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네트는 최근 다이애나가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성가셨다. 스스로의 질투심은 본인이 알아서 잘 다스려야지, 왜 애꿎은 남에게 역할 놀이를 시킨단 말인가. 심지어 좋은 역할을 준 것도 아니고, 열등감에 찌든 질투녀 역할이라니. 그런 건 절대 사절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아네트에게 시비를 거는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다이애나의 병이 한층 더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럼 남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소리까지 하고 다닐지도 몰랐다. 고로 아네트는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기 전, 이쯤에서 다이애나의 망상을 한번 밟아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린 듯이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아네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요. 두 분은 제가 봐도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신걸요. 하루빨리 두 분의 결혼식을 직접 보고 싶어요.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한 로열 웨딩이 되겠지요. 안 그런가요?”
또, 또 저런 식으로 나오다니! 다이애나는 장갑 뒤로 숨겨진 양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네트는 겉으로는 대범한 척했지만, 왕세자비가 되는 셀레스틴이 부럽지 않을 리 없었다. 하물며 절친인 자신도 이렇게 부러운데, 친구도 아닌 아네트는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특히나 루드비히 왕세자는 한때 아네트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자자할 만큼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다. 자신의 발밑에 거느리고 있었던 남자가 이제 와 딴 여자랑 결혼한다는데, 속 편할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다이애나는 지금 그녀가 보이는 태도가 다 연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애써 웃으며 은근슬쩍 아네트를 긁었다.
“저런, 그토록 제 친우의 결혼식을 기대하고 계셨다니! 셀레스틴이 직접 들으면 무척이나 기뻐할 거에요. 저와 셀레스틴은 정말로 자매 같은 사이인지라, 이토록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시니 제가 다 감사할 따름이네요. 안 그래도 셀레스틴이 곧 이곳에 도착할 텐데, 저와 함께 가셔서 지금 한 얘길 고대로 다시 해 주시겠어요?”
다이애나는 약이 오른 나머지 아네트가 저보다 신분이 위라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다. 왜 그녀는 저렇게 초연한 걸까? 자신만 혼자 동떨어진 추한 질투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이애나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네트의 우아한 가면을 벗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물론 그렇게 해 주시겠죠? 레이디 아네트…… 아니, 카네시스 후작 부인께선 친절하신 분이니까요!”
다이애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네트는 분명 셀레스틴의 면전에서 축하의 말을 건네는 상황 자체를 불편해할 게 틀림없었다. 설령 입으로는 가식적인 축하를 건네더라도, 저 예쁜 얼굴은 굴욕감과 질투에 못 이겨 일그러지겠지. 그러니 자신의 제안을 어떻게든 핑계를 대 거절할…….
“그거 좋지요! 안 그래도 제가 꼭 다이애나 양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바였어요. 근데 이렇듯 먼저 얘기해 주시니, 마음이 정말 기껍네요. 고마워요.”
다이애나의 예상과 달리, 아네트는 직접 셀레스틴을 대면하려고 이 파티에 행차한 몸이었다. 하지만 곧 왕세자비가 될 셀레스틴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모일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어찌 그녀에게 접근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근데 다이애나가 몸소 자신을 셀레스틴에게 데려가 준다니, 참 고맙기 그지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감춘 아네트는 한결 친근한 태도로 다이애나의 손을 꼭 잡고서 반색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드시! 꼭! 셀레스틴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는 의지가 만만했다. 이를 본 다이애나의 동공에 당혹스러운 떨림이 일어났다.
‘이, 이게 아닌데?’
아네트에게 손을 잡힌 다이애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일 때였다. 별안간 가든 파티의 입구 쪽이 시끌벅적해지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를 본 아네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도 제 말 하면 행차한다더니, 레이디 셀레스틴이 입장한 모양이네요! 자, 어서 가서 인사를 나눌까요? 미래의 왕세자비 전하께 잘 보일 기회를 놓쳐선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뼈 있는 미소를 지은 아네트가 다이애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가 건 고삐에 제가 끌려가게 생긴 다이애나가 어, 어 소리를 내며 아네트에게 끌려갔다. 저렇게 날씬하고 체구도 작은 여자가 뭐 이리 손아귀 힘이 강력한지,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엉겁결에 아네트와 동행하게 된 다이애나가 어질어질한 머릿속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아니야,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어!’
원래 혼자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나은 법이었다. 친구인 셀레스틴이라면 분명 자신의 편을 들어 아네트의 가식을 깨부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점에 생각이 미친 다이애나는 얼른 발걸음을 재촉하여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이제 곧 셀레스틴의 아름답고 풍성한 다갈색 머리칼이 눈에 들어올…… 어?
‘백금발?’
제자리에 멈춰선 다이애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환대와 아부를 한 몸에 받는 장본인은 셀레스틴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여자도 아니었다.
큰 키에 매끈한 얼굴, 눈부신 백금발을 말끔히 넘긴 신사는 나이를 짐작하기 무색한 미중년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기품으로 무장한 남자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누군지 깨달은 순간, 다이애나는 머리가 찔끔 수그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그의 딸을 공격하던 도중이라서 더욱 제 발이 저렸다.
“세상에, 바이에른 공작 각하께서 친히 이 파티에 자리해 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입구까지 뛰어나온 엘로크 후작 부인이 격양된 목소리로 기쁨을 표시했다. 그녀의 가든파티는 매우 훌륭한 편이었지만, 사교계 최고의 행사라고 손꼽기엔 다소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라고 불리는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은 최고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의 갑작스러운 참석은 주최자에겐 최상의 찬사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아버지가 이 파티에 참여한단 소식은 들은 적 없었는데.’
아네트는 사람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비록 이번 생에는 부친의 꼭두각시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 결심이 무색하게 숨이 가빠왔다.
알라만드는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부친이었다. 그의 밑에서 체스 말처럼 순종해 온 삶은 아네트의 핏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각오하고 왔으면 좋으련만. 이렇듯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부친과 맞닥뜨리자, 잊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때마침 주최자 및 몇몇 주요 인사들과 대화를 끝낸 알라만드의 얼굴이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델티움에서 왕가 다음으로 고귀한 남자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보랏빛 눈동자로 아네트를 응시했다.
“오랜만이구나, 내 딸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부친의 매끈한 얼굴이 천천히 미소지었다. 마치 먹이를 질식시키기 직전의 뱀처럼.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아네트는 발밑이 푹 꺼지는 아득한 추락감을 느꼈다. 시집까지 간 딸이 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젊어 보이는 얼굴이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라서 소름마저 끼쳤다.
이 와중에도 알라만드는 기어이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구둣발이 코앞에서 멈춘 순간, 아네트는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전쟁터였고, 그녀는 허투루 자신의 빈틈을 내보여선 안 됐다.
“그간 강녕하셨어요, 아버지?”
아네트는 지금껏 배웠던 것처럼 익숙하게 부친을 대하는 예를 선보였다. 어느새 아네트의 얼굴에는 봄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고, 인사를 하는 움직임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심지어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끝과 허리의 각도마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알라만드의 벨벳처럼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런 아네트를 천천히 훑었다. 마치 자신이 직접 만든 물건의 완벽함을 꼼꼼히 확인하는 장인의 눈처럼.
“……그래. 너도 잘 지낸 모양이로구나.”
드디어 알라만드가 평가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고 아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의 테스트는 ‘합격’인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부친이 내민 새하얀 손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너무나 차가워서 등골에 오한이 내달렸다.
인사를 끝마친 아네트는 얼른 부친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알라만드는 그녀를 놔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손끝까지도 완벽하게 귀족적인 부친이 그녀의 숨통을 틀어쥐듯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지은, 지극히 아비다운 미소가 장식되어 있었다.
“모처럼인데 이야기나 좀 하지.”
이미 다이애나는 흔적도 없이 꽁무니를 뺀 후였다. 그래서 다이애나를 핑계로 부친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평소보다 다정한 알라만드의 어조에 주위의 시선들이 반짝였다. 그들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 공작님의 목소리 들으셨어요? 시집간 딸을 다시 보니 반가우신 모양이에요.”
“제아무리 바이에른 공작님이라 해도, 혈육은 역시 특별한 모양이죠. 다정하시기도 하지.”
아니, 알라만드는 그녀를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물이자 체스 말로 생각했다. 그런 알라만드의 이기적인 본성을 빙산의 일각만큼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 좋을 대로만 떠들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아네트의 결혼식을 축하해 줬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네트만큼은 제 아비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착한 딸을 그만둘 작정이었다. 떨리는 턱에 힘을 주어 고개를 치켜든 아네트가 다정하게 알라만드의 팔을 맞잡았다. 그리고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한쪽 구석의 정자를 가리켰다.
“그럼, 저쪽으로 가요. 아버지.”
“그러자꾸나. 딸아.”
어차피 아네트도 부친에게 피차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이 우아하게 정자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 서로의 팔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알라만드의 얼굴이 차가운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아네트를 향해 내뱉듯이 말했다.
“제법 꼴이 당당해졌구나. 이제 어디 가서 바이에른이라고 내놓아도 부끄럽진 않겠어. 전에는 꼭 비루먹은 생쥐 같더니.”
“다 아버님의 ‘가르침’ 덕분이죠.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설마 엘로크 가의 장미 정원이 궁금해서 오신 건 아닐 테죠. 꽃도 안 좋아하시는 분이.”
아네트는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그녀가 아무리 회귀했어도, 부친인 알라만드를 이기기엔 연륜이 부족했다. 그러니 차라리 정론으로 치고 들어가는 편이 유리했다. 애써 고개를 치켜들고 부친에게 맞선 아네트의 입술이 긴장으로 바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