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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결국 오늘이 무도회네.’



아네트는 화장대 앞에 앉아 멍하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깨끗한 거울 표면을 통해 방 한쪽 구석에 준비되어있는 티나의 드레스가 비쳤다. 새하얀 바탕에 반짝이는 은사로 수를 놓아 화려한 로브와, 블루 바이올렛 컬러의 보디스가 조화를 이룬 드레스였다. 쇄골이 보일 만큼 파인 앞섶을 채울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그 옆에서 눈꽃처럼 빛났다. 여자라면 누구나 가슴이 뛸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인형처럼 핏기없는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아 메이드들의 치장을 받았다. 그녀들의 손길을 통해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은 더욱 화사하게, 아름답게 바뀌어 갔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아네트의 속마음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라펠은 아마…… 같이 가지 않을 테지.’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않았다. 아네트는 이번엔 관계 회복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라펠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어주지도, 그에게 태연하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도 않았다. 그게 다 부질없는 노력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손을 내밀면 라펠은 이를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결코 아네트가 내민 손을 맞잡아주지도, 먼저 손을 내밀어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네트가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하면 또다시 차가운 얼굴로 밀어내겠지. 네게 허락된 거리는 딱 여기까지라는 듯이.



‘괜찮아. 무도회는 나 혼자 가면 돼.’



아네트는 눈을 내리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생에는 처음으로 라펠과 무도회에 동반 입장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었다. 그 기대가 부서진 건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도회에 안 갈 순 없었다. 어차피 이 무도회는 라펠이 함께 가든, 안 가든 관계없이 꼭 참석해야 할 자리였으니까.



아네트는 이곳에서 셀레스틴 키어스를 만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 맞는지 떠볼 계획이었다. 사실 아네트의 목적을 고려해 보면, 라펠과 함께 가는 것보다 혼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편이 움직이기에도 수월하고, 목적을 이루기에도 효율적이리라.



때마침 아네트의 입술에 연한 장밋빛 연지를 발라 마무리해 준 메이드들이 다정한 칭찬을 건네왔다.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이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마님.”



“아마 파티에서도 마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에요.”



“고마워.”



아네트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작은 얼굴에 큰 눈, 발그레한 뺨, 촉촉한 입술을 한 여자는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여기에 익숙하기까지 한 미소를 곁들이니, 여자의 얼굴은 일견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혼자여도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늘 그래왔으니까.







* * *









엘로크 후작가의 가든 파티는 올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린 정원 곳곳에는 아름다운 조명들이 켜져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는 나비 모양의 등불들이, 연못과 수반 위에는 화려한 연꽃 모양의 등불들이 제각기 은은한 빛을 발했다. 여기에 정원에 만개한 장미꽃들에서 그윽한 향이 풍기며 밤의 정취를 더했다.



“레이디 아네트! 아니, 이젠 카네시스 후작 부인이로군요. 결혼식은 잘 봤어요.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기혼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요.”



엘로크 후작 부인이 파티의 주최자답게 아네트를 맞이해 주었다. 아네트보다 열댓 살 더 많은 그녀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아네트는 초대에 감사하고, 파티가 참 근사하다는 칭찬을 예의 바르게 건넸다. 그러면서도 아네트의 눈은 조심스럽게 엘로크 후작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와 대화하는 엘로크 후작 부인의 얼굴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를 본 아네트는 내심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사람들은 내 누명을 몰라. ‘입막음’은 정말로 철저했구나.’



하긴, 바이에른 공작가와 왕실에서 합작하여 한 입막음이었다. 여기에 피해자인 셀레스틴 키어스조차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동의했다. 그러니 입막음이 완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아네트도, 셀레스틴도 둘 다 상처받게 될 테니까.



여기에 아네트의 대처 또한 훌륭했다. 그녀가 결혼식에서 라펠에게 홀딱 반한 것처럼 굴었던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전생엔 그러질 못해서 사람들이 내내 수군거렸다. 왜 가장 완벽한 왕세자비 후보였던 그녀가 갑자기 라펠과 결혼한 걸까? 어쩌면 모종의 흠이 있었던 게 아닐까? 덕분에 아네트에겐 불임이라든지, 문란한 사생활 같은 여러 루머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아네트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왕세자비가 되지 않은 거라면 납득이 가능했다. 딱히 사교계에서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없었다. 왕세자인 루드비히가 이 점에 대해서 공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 한은 그랬다. 덕분에 아네트는 당당히 셀레스틴이 참석하는 파티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라펠도 같이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아네트는 티나의 의상실에서 같이 맞췄던 의상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아는 라펠은 주로 차갑고 어두운색들을 즐겨 입었다. 짙은 코발트 블루, 네이비, 블랙, 어두운 버건디 컬러 정도가 다였다. 만약 이번에 맞춘 새하얀 프록코트를 입는다면,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말 그대로 눈부시게 빛났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이런 감상은 부질없었다. 아네트는 애써 머릿속에서 라펠의 생각을 지워내며 파티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셀레스틴이 혹 자신을 피할까 봐, 일부러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참석 선언을 했다. 그러니 셀레스틴은 자신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오늘 셀레스틴이 입기로 한 드레스는 레몬처럼 청량한 노란색이었다. 그러니 만약 그녀가 파티에 도착했다면, 짙푸른 정원에선 눈에 잘 띌 터였다. 그러나 아직까진 셀레스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늦게 오려나 보네.’



신분이 높은 레이디일수록 파티에 더 늦게 등장했다. 셀레스틴은 비록 아직까진 ‘키어스 후작 영애’에 불과했지만, 이 경우엔 좀 특별했다. 그녀가 무려 왕세자비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는 후작 영애와 왕세자비, 그 중간쯤으로 대우받았다. 따라서 좀 늦게 입장할 확률이 높았다.



아네트는 최대한 셀레스틴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천천히 파티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들과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귀족은 아네트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네트가 썼던 누명과 정략결혼 사유를 짐작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아네트에 대한 루머를 수군대는 대신,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신랑 신부가 얼마나 아름다웠었는지 칭찬했다. 여기까진 좋았으나, 그 뒤에 으레 따라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부군 되시는 분은요? 오늘 같이 안 오셨나요?”



혼자 모습을 드러낸 아네트를 향해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음습하게 빛났다. 이에 아네트는 화사한 미소를 건 채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받아넘겼다.



“아, 네. 원래는 같이 올 생각이었는데…… 광산 쪽에 조금 일이 생겼나 봐요. 아시다시피 요즘 그이의 광산 사업이 무척 바쁘거든요. 그래도 무도회는 같이 참석했으면 좋았겠지만,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이럴 때일수록 천연덕스럽게 대꾸해야 했다. 호기심 어린 관객들이 원하는 먹이를 던져 줘선 안 됐다. 다행히 아네트의 처세술은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은 실망 반, 납득 반의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위기를 넘긴 아네트가 막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별안간 크게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우르르 쏠렸다.



“어머나, 카네시스 후작 부인! 며칠 전에 뵙고, 오늘 또 뵙네요!! 정말 반가워요!!!”



아네트를 불러 세운 사람은 바로 다이애나 맥클레어였다. 셀레스틴 키어스의 절친이자, 제법 큰 상단을 소유한 맥클레어 백작가의 영애. 그녀는 저번에 아네트가 라펠과 함께 돼지 바비큐를 먹고 돌아오던 날, 길거리에서 마주쳤다가 한 방 먹은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들으란 듯 시선을 끌며 다가오는 다이애나에게선 설욕전을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네트는 걸음을 멈춘 채 품위 있는 태도로 다이애나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제 와 새삼스레 다이애나가 두렵진 않았다. 사실 아네트는 속으로 태평하게 이런 생각까지도 했다.



‘다이애나가 참석한 걸 보니, 확실히 셀레스틴 키어스도 이 파티에 오겠군.’



하긴, 어지간해선 당일에 참석 여부를 번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파티 주최자에 대한 실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네트에게 말을 걸어오는 다이애나의 얼굴이 유독 득의양양하게 빛났다.



“이 파티에 참석하신 걸 보니, 제 친우인 레이디 셀레스틴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로군요! 어쩜, 그녀의 왕세자비 대관식을 미리 축하해주러 오신 건가요? 참으로 관대하시기도 하지! 한때 셀레스틴과 같은 자리를 두고 겨뤘던 재목다우시네요.”



도발적인 그녀의 말에 아네트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다이애나는 끝끝내 아네트가 왕세자비에 미련이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아니, 본인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저번에 눈앞에서 보란 듯 라펠과 꽁냥대는 모습을 보여주었어도 저런 식으로 나오다니.



하지만 아네트는 다이애나가 왜 자꾸 자신에게 이렇게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네트의 눈동자가 약간의 동정을 담고서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셀레스틴이 부러운 쪽은 그녀인가 보네.’



다이애나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에게 금방 빠져드는 편이었다. 그 말인즉슨, 다이애나가 그만큼 꿈과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사실 남자들 본인이 아니고, 자신의 환상이었다. 그토록 꿈 많은 다이애나의 눈에 하물며 왕세자비는 얼마나 매력적인 자리로 보이겠는가.



루드비히는 긴 은발의 아름다운 미남이었다. 그러니 다이애나에겐 그가 꼭 꿈속의 왕자님처럼 보일 터였다. 실제로 다이애나가 지금보다 어릴 적, 루드비히에게 러브 레터를 썼다는 소문도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아마 그녀는 곧 왕세자비가 될 자신의 절친이 무척이나 부러울 터였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날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드는 거지.’



한 마디로 지금 다이애나가 적대하는 건 친구를 질투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네트에게 자신의 모습을 덧씌운 후, 이를 공격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려고 했다. 그러니 다이애나의 유치한 적개심에 굳이 상처받을 이유는 없었다. 뭐, 그런 다이애나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네트는 자신이 원한 적도 없는 샌드백 역할을 해 줄 마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