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티나는 커플 드레스 샘플을 응시하고 있는 라펠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독특하고 야성미 넘치는 미남에게 옷을 입혀볼 수 있다니, 디자이너로서 꽤 흥미가 당겼다. 아네트에게 양해를 구한 티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라펠에게 다가갔다.
“어디 보자, 흑발에 푸른 눈이시군요. 피부도 전체적으로 차가운 느낌이 드는 흰 얼굴이고요. 이러면 짙은 코발트블루 계열이나 실버 그레이 계열의 색상이 잘 받겠지만, 불행히도 아네트 님과는 잘 안 어울리는 색상이지요. 그런 무겁고 차가운 색조들은 아네트 님의 사랑스러움과 여성미를 짓누르거든요.”
설명이 물 흐르듯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과연 최고급 의상실의 주인다웠다. 티나는 설명과 동시에 벌써 원단들을 잔뜩 집어왔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원단은 새하얀 아이보리색이었다. 은실로 나뭇잎 패턴을 하나하나 수놓은 매끄러운 원단은 은은한 화려함이 있었다. 그것을 라펠에게 보여준 티나가 냉큼 영업을 시작했다.
“어떠세요? 두 분 다 피부가 희기 때문에, 이토록 새하얀 아이보리색도 부담스럽지 않게 잘 어울리죠. 얼굴이 한층 더 환하게 부각되어 보이는 효과는 덤이고요. 꼭 등불이라도 비춘 것처럼 말이지요! 이걸 코트와 로브의 바탕색으로 정하면 참 좋을 거예요!!”
“색이…… 평소 입던 것보다 좀 밝긴 하군. 그것도 많이.”
라펠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약간의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티나가 방글방글 웃으며 그의 목 주위에 원단을 슬그머니 걸쳐 주었다.
“어머, 무슨 말씀이셔요? 이토록 잘 어울리는데요. 보세요!”
과연 미남은 미남이었다. 새하얀 천을 목 주위에 둘러놓자, 라펠의 얼굴이 꼭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듯이 훤했다. 그의 차가운 인상과 새카만 흑발, 푸른 눈동자가 새하얀 천과 어우러져 꼭 겨울의 왕처럼 보였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감탄하는 눈으로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펠의 부루퉁한 얼굴에서 불만이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아네트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본다면야 뭐, 까짓것 밝은 옷도 한 번쯤은 입어볼 만할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티나가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짐짓 근엄하게 다음 화제를 꺼냈다.
“좋아요, 그럼 바탕색은 정해졌고…… 이제 두 분이 공통적으로 쓸 ‘포인트 컬러’를 정해야겠네요. 음음, 무슨 색이 좋으려나.”
신이 난 티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색색의 비비드한 원단들을 잔뜩 꺼냈다. 그 오색찬란한 컬러들이 눈을 때리는 것 같았다. 라펠의 안색이 핼쑥해지려던 찰나, 조용히 구경하던 아네트가 입을 열었다.
“퍼플 계열은 어때요? 바이올렛 라벤더 색상이라든지, 미디움 오치드 컬러로.”
“좋은 선택이에요! 포인트 컬러로 삼기 충분한 색들이지요. 거기다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색이기도 하니, 둘만의 컬러로 삼기에도 딱 좋겠네요! 이 중에서 뭐가 가장 마음에 드시나요? 자, 한번 골라보세요!!”
반색을 한 티나가 보라색 계열의 원단들을 줄줄이 꺼내 라펠의 앞에 펼쳐 들었다. 덕분에 라펠은 대단히 큰 혼란에 빠졌다. 설마 이게 다 다른 색깔이라고 나에게 보여주는 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라펠의 눈에는 사실상 다 똑같은 보라색으로 보였다. 전장에 나갔을 때도 고요했던 그의 눈동자가 크나큰 지진을 일으켰다. 다행히 아네트가 한 번 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이건 어때요, 라펠?”
아네트가 고른 것은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블루 바이올렛 색상이었다. 그것을 집어서 라펠의 얼굴 근처에 대 본 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하네요! 이러니까 푸른 눈이 더욱 돋보이고, 섹시한 느낌도 있어요.”
“그렇지? 이런 색이라면 나도, 라펠도 쓸 수 있겠어.”
아네트가 말하면서 생긋이 웃었다.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는 퍼플 원단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아네트는 라펠과 같이 옷을 맞춰 입고 파티에 간다는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들떴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를 본 순간, 라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네트가 고른 천을 집어 들고 선언했다.
“좋아. 이걸로 하지.”
“지당하신 선택입니다, 암요. 그럼 이제 치수를 재고, 옷의 디테일들을 정해 볼까요?”
티나가 흡족한 얼굴로 그들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이로써 아네트의 드레스를 무슨 색으로 할지에 대한 논의도 같이 해결된 셈이었다. 다행히 아네트 또한 이 결정에 만족했다. 새하얀 아이보리 원단에 퍼플 컬러로 포인트를 주자, 우아하면서도 화려했다. 무엇보다 라펠과 같이 드레스 코드를 맞추다니. 전생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느낌이 더욱 특별했다.
‘그는 요즘 나에게 다정한 것 같아.’
모든 치수와 디테일을 정하고 의상실을 나오던 아네트는 라펠의 옆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이 라펠의 감정을 묻기엔 좋은 타이밍 같았다. 그는 이제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듯 파티도 함께 가고, 옷까지 맞출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네트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흘끗 돌아본 라펠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차가운 얼굴이었다. 서늘한 그 눈매를 보고 있자니, 익숙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네트는 입술을 꼭 깨물고 이를 억눌렀다. 그녀는 라펠이 전과 달라졌단 사실을 믿고 싶었다.
“라펠.”
“응.”
라펠이 즉각적으로 짧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아네트가 아닌,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라펠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아네트는 조금 서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이런 질문 해서 미안해요. 혹시……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직도 내가 많이 불편한가요?”
그녀의 질문에 라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꼭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웠나 싶었던 아네트는 변명조로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결혼이 정상적인 형태는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처음에 거부감을 좀 느꼈었죠. 난 그게 여전한가 싶어서…….”
“나중에 얘기해, 아네트.”
쌀쌀맞게 대꾸한 라펠이 갑자기 앞으로 휙 뛰쳐나갔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아네트가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라펠이 자신의 질문에 답하기 싫어 뛰쳐나가는 줄 알았으나, 지금 보니 꼭 누군가를 뒤쫓는 듯했다.
아네트는 대체 라펠이 누굴 저리 열심히 쫓아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은 데다, 키가 작은 편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네트가 발돋움을 하며 끙끙대는 와중에도 라펠은 기어이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아, 홀로 남겨졌네.’
졸지에 혼자가 된 아네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설명도 없이 자신을 길바닥에 버려두고 간 라펠의 매몰찬 태도가 섭섭했다. 모처럼 용기를 내어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던 중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네트는 그에게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 비참해졌다. 라펠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다행히 마차를 세워놓은 곳까진 그리 멀지 않았다. 티나의 의상실은 줄곧 단골이었기 때문에 길도 익숙했다. 하지만 아네트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큼 느렸다. 진전이 없는 관계, 진전이 없는 발걸음. 꼭 느려터진 거북이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네트는 결국 마차까지 몇 미터 남겨두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쩐지 이대로 집에 가기 싫었다. 때마침 근처에 흰 벤치가 눈에 띄었다. 귀족들이 많이 드나드는 고급 상점가라 그런지, 벤치는 깔끔할뿐더러 작은 분수대까지 하나 놓여있었다.
아네트는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 분수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회귀해서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건 좋았지만, 요즘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졌다. 자신이 과연 그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아네트는 이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까 봐 두려웠다. 추하게 첨벙거리며 발버둥을 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전과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 따름이라면 너무 절망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보듬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회귀해서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네트는 다시 살아난 자기 자신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그 외엔 딱히 다른 방도도 없었다.
아네트는 벤치에서 일어나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무 놀라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아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 라일린 씨?”
“아, 이제야 절 발견하셨군요.”
아네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라일린이 턱을 괸 채 웃었다. 대체 어디서 저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키가 생각보다 훤칠한 편인 라일린은 앉아 있는 아네트와 눈높이가 딱 맞았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그의 석류처럼 붉은 눈동자가 갸름하게 웃는 걸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아네트가 황망하게 물었다.
“여기서 대체 뭐 하시나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뭐, 볼일이 있으니깐 온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명상은 다 끝나셨나요? 괜찮다면 저와 잠시 산책이라도 하실까요. 나의 귀중하신 고객님.”
여우처럼 눈웃음을 친 라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귀신도 아니고, 사람이 뭐 이리 신출귀몰한지. 아네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은 그 손을 잡았다. 라일린의 우아하고 긴 손가락들은 놀랄 만큼 차갑고 부드러웠다. 자연스레 아네트를 산책 코스로 이끈 라일린이 꼭 안부라도 묻듯 가볍게 운을 띄웠다.
“그래서, 마음의 결정은 내리셨나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네? 아, 밀출국 건 말씀이시군요.”
이미 밀출국을 위한 모든 자료 조사는 끝났다. 아네트는 그저 자신이 머무르게 될 지역과, 그곳에서의 생활 수준만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네트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그 건에 대해선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나저나, 혹 제가 부탁드린 정보는 알아보셨나요?”
어깨를 으쓱한 아네트가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라일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네트를 얼른 출국시키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돈 때문인가?
사람 한 명을 몰래 밀출국시키고, 새 나라에서의 신분까지 확실히 위조해 주는 라일린의 서비스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사실 그 과정에 들어가는 무수한 노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비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네트는 이를 감당할 금전적인 능력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가 화제를 돌리자, 라일린이 못 이긴 척 넘어가 주었다.
“저번에 부군 되시는 분의 철광석 광산이 궁금하다고 하셨죠? 아마 칼람브리아 산맥에 위치한 광산일 겁니다. 그렇지요?”
“맞아요. 그이의 광산 사업은 지금 어떤가요? 아는 대로 다 말해주세요. 정보 값은 얼마든지 치를 테니까.”
아네트가 고개를 돌려 라일린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는 꼭 핑크 레이스 로즈처럼 아름다운 색조였다. 이를 보는 라일린의 입술이 요요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