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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이 장면을 지켜보던 알라만드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언제나 가장 귀족다운 사람이었고, 이를 드러내며 웃는 천박한 자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적을 상처입히는 희열에 알라만드의 눈이 빛났다.



“참으로 대단한 시어른이 아닌가! 본래라면 손이 닿지 않을 공녀에게 누명을 씌워서, 제 조카며느리로 삼다니!! 라펠, 자네는 꼭 외삼촌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올리게나. 안 그랬다면 너 따위가 어찌 내 딸과 결혼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암.”



알라만드의 조롱을 듣던 아네트의 몸이 어느 순간 휘청했다. 아까부터 알라만드와 대치하며 누적된 정신적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한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알라만드를 노려보던 라펠이 놀라서 쓰러지는 아네트의 몸을 받아 안았다.



“아네트!! 정신 차려!!”



축 늘어진 아네트의 몸을 흔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라펠도 이토록 당황할 진데, 정작 부친인 알라만드의 눈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얇은 눈꺼풀을 깜박인 알라만드가 약간 흐트러진 자신의 백금발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라펠에게 빈정댔다.



“카네시스 후작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알량한 재능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라펠 ‘마치’였겠군. 네놈 같은 지저분한 혈통에겐 그편이 더 어울리지. 가서 네 쥐새끼 같은 외삼촌이나 잘 간수하게. 혹 누가 알겠는가? 그가 또 남의 딸에게 누명 씌울 궁리나 하고 있을지 말이야.”



“빌어먹을!!”



라펠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지금은 알라만드에게 으르렁댈 때가 아니었다. 황급히 재킷을 벗어 아네트의 몸을 감싼 라펠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품 안에서 축 늘어지는 몸이 부러질 듯 가냘파서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부디 내 딸에게 잘 해주라고. 기껏 진창까지 떨어트려 손에 넣었는데, 망가트리면 곤란하잖아. 과연 그 소꿉놀음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기절한 아네트를 흘끗 본 알라만드가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남겨진 아네트의 몸을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선 라펠의 눈이 혼란으로 흐릿해졌다. 그 또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 노름판에서 자빠져 죽은 줄 알았더니, 설마 아네트의 마부였을 줄이야.’



사실 라펠이 지난번 티나의 의상실에서 나온 후, 뒤쫓아갔던 사람은 바로 벤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용케도 저 멀리서 일꾼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벤을 발견했다. 거의 십오 년 만에 다시 보는 거긴 했지만, 라펠은 여전히 벤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라펠의 가장 더러운 기억과 얽혀있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외삼촌인 벤은 노름을 좋아했다. 그것도 심각한 중독 수준이었다. 그래서 라펠은 벤이 사라진 후에도 그가 노름판을 전전하며 살고 있겠거니, 적당히 생각했다. 차라리 거기서 죽어주는 편이 더 낫다고도 생각했었다. 한데 알고 보니 벤은 바이에른 가의 마부로 일했었단다. 그것도 아네트의 개인 마부, ‘이반’이란 가짜 신분으로.



대체 누가 벤을 바이에른 가의 마부로 꽂아 주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는 아네트의 마부가 되었고, 그녀의 날개를 쏘아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것도 자신 같은 개새끼의 옆으로.



비록 라펠은 이를 몰랐다곤 하나, 벤은 그의 외삼촌이었다. 역겹지만 혈연을 부인할 순 없었다. 고로 라펠도 이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단언할 순 없었다. 그가 이 누명으로 인해 아네트와 결혼하는 이득을 누린 건 사실이었으므로. 충격을 받은 라펠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그것도 모르고 난…….’



아네트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라펠은 그녀가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왕세자비가 되고 싶었으면 경쟁자를 납치해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여기에 아네트가 하필이면 바이에른 가 출신인지라 미움은 더욱 거셌다. 라펠은 심지어 아네트의 앞에서 그 누명을 들먹이며 조롱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가엾고, 가엾고, 또 가여운 피해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외삼촌인 벤 때문에 누명을 썼고, 그 조카인 라펠에게 시집와서 2차 가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는 매번 그를 향해 속없이 웃곤 했다. 혹 남들이 라펠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 같은 변호까지 대신 해 주면서.



라펠은 너무 괴로워서 어디다 대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품 안에 아네트가 안겨 있는 한, 그럴 수도 없었다. 내리감은 그녀의 창백한 눈꺼풀이, 미동도 없는 긴 속눈썹이 가슴 아팠다. 이제 이 눈이 다시 떠질 때 즈음엔 모든 게 달라져 있겠지.



아네트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 * *









아네트는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나태한 몰골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얇은 슈미즈 한 장만 걸치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내린 상태였다. 여기에 심지어 의자가 아닌 창턱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뭐, 자신은 지금 환자인 것으로 되어있으니 아무렴 어떻겠는가.



간밤의 가든파티는 아름다운 지옥과 같았다. 혼절한 아네트는 라펠의 품에 안겨서 실려 나왔다. 주최 측인 엘로크 후작 부인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네트가 본디 몸이 약해서 그렇다는 변명을 믿어주었다. 그녀는 실제로도 퍽 병약해 보이는 외모인지라 변명이 잘 먹혔다. 덕분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창 너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녹색 잔디들도, 무리 지어 핀 노란색과 보라색의 꽃들도. 그 밑을 바삐 오가는 메이드들의 새하얀 스커트 자락마저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이곳에서 혼자 시들어가고 있는 건 오직 아네트, 자신 하나뿐이었다.



“마님, 수프라도 한 입 드셔 보셔요. 네? 그러다 건강 상하세요.”



옆에서 아네트의 시중을 드는 메리가 간청했다. 아네트는 턱을 괸 채 눈동자만 굴려 그녀가 든 수프 그릇을 바라보았다. 입맛은 없었지만, 건강 상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전생에 병사로 생을 마감한 아네트에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말이 없었다.



“이리 주고 가 봐. 내가 먹을 테니까.”



“네, 마님! 혹시 드시다가 수프가 식으면 불러주세요. 다시 따뜻하게 끓여다 드릴게요!”



먹겠다는 아네트의 말에 메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수프가 든 쟁반을 아네트에게 건네주고 방을 나섰다. 드디어 혼자가 된 아네트는 두세 번 숟가락질을 했지만, 역시나 속이 잘 받아주질 않았다. 숟가락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아네트는 눈을 감고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멍한 머릿속으로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어.’



그날 라펠의 얼굴을 봤을 때, 그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귀족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라펠은 평소에 사교활동을 잘 안 하는 편이었으므로, 아네트는 결혼 전까지 그와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라펠이 아네트의 개인 마부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모든 걸 용서받을 순 없었다. 그가 진작에 자신의 친모에 대해, 자신의 외가 쪽 집안에 대해서 아네트에게 한마디라도 해 줬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말할 기회도 있었으나 라펠은 끝끝내 침묵했다. 그는 아네트를 믿지 않았고,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이렇게 극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아네트를 지옥으로 떨어트렸던 장본인, 이반이 사실 라펠의 외삼촌이었다니. 이 무슨 싸구려 삼류 연극에서나 볼 법한 소재인지. 아네트는 자신이 이반을 눈앞에 두고서 ‘시외숙부.’ 하고 깍듯이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허탈한 웃음이 폐부에서 피식 흘러나왔다.



“하하, 하… 흐윽, 흑…….”



쥐어짜듯 나오던 웃음이 곧 울음으로 바뀌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네트는 주위에 휘둘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다 죽었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어떻게든 자신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기까지 했었다.



근데 지금 보니 자신은 여전히 운명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마치 쳇바퀴 안을 달리면서 자신이 전진하고 있다고 믿는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아네트는 그 점이 절망스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으흑…….”



차라리 이렇게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속이 좀 개운한 것 같기도 했다. 아네트는 젖은 속눈썹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는 라일린과 눈이 마주쳤다. 때마침 이쪽을 보던 라일린이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아. 다 울었나 보죠?”



“……?”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아네트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아무리 정보 길드에 온갖 불법적인 일을 다 하는 곳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번듯한 귀족의 저택에 보란 듯이 불법 침입을 하다니. 그러나 정작 아는 체를 해 오는 라일린의 얼굴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역시, 이래야 제 고객다우시죠.”



아니. 아네트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은 것뿐이었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경비를 뚫고 자신의 방 테라스까지 온 거냐고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처음엔 너무 잘 어울려서 미처 몰랐었는데, 아네트의 눈이 뒤늦게 라일린이 걸친 의복을 발견했다.



“……메이드 복이네요. 그것도 우리 저택의.”



“네. 천이 고급이던데요. 메이드 복에 투자할 줄 아는 가문은 망하지 않는 법이죠. 진정한 미학이 뭔지 잘 아는 곳이니까요. 저는 이 카네시스 가의 드높은 안목에 무척 감동하였습니다.”



아네트는 칭찬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린 라일린이 보란 듯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그 우아한 움직임을 따라 메이드 복의 스커트가 나풀거렸다. 멀쩡한 성인 남자인데 왜 저리 메이드 복이 잘 어울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심지어 라일린의 화려한 자색 머리칼에는 프릴 머리띠까지 하나 올라앉아 있었다.



아네트는 그 놀라운 꼴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사소한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라일린의 꼴이 제아무리 놀라울지라도 라펠의 외삼촌보다 더한 임팩트를 줄 순 없었다. 그건 정말로 ‘상상도 못한 놀라운 정체!’ 그 자체였으니까.



“이리 와 앉으세요.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차는 드릴 수 없겠지만요”



“영광입니다, 마님.”



라일린이 스커트 자락을 잡으며 진짜 메이드처럼 다소곳이 인사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 아네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양손으로 턱을 괸 그가 아네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오늘은 아주 자유분방한 모습이군요. 심경에 변화라도 생기셨나요? 이를테면, 이참에 좀 더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그런 마음?”



역시나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아네트가 떠나고 싶어 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다니. 아네트는 그의 입꼬리 옆에 찍힌 애교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스란드의 세일른 지역이 좋겠네요. 바닷가 근처고, 제법 큰 도시고. 무엇보다 번역 일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외국의 상선들이 많이 오가서 그런 거겠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날짜는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건 날짜로 정하기가 곤란하네요. 이곳에서 ‘처리할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끝나야 하는지라.”



아네트는 덤덤하게 말했다. 밀출국할 지역의 모든 조사를 끝마쳤고, 현금도 제법 있었다. 이제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라펠과의 결혼생활에 대한 미련,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쓴 누명을 벗겠다는 의지.



전자는 이제 아네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아네트는 라펠의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마음의 벽에 지쳐버렸으니까.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아네트는 아직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겠단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셀레스틴 키어스를 만나 할 말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파티에서 셀레스틴을 만나지 못했네.’



아네트는 뒤늦게 미친 생각에 이마를 찌푸렸다. 부친인 알라만드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곧 도착한다던 셀레스틴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작 그녀를 만나러 간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