶었던 말부터 먼저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네트, 난…… 몰랐어. 벤이 그대의 마부로 일했었단 사실도, 그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단 사실도 다 금시초문이야.”
라펠은 혹시나 아네트가 자신을 벤과 공범이라고 의심할까 봐 불안했다. 자신에 비해 그녀가 지나치게 과분한 혼처인 건 사실이었다.
델티움 왕가엔 공주가 없었고, 따라서 아네트 바이에른은 델티움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었다.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라펠의 혈통에 대한 약점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아네트가 혹 이걸 사기 결혼이라고 의심하진 않을지 괜스레 걱정이 앞섰다. 라펠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아네트가 이윽고 대꾸했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을 거예요. 이반이, 아니… 벤이 당신의 혈육이란 건 충격적이었지만, 이제 와 당신을 의심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날 믿어주는 건가?”
라펠의 딱딱하던 말끝이 약간의 희망을 품고 누그러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네트는 라펠의 생각처럼 그를 신뢰해서 이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금빛 속눈썹을 내리깐 아네트가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공범이라고 치기엔 당신은 너무…… 저와의 결혼을 꺼려했었으니까요. 그토록 절 싫어했는데, 당신이 저와 결혼하려고 그런 일에 가담했을 리는 없겠죠. 고통을 즐기는 이상한 성벽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라펠의 못된 입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꽉 틀어막혔다. 이제 와 아니라고 우기기엔 전과가 너무 많았다. 아네트와 결혼하기 싫어했던 것도 사실인지라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이 ‘이게 다 널 위한 일이다.’라고 역정을 내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제 의지로 아네트와 결혼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라펠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고개를 든 아네트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냥한 미소도, 조심스러운 배려도 모두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다.
“이제 할 말은 끝난 건가요?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동체 시력이 좋은 라펠의 눈에는 등을 돌리는 아네트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금발이 허공에 나풀거리고, 내리깐 속눈썹 밑으로 쓸쓸해 보이는 분홍색 눈동자가 그를 외면했다. 라펠은 도무지 이대로 아네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잠깐만.”
다행히 아네트는 늘 그렇듯 그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다. 완전히 등을 돌린 아네트가 아직 할 말이 남았냐는 듯 그를 살며시 돌아보았다. 그 예쁜 눈과 마주친 순간, 갑자기 라펠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불쑥 데이트 신청이 튀어나왔다.
“그, 크흠. 괜찮다면 다음 주 파티에 같이 가지. 왜, 루시니 백작가에서 한다는 부부동반 파티 말이야.”
아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아마도 ‘내가 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아네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라펠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거절당할 것을 직감했다. 그러자 위기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때, 라펠의 머릿속으로 문득 해롤드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존심 세우지 말고, 정 뭣하면 불쌍한 척이라도 해!’
그래,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겠다는 대답을 받아내야 했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며 아네트의 시선을 피한 채 중얼거렸다.
“그 파티에는 꼭 참석해야 해. 그곳에…… 내 은인 같은 분이 올 거라서. 사정이 있어서 우리 결혼식엔 참석을 못 했었는데, 그대를 꼭 소개해 달라고 하더군. 아주 중요한 자리야.”
거짓말이었다. 라펠은 사실 해롤드가 그 파티에 참석할지, 안 할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참석을 안 할 확률이 더 높았다. 명색이 부부동반 파티인데 해롤드는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펠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조언한 당사자가 해롤드 본인이었으니, 이제 와 불평하진 않겠지. 라펠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당신의 은인이시라고요?”
다행히 아네트는 그의 급조한 변명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라펠이 처음으로 아네트에게 먼저 밝혀 온 ‘개인사’였기 때문이다. 라펠은 비록 이 점까진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아네트가 관심을 보인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었다. 자연히 라펠의 주절거림에는 조금 더 설득력이 실렸다.
“그래. 당신도 알다시피 난…… 출생이 좀 복잡하니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근데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 폐하께는 좀 그렇지만…… 내 친부 같은 분이야.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테지. 그래서 당신을 꼭 소개하고 싶어. 그분은 나를 정말로 걱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거든.”
원래 가장 설득력 있는 거짓말은 진실을 50% 가미한 거짓말이었다. 자신의 실제 처지와 섞어서 말하다 보니, 라펠의 얼굴에 약간 쓸쓸한 빛이 떠올랐다. 이를 본 아네트가 머뭇거렸다. 라펠은 바로 지금이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서 그녀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부탁이야, 아네트. 나랑 같이 가 줘. 당신은 내 아내잖아?”
아내의 의무를 들먹인 라펠의 말은 효과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의무와 책임에 둘러싸여 자란 아네트는 이런 말에 약했다. 하지만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는 비단 아내로서의 의무를 지켜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네트는 코앞에서 절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표정에 내심 놀랐다. 늘 성질만 부릴 줄 알던 저 못된 입술에서 ‘부탁이야.’라는 말까지 나오다니. 아네트는 그 은인이란 분이 라펠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내트의 고개가 결국엔 끄덕여졌다.
‘그래, 어차피 곧 라펠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들어주는 것쯤이야.’
사실 아네트가 처한 지금의 비극에서 라펠이 잘못한 거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그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인사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 하지만 그런 건 라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고, 믿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 외 나머지 문제는 라펠에게 책임을 돌리기엔 애매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아네트가 라펠을, 그리고 델티움을 떠나면 모두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셀레스틴 키어스를 만나야 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 전에 라펠의 부탁 하나쯤은 들어줄 수도 있겠지.
“고마워, 아네트!”
라펠이 씩 웃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서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아네트가 종이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기 그지없는 몸놀림이었다. 이에 놀란 아네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아네트를 꽉 끌어안은 라펠이 그녀를 바닥에 놓아주고서 거듭 말했다.
“정말 고마워. 같이 가 줘서.”
“천, 천만에요.”
설마 라펠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랐던 아네트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이쯤 되니 그 은인이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라펠이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무도회 때 옷차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어 보였다.
* * *
“그렇게 된 거니까 협력 좀 하쇼.”
“에잉, 이 뻔뻔한 놈 같으니!!”
라펠의 일방적인 통보에 끌려 나온 해롤드가 역정을 냈다. 졸지에 부부동반 파티에 혼자 참석하게 된 해롤드는 슬프고 열 받았다. 하여튼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조언해 주지 말 것을. 이 와중에 부인을 기다리며 혼자 샐샐 웃고 있는 라펠의 얼굴이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저는 목적을 달성했다 이거였다.
“두고 보자, 네 이노옴! 부인이 오면 내 아주 네놈의 모든 흑역사를 남김없이 술술 불어줄 테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팔짱을 낀 채 해롤드의 앞을 가로막은 라펠은 꼭 거대한 장벽 같았다. 키도 크고, 근육질의 몸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해롤드가 행여 헛소리를 시작하면, 곧바로 그를 질질 끌고 나가겠단 의지가 돋보였다. 세월의 무상한 흐름을 느낀 해롤드가 부들부들 떨며 라펠의 반짝이는 구두코를 지그시 지르밟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영감!! 새로 맞춘 구두인데!!”
인상을 찡그린 라펠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구두코를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아네트가 오기 전에 재빨리 몸단장을 끝내려는 속셈이 만연해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해롤드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근데 왜 부인과 같이 오지 않고?”
“몰라. 할 일이 있으니 먼저 가 있으래. 금방 뒤따라온다고.”
아직도 자신의 구두코를 점검하고 있는 라펠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서 뭔가를 깨달은 해롤드가 샐샐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은 라펠이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들자, 그때를 기다린 해롤드가 얄밉게 이죽거렸다.
“하여튼 눈치 없는 놈 같으니. 네놈이랑은 같이 가기도 싫다, 그러니 먼저 가 있어라. 이 얘기잖나.”
“그런 거 아니야! 정말로 할 일이 있다고 했어.”
“암, 그렇겠지. 네놈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느니, 없던 할 일도 만들어야지.”
시발. 라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평민이었던 시절의 비속어가 흘러나왔다. 해롤드가 어찌나 아픈 곳만 골라 때리는지, 억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한편, 드디어 파티에 끌려 나온 복수를 한 해롤드의 얼굴에는 웃음이 되돌아왔다. 배은망덕한 검은 머리 짐승에겐 이런 보복쯤은 해 줘야 제맛이었다.
그 얄미운 얼굴을 본 라펠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막 해롤드에게 한소리 하려던 찰나였다. 라펠의 예리한 눈에 웬 얼굴이 하나 포착되었다. 불행히도 그것은 아네트의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저놈이 대체 왜 여기에 있지?’
라펠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저 멀리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사람은 매우 훤칠한 미남자였다. 큰 키에 흰 얼굴, 조각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순은처럼 반짝이는 긴 은발은 꼭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심지어 정말로 왕자가 맞아서 더 재수가 없었다.
‘루드비히 왕세자……!’
뜻하지 않게 자신의 배다른 형제와 마주치게 된 라펠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