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설마 라펠이 자신과 같이 이브닝 파티에 참석할 줄 몰랐던 아네트는 마냥 기뻤다. 그래서 그녀는 미처 라펠의 붉어진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아네트의 머릿속은 아쉬웠던 전생의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전생엔 그의 소드 마스터 축하연회에 가지 못했었지. 이번에도… 아마 그러려나?’
전생에도 라펠은 기어이 제힘으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당시 병석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네트가 죽기 약 반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이때 라펠의 소드 마스터 달성을 축하하는 연회가 대대적으로 열렸었다.
사실 그럴 만한 사건이었다. 전 대륙을 통틀어 봐도 한 세대에 소드 마스터는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귀중한 인재였다. 샤펠 제국처럼 큰 곳에선 종종 나타나는 편이었지만, 델티움 같은 일개 왕국에선 정말로 보기 드문 경사였다.
당연히 셀그라티스 왕은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자국에서 이런 인재가 나타난 것도 대단한 일인데, 하물며 그게 자신의 아들이라니! 그는 국가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라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했다. 덕분에 델티움 전역에 성대한 축하연이 한 달 내내 이어졌다.
하다못해 왕세자의 대관식도 이토록 요란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네트는 이 모든 축하연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아팠었고, 라펠과도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말이다. 이 때문에 축하연의 규모를 말로만 전해 들으며 씁쓸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아네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라펠을 떠나야 할지, 그의 곁에 계속 머무를지조차 아직 정하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려면 우선 라펠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때마침 파티에 같이 가게 되었으니, 물어볼 시간은 많았다. 아네트는 조만간 라펠을 슬쩍 떠볼 작정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당신이 정말 싫어.’ 같은 소리를 듣진 않겠지.
“그럼 결정된 거야. 이 파티에 같이 가는 거로.”
때마침 라펠이 손에 든 초대장을 무뚝뚝하게 흔들어 보였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에 쥐어진 예쁜 초대장은 꼭 장난감 같았다. 아네트는 씁쓸함을 지우고 일단은 밝게 웃었다. 그래, 라펠과 같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니 새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좀 더 해봐도 될 것 같았다.
“좋아요. 그럼 준비부터 좀 하러 갈까요?”
“준비? 무슨?”
라펠이 멀뚱히 되물었다. 아네트는 굳이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이처럼 성대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특히 부부가 처음으로 같이 참석하는 뜻깊은 자리라면 더더욱 그랬다.
다행히 아네트는 이런 분야에선 제법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 * *
“레이디 아네트!! 아니, 이제 카네시스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호화로운 의상실 안쪽에서 걸어 나온 여자가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키가 무척이나 크고 말랐다. 그래서인지 중성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였다. 그녀를 본 아네트가 활짝 웃으며 팔을 뻗어 마주 끌어안았다.
“티나! 너무 보고 싶었어!!”
“저도요. 어쩜, 더 예뻐지셨네! 이 투명한 피부 좀 봐요. 눈동자도 핑크 토파즈처럼 깨끗하고! 요즘 잠을 잘 자는 모양이죠?”
두 여자가 서로를 끌어안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럭셔리 의상실, 파피옹의 디자이너 티나 해밀튼은 아네트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다. 덕분에 아네트가 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티나는 줄곧 그녀의 의상을 담당해 왔다. 아네트에게 있어서 티나는 꼭 친구나 사촌 언니처럼 편안한 사람이었다.
현생에선 티나와 그리 오랜만에 다시 재회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한 시간까지 감안하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아네트는 전생에 모든 사교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한지라, 의상실을 찾을 일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시 옷을 맞추는 이 순간이, 그리고 눈앞의 티나가 유독 더 반가웠다.
“여긴 내 남편이야, 티나. 인사해.”
인사를 끝낸 아네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라펠을 소개했다. 그러자 한 발 뒤에서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관망하던 라펠이 불편한 듯 어정쩡한 눈인사를 건넸다. 남자들끼리 딱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신사용 의상실을 다니던 라펠에게 이곳은 너무 낯설었다. 사방에서 반짝이는 형형색색의 옷감들, 지나치게 사근사근한 점원들의 태도, 알 수 없는 파우더 향기까지.
고객의 불편함을 귀신같이 눈치챈 티나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바쁘게 라펠의 외모를 훑어보고 있었다. 웃는 눈매 사이로 가려진 티나의 동공이 커졌다.
‘어머어머, 세상에! 소문대로 완전 미남이네!!’
티나의 의상실, 파피옹은 델티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곳이었다. 그녀는 숙녀복을 전문으로 했지만, 신사복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여기에 아네트와 친하다 보니, 그녀와 장차 결혼할 줄 알았던 루드비히 왕세자의 옷 또한 제작하곤 했었다.
물론 왕세자인 루드비히도 좀처럼 보기 드문 호화로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특히나 순은처럼 길고 아름다운 은발과 섬세한 이목구비의 조화가 꼭 예술품 같은 미남이었다. 그러나 티나는 개인적으로 눈앞의 라펠이 더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라펠은 오직 신사 전용 의상실만을 이용하는 몇 안 되는 상남자였다. 고로 티나가 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 만남에서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라펠의 저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얼굴,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는 야성적인 푸른 눈! 외모 전체에서 풍기는 카리스마 자체가 대단히 유니크하고 섹시한 느낌이었다. 여자라면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티나는 말없이 아네트를 바라보며 엄지를 척하고 들어 올렸다. 그 제스처의 의미를 알아차린 아네트가 웃음을 터트리며 티나의 팔을 찰싹 때렸다. 늘 얌전하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처럼 재회한 친근한 사람 앞에서 아네트의 얼굴이 생기를 머금고 자연스레 빛났다.
라펠은 낯선 장소가 거북한 와중에도, 아네트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꼭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아네트를 연신 뒤쫓고 있었다. 이를 본 티나가 능글맞게 웃었다.
“흐응.”
사실 티나는 오랜 고객인 아네트가 정략결혼을 한다기에, 많이 걱정스러웠다. 아네트는 곱게 자란 아가씨답게 섬세하고 마음 약한 구석이 있었다. 반면 라펠은 젊고 유능한 미남이긴 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이 과히 좋지 않았다. 특히 불같고 난폭한 성정으로 무척 유명했다. 티나는 과연 아네트가 그런 남자와 결혼 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극복 가능한 문제지! 암, 그렇고말고.’
티나는 흐뭇하게 라펠을 바라보았다. 낯선 장소에서 신경이 예민해진 라펠의 모습은 꼭 커다란 고양잇과 맹수 같았다. 하지만 아네트의 옆에 딱 붙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은 제법 귀여운 면모도 있었다.
티나는 눈앞의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보고서 어쩐지 의욕이 불타올랐다. 자신이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었기에 더더욱 감회가 특별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티나가 아네트의 손을 꼭 잡고서 물었다.
“자아, 고객님. 그래서 오늘은 어떤 드레스를 맞추러 오셨나요? 동방의 이국적인 실크부터 레탄의 다겹 레이스, 최근 유행하는 옴브레 기법의 염색 원단까지! 완벽한 드레스를 위한 완벽한 재료들이 고객님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오늘은…… 여기, 이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맞출 거야.”
아네트가 얇게 접힌 초대장 하나를 티나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아침에 막 받은 따끈따끈한 신상 초대장이었다. 이를 받아든 티나가 내용을 상세히 살핀 후, 몇 가지 제안을 던졌다.
“이브닝 가든 파티네요. 밤중의 야외 파티니까 노출은 적당히, 그리고 감기에 걸리지 않게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숄도 같이 제작하면 좋겠어요. 원하는 색상이 따로 있으신가요?”
“음.”
아네트는 색상을 말하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티나는 곧바로 아네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티나의 가장 귀하고 오래된 단골 고객이었으니까.
“다른 참석자분들의 의상을 먼저 본 후에 결정할 생각이군요. 그렇지요? 혹시 특별히 신경 쓰이는 귀부인이라도 있으신가요?”
목소리를 낮춘 티나가 소곤소곤 물었다. 사교계에 있어서 정보는 말 그대로 생명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의상과 색상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후, 이를 참고하여 자신이 더 돋보일 수 있는 드레스를 고르는 것. 이러한 정보력을 갖추는 건 델티움의 잘 나가는 의상실이라면 당연한 서비스였다.
만약 이런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질 낮은 의상실을 이용하는 귀부인들이라면, 간혹 딴 참석자와 의상이 겹치거나, 유행하는 드레스 코드에 홀로 뒤떨어지는 굴욕을 맞봐야 했다. 당연히 바이에른 공작가 출신인 아네트는 이런 굴욕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 면에서 티나는 단 한 번도 아네트를 실망시켜 본 적이 없었다.
“티나, 내가 듣기론…… 이 파티에 레이디 셀레스틴도 참여한다던데.”
“아아. ‘그분’ 말씀이시군요. 물론 알고말고요.”
티나가 우아하게 웃으며 눈치껏 아네트의 말을 알아들었다. 안 그래도 티나 또한 아네트를 제치고 왕세자비가 된 셀레스틴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다. 언젠가 아네트의 왕세자비 대관식에 입힐 드레스를 만들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티나였다. 이건 비밀이었지만 사실 재료도 좀 모아놨었다. 근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셀레스틴 덕분에 다 공쳤다!
자연히 셀레스틴을 향한 티나의 감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나 셀레스틴이 이용하는 의상실이 제 경쟁업체라는 점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래서 티나는 제가 이미 풍문으로 전해 들은 소문을 척 꺼내 들었다.
“듣기론 그분은 여름의 레몬처럼 아주 산뜻한 컬러의 드레스를 입겠다 하시더군요. 원단 전체에 금사로 수를 놓아서 아주 호화롭고 반짝거린대요.”
“흠, 노란색 원단에 금사라.”
갈색 머리칼을 가진 셀레스틴에겐 퍽 잘 어울리는 드레스가 될 터였다. 아네트는 이 이브닝 파티를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 전생엔 미처 셀레스틴과 만나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그녀의 집안은 아네트를 원수처럼 여겼고, 아네트가 절대 셀레스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끔 경계했다. 뭐, 그들 입장에선 아네트가 납치 사건의 주범이라고 믿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꼭 셀레스틴과 대화를 해 봐야겠어.’
아네트는 이번 파티에서 과연 어떤 옷을 입는 편이 좋을지 고심했다. 그러자 티나가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여러 가지 원단 샘플들을 집어 들고 보여주었다.
“푸르른 정원에서 하는 이브닝 파티니까, 화사한 샐몬 핑크 컬러는 어떠세요? 초목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올 테지요. 아니면 이 산뜻한 하늘색 로브에 은빛 보디스를 조화시켜 청량감을 주는 것도…….”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어색하게 서 있던 라펠이 입을 연 것은.
“이건 뭐지?”
라펠의 어조는 조용했지만, 쉬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를 겪고 온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라펠의 묵직한 목소리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티나는 저도 모르게 하던 말을 멈추고 라펠을 돌아보았다.
라펠이 바라보고 있던 건 의상실 한편에 진열되어있는 한 쌍의 맞춤형 의복이었다. 이를 본 티나가 화사한 영업용 미소를 띠며 설명했다.
“아, 이건 요즘 샤펠 제국에서 유행하는 커플 드레스 룩이랍니다.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서 금슬을 과시할 때 주로 맞춰서 입는 복식이지요. 참 사랑스럽죠?”
전시된 여성의 드레스는 짙은 남색 로브에 화려한 레드 보디스로 포인트가 들어가 있어, 세련되면서도 여성스러웠다. 한편 그 옆에 선 남성의 복식 또한 남색 코트에 짙은 레드 크라바트의 배색으로 구성된 것이, 누가 봐도 한 쌍의 커플용 세트가 틀림없었다.
라펠은 노골적으로 관심 있는 눈빛으로 그 복장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저러다 원단이 뚫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