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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영감. 난 그저 내 아내와 잘 지내보려는 것뿐이야. 거기에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쓸데없는 요소를 끼워 넣을 필요는 없지.”



“뭐,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해롤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보아하니 본인은 아직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단계인 것 같은데, 버텨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차라리 일찌감치 인정해 버리고 상대의 마음을 살 방법을 찾는 게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해롤드는 이를 모른 체할 생각이었다. 라펠도 이 기회에 마음고생을 좀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껍질 속에 틀어박힌 나머지, 감정적인 성장이 멈춘 상태였으니까. 아마도 모친에 대한 혐오감과, 거기서 비롯된 자신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발목을 잡는 것이리라.



라펠의 친모에 대한 정보는 셀그라티스 왕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래서 아무도 라펠의 ‘친모’가 누구인지, 어쩌다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 자세한 내막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 바로 해롤드 에반스 백작이었다.



‘쯧쯧, 가엾은 영혼 같으니라고.’



해롤드는 지금은 나이 때문에 은퇴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셀그라티스 왕의 충직한 심복이었다. 따라서 왕의 사생아인 라펠을 어릴 적부터 봐 왔었다. 만약 해롤드가 라펠의 남다른 검술 재능을 발견하고서 왕에게 고하지 않았다면, 라펠은 여전히 뒷골목을 전진하며 평민으로 떠돌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미 죽어버렸거나.



“어쨌든 난… 아네트에게 말할 마음 없어. 비단 그녀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과거 얘기를 입에 담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뒈지는 편이 낫지.”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라펠이 중얼거렸다. 그가 ‘카네시스 후작’이 되기 전까지의 삶은 지옥 같았다. 라펠은 자신의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진창을 아네트에게 꺼내 보일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아네트는 이 델티움에서 가장 고결하고 완벽한 바이에른 가 출신의 여자였다. 티끌 하나 없이 반짝이는 그녀의 앞에서 어찌 자신의 가슴을 가르고, 썩은 내 나는 과거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라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존중받아야 해요.’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저를 옹호하던 아네트의 얼굴이 떠오르자 자괴감이 들었다. 라펠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본 해롤드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가장 힘든 비밀을 털어놓으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자네가 정 준비가 안 되었다면, 굳이 억지로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 마음 편히 기다리다 보면 시간이 자네를 발효빵처럼 부드럽게 숙성시켜 줄 게야. 뭐, 그때가 된다면 또 모를 일이지. 자네의 고집스러운 입이 술술 열리게 될지도.”



“하지만 그전에 아네트가 날 떠날 거야.”



라펠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에겐 꼭 짐승처럼 살아 숨 쉬는 야생의 촉이 있었다. 아네트가 먼 곳을 응시하며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 감각이 불길하게 속삭였다. 너의 것이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라펠의 말을 들은 해롤드가 곰곰이 생각하다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그럼 부인에게 더 잘해줘. 비밀을 가진 대가라고 생각하고, 아주 부인의 발닦개가 되어버리라고. 그럼 또 모르지. 자네가 눈에 밟혀서라도 꾹 참고 옆에 붙어있어 줄지도.”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영감?”



라펠이 잘생긴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쪽을 바라보는 해롤드의 눈은 농담이 아니었다. 노신사의 눈썹은 비록 희끗희끗하게 세어 있었지만, 그 밑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형형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여자들은 현명해. 그러니 자네 부인도 이미 자네가 뭔가를 감추고 있단 사실을 눈치챘을 테지. 그걸 알면서도 도저히 떠나지 못할 만큼, 부인에게 아주 극진하게 잘 해주란 말일세. 그녀가 ‘뭐, 이 정도로 잘해준다면 그깟 비밀 하나쯤은 눈감아 줄까?’ 하고 생각할 만큼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그제야 해롤드의 말을 이해한 라펠이 침묵했다. 꽤 현명한 조언 같긴 했지만, 여자에게 잘 해주려면 대체 어떻게 잘 해줘야 한단 말인가? 라펠은 단 한 번도 여자에게 ‘잘’ 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연애 비슷한 걸 해본 것도 아네트가 처음이었다. 이런 라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해롤드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그를 놀려왔다.



“아,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 못 하려나? 아니면 부끄러워서? 하긴, 자네는 어릴 적부터 부끄럼이 참 많았지. 내 생일선물이랍시고 회중시계를 샀을 땐 너무 쑥스러운 나머지, 직접 전해주지도 못하고 하인을 시켜서 나뭇가지에…….”



“시끄러워!! 제길, 당신을 찾아온 건 역시 멍청한 짓이었어.”



잊고 있던 흑역사가 강제로 끌려 나오자, 라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씩씩대며 방을 뛰쳐나가려 했다. 그 순간, 웃음기를 지운 해롤드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자네를 퍽 귀여워하지. 그 불퉁한 성격과 자존심까지도 내 눈엔 귀엽기 그지없다네. 하지만 진정한 남자는 그 자존심을 언제 굽혀야 할지 알아야 하는 법이야. 정 뭣하면 불쌍한 척이라도 해서 그녀의 마음을 돌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 말일세. 안 그러면 자네도 곧 나처럼 될 걸세.”



해롤드는 자신의 모든 젊음과 열정을 일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모든 걸 얻었다. 단, 사랑만 빼고.



해롤드가 진심을 다해 사랑했었던 여자는 그를 떠나 딴 남자와 결혼했다. 이 모든 게 해롤드가 자신이 성공한 남자인 한,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 건 그저 다정한 말 한마디와 관심이었다. 해롤드는 미처 어리석어 이 점을 눈치채지 못했고, 그녀를 영영 놓쳐버렸다.



이런 해롤드의 과거를 아는 라펠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펠에게 있어서 해롤드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보단 오히려 해롤드 쪽이 훨씬 더 부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런 그의 충고가 가벼이 들릴 리 없었다. 이때, 라펠의 눈이 문득 해롤드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로 향했다.



“아참, 영감. 그 반지는 대체 뭐지? 요즘 델티움에서 유행하는 반지인가?”



해롤드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라펠의 기억 속에 있던 것과 유사했다. 커다란 자수정 반지에는 특이하게도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예전에 아네트를 간호할 때, 그녀의 방 서랍에서 발견했었던 것처럼.



“아아, 이것? 자네는 모르겠군. 이건 ‘세크리트’라는 길드의 반지야. 그곳의 최우수 귀빈은 다들 이런 반지를 하나씩 갖고 있지.”



“세크리트? 그게 뭐 하는 길드인데?”



“뭐… 일단은 심부름 길드라고 해 둘까? 소소하게는 정보 거래부터 시작해서, 고객이 원하는 거의 모든 불법적인 일을 대신 해 주지. 최근 5년 내에 급부상한 곳인데, 길드 마스터라는 자가 여간내기가 아니더군. 소문엔 그가 몇 남지 않은 ‘진짜’ 마법사라는 얘기도 있어.”



은퇴해도 해롤드는 여전히 해롤드였다. 한때 국가의 비밀 요원 비슷하게 일했던 해롤드가 뒷세계의 정보 길드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네트가 그곳을 아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녀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수를 놓는, 지극히 우아하고 평범한 여자였으니까.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영감. 그 길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지?”



불안감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라펠이 걸음을 돌려 해롤드의 앞에 주저앉았다.









* * *









날씨가 좋았다. 푸른 하늘은 쾌청했고, 햇볕은 뜨끈한데 비해 바람은 서늘했다. 그래서 아네트는 모처럼 정원에 앉아 평화롭게 책을 읽었다. 그 내용은 비록 셀레스틴이 주로 다니는 신전에 관한 정보이긴 했지만, 이 시간이 평화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책에서 잠시 눈을 뗀 아네트는 저 멀리 보이는 라펠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최근에 뒷모습 작전을 포기했는지 앞모습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아주 신경 쓰이는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만 돌려도 서로의 모습이 잘 보이지만, 막상 말을 걸려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야 하는 그런 애매한 거리였다.



아네트는 꼭 매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라펠의 날카로운 시선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책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피해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네트가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옆까지 다가온 라펠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얘기 좀 해.”



“……얘기요? 무슨?”



아네트는 별 기대 없는 눈으로 라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대화를 시도했을 땐 짜증을 내며 피하더니, 이제 와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아네트가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라펠의 얼굴에 조금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잠깐이면 돼.”



성질 같아선 진즉에 아네트의 팔을 잡아끌며 저 좋을 대로 끌고 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젠 아네트에게 그럴 수 없었다. 라펠은 입을 꼭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앞의 여자가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자연히 그의 머릿속에선 며칠 전 만났던 해롤드의 조언이 떠올랐다.



‘부인에게 잘 해 주라고. 자존심 같은 거 버리고.’



그러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잘’ 해 주는 건데? 라펠은 욕이 나올 것 같았다. 기왕 조언을 해 줄 거면 이런 거나 좀 더 자세히 알려줄 것이지. 쓸데없이 사람을 겁이나 주고. 라펠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무리 지어 곱게 피어있는 달리아가 눈에 띄었다. 이를 본 순간, 라펠은 어디서 여자들이 꽃을 좋아한단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가장 큰 달리아를 뚝 꺾었다. 그리고 아네트의 다른 쪽 손에 그것을 조심스레 쥐여 주었다.



“진짜로 잠깐이면 돼, 아네트. 얘기 좀 하자고.”



“……이거 나 주는 건가요?”



아네트는 대답 대신 멀뚱한 눈으로 라펠이 준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뭘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하물며 ‘그’ 라펠에게 꽃을 받을 줄이야. 딱히 돈 주고 산 것도, 예쁘게 포장한 것도 아닌 달리아 한 송이었지만 느낌이 새로웠다.



“잠깐 기다려 봐.”



아네트가 꽃에 흥미를 보이는 것 같자, 그녀의 손목을 놓아준 라펠이 달리아를 숫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그의 무자비한 손아귀 안에서 순식간에 달리아들이 한 아름 꺾여나갔다. 정원사가 본다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릴 횡포였다. 그러나 정원사의 충격 따윈 라펠이 알 바가 아니었다. 눈 깜박할 새에 아네트의 상반신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만든 라펠이 그걸 통째로 안겨주었다.



“모자라면 더 꺾어줄게. 그러니 나랑 얘기 좀 해, 아네트.”



…여기서 더 꺾어준다고? 꽃을 한 아름 받아 안은 아네트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남편에게 꽃 선물을 받은 건 좋은데,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네트는 정원의 모든 꽃이 아작나기 전, 순순히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라펠과 대화하는 건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가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라펠이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였으니, 자신도 기회는 줘 볼 요량이었다. 이제 그의 어조는 숫제 애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마음이 누그러진 아네트가 라펠을 돌아보았다.



“그럼 저쪽으로 가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