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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다행히 아네트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그녀는 힘없이 제 뺨을 툭툭 건드리는 라펠의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렸다. 그는 놀랍게도 아네트의 미약한 손짓에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한 차례 격렬한 정사 때문에 지친 아네트는 평소답지 않게 그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그 과감하고 친밀한 접촉에 라펠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아네트는 조금 웃었다. 지금까지 더 야하고 격렬한 행위를 잔뜩 해 놓고서, 손깍지에 새삼 굳어지는 라펠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화를 더 미룰 수 없었다. 손깍지 하나로 라펠을 붙잡아 놓은 아네트가 줄곧 벼르던 질문을 던졌다.



“라펠, 낮에 당신이 따라갔던 사람…… 누구예요?”



라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아네트는 그의 남자다운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를 꽉 악무는 건 라펠이 싫어하는 화제가 나왔을 때의 버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기다려도 라펠에게선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라펠.”



아네트가 한숨을 섞어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이제 부부인데, 전보단 가까워진 것 같은데 여전히 라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인지라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그의 지뢰를 밟게 되었다.



아네트는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라펠이 섭섭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캐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에 대해선 그에게 한마디 할 필요가 있었다. 아네트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그의 오늘 행동을 지적했다.



“당신은 오늘 아무 말도 없이 날 길거리에 홀로 남겨두고 갔잖아요, 라펠. 내가 얼마나 당황했다고요. 그럼 적어도 나에게 ‘왜’ 그랬는지는 얘기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굳이 자세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때 당신이 왜 그랬는지나 얘기해 줄래요? 내가 당신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요.”



아네트는 최대한 라펠이 쫓아갔던 ‘그 사람’에 대해선 얘기를 꺼내지 않게끔 주의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라펠은 자신이 누굴 따라갔는지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으니까, 그 점만 건드리지 않으면 될 것 같았다.



아네트는 하다못해 그가 ‘화장실이 급해서’ 따위의 전형적인 핑계를 대더라도 이해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펠은 그마저도 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네트가 꼈던 손깍지를 차갑게 뿌리친 라펠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내려가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되는 걸까.’



아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워진 눈동자로 그런 라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질 것 같으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물며 이런 질문에도 대답을 안 하는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 따윈 물을 엄두조차 안 났다. 아네트는 자꾸만 반복되는 이 패턴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다면, 그저 겉핥기식인 부부 관계만 바란다면…… 나도 더는 어쩔 수 없지.’



관계는 둘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론 도무지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네트는 기껏 얻은 두 번째 삶을 이렇게 마른 우물만 파다 끝낼 마음이 없었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라일린을 다시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오스란드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은 비록 좀 외로울지언정, 그래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해질 가능성.



이때, 아네트의 침실 문 손잡이를 잡은 라펠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아네트의 얼굴에 와 닿았다. 그녀는 비록 라펠의 태도에 대해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았지만, 괜스레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두워진 아네트의 눈이, 그녀의 실망한 표정이 이상하게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라펠은 전처럼 방을 휙 나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아네트에게 뭐라도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라펠은 융통성이 없었고, 그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안돼, 이것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어.’



라펠의 본능이 자신의 약점을 노출해선 안 된다며 으르렁거렸다. 그 경고에 따라 라펠의 입이 자연스레 굳게 다물렸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근데 이제 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네트를 예외로 삼을 순 없었다. 그러기엔 라펠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컸다. 이번에도 그의 선택은 결국 대화 거부로 이어졌다.



“다음에, 다음에 얘기해.”



쥐어짜듯 가까스로 대꾸한 라펠이 등을 돌려 침실을 나가버렸다. 그는 아네트의 앞에서 멍청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한심하여 짜증이 났다. 왜 저 여자 앞에선 자꾸만 이렇게 한심해지는 건지.



아네트는 닫힌 문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무도회를 위한 옷을 함께 고르면서 화기애애했던 것이 죄다 거짓말 같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만 그 교체 주기가 너무나 짧은지라 아네트는 문득 괴로워졌다.









* * *









라펠은 그 후로 자신이 언제 꼬박꼬박 아네트의 침실을 찾았냐는 듯 발길을 뚝 끊었다. 아네트도 굳이 그런 라펠을 찾아가 귀찮게 굴지 않았다. 카네시스 후작 저택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고,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물처럼 고요히 흘러갔다.



아네트는 단단한 붕대 너머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이젠 아프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붕대를 풀 때가 된 것 같았다. 하녀를 부른 아네트가 온화하게 지시했다.



“그때 내 손가락을 봐줬었던 의원 있지? 그를 다시 불러주렴. 진료를 받아야겠어.”



당시 아네트는 골절로 인한 염증 때문에 꽤 크게 앓았었다. 그래서 어떤 의원이 자신의 손가락을 봐주었는지 잘 몰랐다. 다행히 하녀는 이를 기억하고 있었던지, 오래지 않아 의원을 불러왔다. 밤색 머리에 엘리트다운 얼굴을 한 30대의 의원은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부, 부인.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의원은 여전히 깐깐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간이 좀 작았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험악한 눈초리를 한 아네트의 남편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오늘은 라펠이 없는 듯하여 의원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비밀이었지만, 그는 매번 이곳에 불려올 때마다 라펠 때문에 바지에 조금씩 지렸다. 지금껏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한 의원은 보기보다 유약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네트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다 나은 것 같은데, 붕대를 풀어도 될지 좀 봐줬으면 해서.”



“아, 예. 그럼 어디 한번 상태를 보겠습니다.”



의원은 붕대를 푼 다음, 그녀의 손가락 관절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네트에게 몇 가지 손동작을 따라 해 보일 것을 지시했다. 다행히 아네트는 그 동작들을 따라 하면서도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 점을 얘기하자,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낀 외알 안경을 벗었다.



“좋습니다. 다 나은 모양이네요. 그래도 한번 골절된 곳은 또 골절되기 쉬우니, 적어도 한 달간은 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의원은 진료를 끝마쳤지만,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는 대신 머뭇거렸다. 마치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 밍기적인 것처럼. 그래서 아네트는 의아한 눈으로 의원을 바라보았다. 혹 카네시스 후작가에서 그에게 진료 보수라도 연체한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뜸을 들이던 의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다른 얘기였다.



“저어, 부인. 혹시 지난번 방문 때… 제가 부군 되시는 분께 소개장을 한 장 써 드렸었는데요. 혹시 전해 들은 게 있으신지…….”



“소개장? 아니, 금시초문인데.”



아네트의 대답을 들은 의원이 체념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의원은 라펠에게 아무 기대도 없었다. 왕진 가방에서 소개장을 하나 더 꺼내 든 의원이 비장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준비했지요.”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아네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의원을 바라보며 소개장을 받아들었다. 의사들 특유의 악필로 대충 휘갈겨 적은 소개장은 빈말로라도 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같은 악필로서 이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한 아네트는 가까스로 그 안에 적힌 이름을 읽는 데 성공했다.



“유칼리 Y. 카윤?”



“네. 제 동료 의원 중 한 명인데, 여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자리를 찾는 중이지요. 고향을 멀리 떠나 온 처지인지라, 숙박이 가능한 저택에서 주치의로 일하길 희망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델티움의 귀족가는 대를 이어 온 주치의가 이미 자리 잡고 있지요. 그래서 일을 찾기가 곤란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신흥 귀족가인 카네시스 후작가에 제 동료를 추천한다는 소리인 듯했다. 아네트는 가만히 소개장을 만지작거리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의원의 설명은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지만, 이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었다. 아네트는 이미 유칼리라는 의원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 생에도 그녀와 인연이 닿다니.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전생의 아네트는 계속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원래도 몸이 그리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는데, 힘든 결혼생활 및 누명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서 병치레가 더 잦아졌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다가 종국엔 결혼 후 5년 만에 병사했다.



아네트가 본격적으로 아프기 전까진 그저 필요할 때에만 의원을 불러들였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병치레가 계속 잦아지자, 카네시스 후작가에도 주치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개 모집으로 최종 선택된 의원이 유칼리였다. 어차피 이 저택에서 아픈 사람이라곤 아네트 혼자였으니, 주치의가 같은 여자인 편이 훨씬 좋았다.



‘근데 이번엔 이런 형태로 다시 연이 닿네.’



아네트는 신기한 기분으로 소개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 또한 유칼리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그녀는 수수했지만 늘 차분했고, 말도 신중하게 하는 편이었다. 어느 쪽이든 귀족 마님의 주치의로선 훌륭한 장점이었다. 흔쾌히 소개장을 접어 넣은 아네트가 빙긋이 웃었다.



“내 한번 연락해 보지. 고맙군.”



“네, 꼭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의원은 부디 아네트가 꼭, 꼭 유칼리에게 연락을 하길 바랐다. 주섬주섬 왕진 가방을 챙겨 든 의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네시스 후작저를 빠져나갔다. 혹시라도 라펠과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그런 의원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아네트는 자유로워진 자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붕대 때문에 다소 가늘어지고 창백해져 있긴 했지만, 하루 이틀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터였다. 한결 편안해진 손의 느낌에 아네트가 기쁜 듯 웃었다.



‘이로써 무도회에 갈 땐 반지를 낄 수 있겠는걸.’



엘로크 후작가에서 열기로 한 가든파티가 이제 머지않았다. 티나의 의상실에서 맞췄던 드레스도 완성되었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라펠을 달래서 함께 무도회에 갈까? 그렇지 않으면 홀로 입장하는 게 나을까? 생각에 잠긴 아네트의 눈동자가 침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