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잘 단련된 남자의 몸은 아름답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골격부터 타고난 몸이라면 더더욱. 목덜미에서 넓은 어깨로, 그리고 탄탄한 등으로, 이윽고 늘씬한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탄력 있는 근육들이 이에 맞춰 꿈틀거리며 관능적인 기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그 등을 볼 때마다 궁금해졌다.
‘왜 요즘 그의 뒷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지?’
자신의 침실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저 등이 있었다.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도 밖을 내다보면 저 등이 있었다. 정원에 앉아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돌려보면 저 등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했다.
아네트는 자꾸 라펠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다른 부부와 달라서, 갈등이 생겨도 대화로 풀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라펠이 일방적으로 소통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자꾸 마주쳐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오늘도 무심하게 그의 등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의 어깨가 아까보다 좀 더 처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겠지.
방으로 돌아온 아네트는 테이블 위에 책을 몇 권 펼쳐놓았다. 전부 다 종교 및 신전에 관련된 책들뿐이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책들을 읽어내려갔다.
‘오데사 르이 신전에 가면 셀레스틴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몰라.’
저번에 엘로크 후작가에서 열린 가든파티에선 셀레스틴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 또한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일에 갑자기 파티 참석을 취소하는 건 대단히 무례한 행위였다. 특히나 곧 왕세자비가 될 ’귀빈‘의 입장에선 더더욱 그러면 안 됐다. 셀레스틴 또한 그 점을 잘 알 텐데, 대체 왜 그런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레스틴은 그렇게 했다. 덕분에 그녀를 만나려고 파티에 참석했던 많은 귀족에게 원망을 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네트는 자신이 도중에 부친과 마주쳐서 혼절하는 바람에 셀레스틴을 못 만난 줄 알았다. 뒤늦게 셀레스틴의 불참 소식을 들은 아네트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지금 셀레스틴이 날 피하는 건가?’
만약 셀레스틴이 그 자작극의 진범이라면, 아네트를 피하는 것도 납득이 갔다. 막상 원하는 걸 얻고 나니 새삼스럽게 죄책감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한 짓임을 들킬까 봐 제풀에 찔려 아네트를 피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녀는 표정 관리가 그리 완벽한 타입은 못 되었으니까.
뭐, 어느 쪽이든 아네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셀레스틴이 자신을 피하려 든대도 상관은 없었다. 자신 쪽에서 어떻게든 그녀를 만나고 말 작정이었으니까. 지금은 왕세자비가 되지 않은 것에 만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 자신의 등을 떠밀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제 발로 원치 않은 자리에서 직접 걸어 내려와야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들을 들여다보는 아네트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후우.”
책에서 눈을 뗀 아네트는 어느덧 어둑해진 창밖을 발견했다. 하도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건조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네트는 문득 소파 위에 올려진 초대장 하나를 발견했다.
“음? 이런 게 아까도 있었던가?”
의아해진 아네트가 그 초대장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루시니 백작가에서 보낸 파티 초대장이었다. 이 초대장을 보낸 측도, 파티의 내용도 대체로 평범하니 별 특색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부부동반 참석이네.”
마지막 줄을 읽은 아네트는 가차 없이 그 위에 ‘불참’이라고 적은 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나중에 메이드인 메리가 이를 발견하면 루시니 백작가에 거절 의사를 전달해 줄 터였다. 그렇게 믿은 아네트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제 이곳에서 잠들 날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
* * *
라펠은 어두운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술잔을 기울였다. 그의 젖혀진 목울대가 꿈틀댈 때마다 독한 술이 벌컥벌컥 넘어갔다. 맞은편에서 이를 바라보던 중후한 신사가 혀를 쯧쯧 찼다.
“천천히 좀 마시게나. 그러다 사레들리겠네.”
“놔둬, 영감. 지금은 그냥 술이 고플 뿐이니까.”
자신의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른 라펠이 거칠게 대꾸했다. 딱 보기에도 술이 고픈 게 아니고, 뭔가 커다란 문제가 있는 듯했다. 하긴, 애초에 그런 게 아니면 라펠이 자신을 찾아올 리 없었다. 어깨를 으쓱한 노신사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그런가?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소드 마스터의 경지도 머지않았고, 심지어 예쁜 아내까지 얻었더만. 자네, 아네트 바이에른 공녀가 델티움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 신붓감이었는지 아는가? 다들 그녀가 왕세자비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손가락만 빨았지. 근데 정작 그녀를 낚아채 간 게 자네라네. 에잉, 몹쓸 놈 같으니라고.”
노신사가 능청스럽게 발끝을 까딱거리며 라펠을 나무랐다. 그러자 라펠의 짙은 눈썹 사이에 불쾌한 골짜기가 패였다. 이를 본 노신사는 눈치 빠르게 라펠의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결혼생활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이를 깨달은 순간, 노신사의 입꼬리가 기품 있게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오만방자한 놈이 결혼생활로 고민을 다 하다니!’
이건 대박이었다. 대박도 초대박이었다. 노신사는 라펠이 어릴 적부터 그를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다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들켰다간 라펠이 당장에 화를 불끈 내며 자리를 박차고 가 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노신사는 애써 올라간 입꼬리를 붙잡으며 엄숙한 체 물었다.
“왜? 부인이 자넬 싫어하는가?”
“싫어하긴 누가……!!”
발끈하던 라펠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자신도 아네트에게 미움받는 입장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들의 결혼은 상당히 나쁘게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잘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순전히 아네트의 노력 때문이었다. 라펠 또한 이를 모르진 않았다. 다만 모르는 척했을 뿐.
그러나 아네트가 ‘노력’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이제 라펠을 보고도 웃지 않았고, 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어오지도 않았다. 라펠은 그 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아네트의 옆을 아무리 얼쩡거려도 그녀가 전처럼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라펠이 은근슬쩍 올려 둔 부부동반 초대장까지도 외면해 버렸다!
‘예전엔 무도회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그렇게나 좋아했었는데.’
아네트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완전히 등 돌릴 작정인 것 같았다. 이를 깨달은 순간, 라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절망하는 건지, 아네트가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 이 얽히고 꼬인 실들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든 게 어지러웠다. 그게 라펠이 눈앞의 노신사를 찾은 이유였다.
“쯧쯧. 부인에게 왜 미움받는진 안 봐도 뻔하구먼. 자네, 또 부인에게 성질부렸겠지? 특히나 자네가 싫어하던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의 딸이니까 오죽했겠나. 아예 작정하고 상처 주려고 별소릴 다 했겠지. 어디, 내가 한번 맞춰볼까? 너 같은 여자가 왕세자비가 말이 되냐는 둥, 역시 바이에른은 간교하다는 둥 속을 박박 긁었을 게야.”
“해롤드!!”
아픈 곳들을 잔뜩 찔린 라펠이 성질에 못 이겨 고함을 버럭 쳤다. 차라리 완전히 헛소리였다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지, 해롤드의 말은 다 맞는 말이라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라펠이 새파란 눈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자, 해롤드라고 불린 노신사가 무서워하는 척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중후한 입가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고 있었기에 별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해롤드는 라펠이 겁을 줄 수 없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를 잘 아는 라펠이 결국 어깨를 늘어트리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헛기침을 한 해롤드가 조금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 부인에게 사과는 해 봤나?”
“아직.”
“에잉? 아직 사과도 안 했단 말인가? 쯧쯧, 아직 배가 불렀구먼. 아내에게 사과도 못하는 졸렬한 놈팽이에게 해 줄 조언은 없다네.”
해롤드가 한심한 눈초리로 라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라펠이 발끈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독기 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힘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영감. 이건 진짜로 복잡하다고. 아네트에게 사과를 하려면…… 내 친모 얘기까지 다 털어놔야 해.”
자신의 모친을 발음하는 라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구역질을 참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모양새였다. 아네트는 영리한 여자였고, 라펠은 그녀 앞에서 형편 좋게 유리한 얘기를 꾸며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은 외삼촌과 연결된 모친의 이야기까지 꺼낼 수밖에 없으리라.
라펠은 모친을, 자신의 외가 쪽 혈통을 격렬하게 증오했다. 만약 누군가가 이에 대해 알아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아네트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녀를 섭섭하게 할지언정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이 빌어먹을 핏줄 문제만 아니었어도 아네트에게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었을 텐데.’
……잠깐. 근데 자신은 왜 그녀를 이토록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라펠은 뭔가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매번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던 그 생각들이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이고 또 쌓여, 새삼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그것도 전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몸집으로.
애초에 이딴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자신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때마침 해롤드가 묵직한 목소리로 라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자네는 어떻지? 부인을 사랑하나? 위험을 감수하고, 언젠간 그녀에게 비밀을 밝힐 의향이 있냔 말일세.”
“사랑이라고? 그딴 거, 할 리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비웃던 라펠의 말끝이 문득 흐려졌다. 내가 그 여자를, 바이에른의 여식을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근데 왜 아니라는 말이 선뜻 나오질 않는 걸까. 눈을 질끈 감은 라펠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