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알라만드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품 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가 즐겨 피우는 시가는 왕실에 납품되는 최고급품이었지만, 그래 봐야 비흡연자에겐 괴로운 것일 뿐이었다. 아네트는 한발 뒤로 떨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묵직하고 씁쓸한 시가 냄새에 폐가 다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알라만드는 제 딸이 괴로워하든 말든, 늘 그랬듯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시가를 태웠다. 모처럼 아름다운 밤의 파티건만, 부녀 사이에 흐르는 건 오직 침묵과 독한 연기뿐이었다. 그가 두툼한 시가를 절반가량 피웠을 때쯤이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아네트의 존재를 떠올린 것처럼 알라만드가 툭 내뱉었다.
“왜 혼자 왔지?”
“그는 사업이 바빠서…… 아.”
아네트는 무심코 미리 준비한 답변을 내뱉으려 했다. 오늘 파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설명했듯이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알라만드는 정서상 남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 순간, 아네트의 머릿속에 번쩍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아네트가 알라만드에게 되물었다.
“라펠을 만나려고 이곳에 오신 거군요. 그렇죠? 그는 본디 저랑 동반 참석하기로 되어있었으니까요. 그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작정이신가요?”
알라만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시가만이 붉은빛을 내며 타들어갔다. 이를 본 아네트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이쯤 되면 차라리 라펠이 이 파티에 참석을 안 한 게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라펠은 엘로크 후작가에 ‘불참’ 의사를 제대로 안 밝힌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엘로크 후작가에서 마지막 참석자 리스트를 배포할 때, 라펠을 제명했을 텐데. 그럼 알라만드 또한 이곳에 헛걸음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라펠이 이를 알고서 한 건 아니지만, 그는 본의 아니게 알라만드를 바람맞힌 셈이 되어버렸다. 델티움의 그 누구도, 심지어 왕조차도 알라만드 바이에른을 바람맞힌 적이 없었다. 만약 라펠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아네트에게 간파당한 알라만드가 다 피운 시가를 던지며 웃었다.
“정말로 쓸 만해졌군. 그 천박한 사생아 놈이 잘 해주던가? 난봉꾼 같은 성질과 달리 꽤 가정적인 모양이야. 네 시들한 목에 힘 좀 들어간 꼴을 보니 기특하기 그지없군.”
부친의 조롱에 아네트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아네트에게 줄곧 순종을 강요하며 어릴 적부터 인형처럼 키워왔다. 그랬던 주제에, 아네트가 막상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그에게 반항하자 ‘이제야 쓸 만해졌다.’라고 말했다. 그 모순적인 태도에서 아네트는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라만드는 그녀의 감정엔 별 관심이 없었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발끝으로 시가에 남은 불을 비벼 끈 알라만드가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이.
“흠.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 사생아 놈이 하도 개같이 군 나머지, 네 스스로 살길을 도모하다 보니 독해진 모양이로군. 안 그래?”
“제 남편을 두 번 다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불쾌해요. 그는 그런 모욕을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아네트가 분기를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라만드의 고상한 악센트가 라펠을 꼭 길거리 비렁뱅이처럼 경멸스럽게 발음하는 게 싫었다. 자연히 아네트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적개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알라만드는 그녀가 꼭 발톱을 내민 새끼 고양이라도 되듯이 무료한 표정이었다.
“저런. 아무래도 내 딸이 가르침을 다 잊어버린 모양이야.”
아네트에게 한 걸음 다가간 알라만드가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차갑고 강인한 손끝이 아네트의 어깨뼈 틈새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그 통증에 아네트가 입술을 깨무는 순간, 귓가에 뱀의 쉿쉿거리는 위협이 파고들었다.
“집을 나갔답시고 아주 건방져졌군. 내 앞에서 감히 그 지저분한 사생아 놈을 편들다니. 설마 그놈을 믿고 이리도 오만방자하게 구는 건 아니겠지? 감히 내 앞에서.”
알라만드의 손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어깨뼈를 탈골시킬 것처럼 힘을 더 강하게 주었다. 아네트는 통증에 헐떡이면서도 꿋꿋하게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라펠은…… 관계없어요. 그를 욕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뭘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게 뭐든지 간에, 라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생각 하지 마세요. 그는 절대로 아버지에게 그걸 주지 않을 테니까.”
“감히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 식으로 말해? 넌 아무것도 몰라! 어리석은 것이 엉뚱한 편을 드는 꼴이라니.”
끊어 뱉듯이 말하는 알라만드의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여기서 아네트의 어깨를 탈골시킨다 한들,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있더라도 알라만드가 고상한 얼굴로 별일 아니란 듯 둘러대면 그걸로 끝이었다. 순전히 그가 아네트의 부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아네트는 곧 다가올 통증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 순간, 옆에서 뻗어 나온 강인한 팔이 알라만드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내 아내에게서 그 손 떼시지.”
어느새 다가온 라펠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비단 말뿐이 아니라, 알라만드의 팔을 움켜쥔 라펠의 손아귀에 어마어마한 악력이 실렸다. 그러자 이번엔 알라만드의 얼굴이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이 천박한 놈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당장 아네트에게서 손 안 떼면 이 천박한 놈이 팔까지 부러트릴 줄 아십시오. 장인어른.”
라펠이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며 알라만드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노한 알라만드가 팔목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그로서는 젊고 힘센 라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라펠이 그의 팔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힘을 가하자, 알라만드가 신음을 흘리며 아네트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라펠이 보란 듯 알라만드의 팔목을 팽개쳐 버리고 아네트를 보듬었다.
“괜찮아, 아네트?”
“괜찮아요. 고마워요, 라펠.”
자신의 앞을 막아주듯이 선 라펠의 어깨가 든든했다. 그 강인한 등을 본 순간,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아네트는 아픔 때문에 창백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그런 아네트의 얼굴을 본 라펠이 혀를 차며 그녀의 뺨을 툭 건드렸다.
“하여튼 눈만 떼면 다치는군. 당신이란 여자는 의외로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어.”
멋쩍어진 아네트가 웃음을 거뒀다. 그러자 라펠이 그녀의 미소가 사라진 게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타박하지 말걸. 왜 아네트에겐 자꾸 퉁명스러운 말만 나가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멀리서 그 꼴을 바라보던 알라만드가 이를 갈았다. 사위에게 힘으로 밀린 것도 화가 나는데, 저 연놈들이 이제는 자신을 무시하고 잡담이나 하고 있었다. 푸른 피의 바이에른은 결코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했다. 특히나 한평생을 오만하게 살아온 알라만드는 더더욱 그랬다.
“하는 꼴들이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이제 와 다정한 부부 놀이라도 할 셈인가?”
“못할 것 없지요. 이 모든 게 저를 라펠과 결혼시켜 준 아버지 덕이 아니겠어요?
평정을 되찾은 아네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네트의 누명을 입막음하기로 했을 때, 알라만드는 왕가의 비위를 맞출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왕이 아끼는 라펠에게 아네트를 시집 보냈다. 당연히 이 모든 일엔 아네트의 동의 따윈 구한 적이 없었다.
아네트는 이 점을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그러자 알라만드의 얼굴이 극심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항상 매끈하고 차가웠던 얼굴이 이빨을 드러내자, 이제야 그가 좀 사람 같아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독을 품은 알라만드의 혀가 날름거렸다.
“사이가 퍽 좋아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아네트, 너도 알 테지? 네 시댁 어르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인들인지 말이야.”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지?”
갑자기 자신의 출생을 공격하는 알라만드의 말에 라펠이 으르렁거렸다. 알라만드가 그의 사생아 혈통을 비꼬는 건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부친의 말이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껏 해 왔듯이 라펠의 출신을 비꼬는 게 아니고, 뭔가 다른 얘길 꺼내려는 것 같았다.
“시댁…… 어르신이라뇨? 지금 셀그라티스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네트가 경계하는 태도로 되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라펠의 친인척은 오직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뿐이었다. 라펠의 모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지만,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러니 아네트의 질문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라만드는 그녀의 말에서 아네트가 아직 뭘 모른단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알라만드의 얼굴에 다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짐짓 동정하는 눈초리를 한 알라만드가 그녀 앞에 미끼를 드리웠다.
“저런, 가엾은 내 딸아. 저놈에게서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지? 참으로 간악한 사위가 아닐 수 없군. 제 치부는 싹 감추고, 순진한 내 딸을 홀려 물들이다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네게 누명을 씌웠던 그 몹쓸 마부 놈 말이다. 이름이, 그래. 이반이었던가?”
“……갑자기 거기서 이반의 얘기가 왜 나오나요?”
불길한 예감을 느낀 아네트의 목소리가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흘끗 돌아본 라펠의 얼굴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의아한 눈치였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긴 했지만,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만약 라펠이 이반에 대해 숨기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얼굴에 태가 났을 터였다.
라펠의 얼굴을 본 아네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알라만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슨 소리이든 간에, 아네트를 동요하게 만들려는 수작일 터였다. 설령 그게 충격적인 사실일지라 해도, 라펠이 자신을 속인 것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별일 아닐 거야. 아버지가 또 음모를 꾸미는 게 틀림없어.’
아네트는 애써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의연하게 알라만드를 마주 보았다. 라펠이 그런 그녀를 지키기라도 하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알라만드가 경멸하는 눈으로 옷까지 맞춰 입은 그들의 몰골을 훑었다. 이윽고 알라만드의 창백한 입술에서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몰랐나 보구나, 내 딸아. 이반의 본명은 벤 마치란다. 그리고 네 남편의 하나뿐인 외삼촌이기도 하지. 너에겐…… 그래, 아마도 시외숙부가 되겠구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아네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라펠의 모계 쪽이 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막연하게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반과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라펠과 이반은 육안으로 볼 때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네트는 차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려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펠의 얼굴 또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안색을 본 순간, 아네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게… 다 무슨 말이에요, 라펠? 시…외숙부라뇨? 이반이 정말로, 당신의……?”
아네트의 질문을 받은 라펠의 짙푸른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게 확실했다. 알라만드가 한 말은 아무래도 진실인 게 틀림없었다. 이를 깨달은 순간, 아네트의 안에서 뭔가가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