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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라펠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만약 아네트가 이 자리에서 루드비히를 택한다면…… 자신은 이전처럼 멀쩡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건 고작 정략결혼일 뿐인데, 하물며 아네트는 그 지긋지긋한 바이에른 가 출신인데… 자신은 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라펠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실행에 옮기기 직전, 아네트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제가 결혼하는 게 싫으셨다면 함께 도망이라도 치지 그러셨어요. 그게 아니면 정략결혼이라도 못하게끔 뒤에서 손을 써 주시던지요.”



라펠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네트는 자신과 한 정략결혼이 그토록 싫었던 걸까? 충격 때문에 귓가에서 울리던 이명이 더욱 크게 들렸다. 이 때문에 라펠은 그 뒤에 이어지는 아네트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당시 제가 쓴 …을 벗겨주기 위해 …이라도 해 주셨다면 제가 이토록 …하진 않을 것 같군요.”



라펠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더 다가가면 들킬 우려도 있었지만, 온몸의 감각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도무지 눈앞의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제 눈으로, 제 귀로 이 상황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아네트가 한 마지막 말이 라펠의 귓가를 강타했다.



고개를 든 아네트는 라펠이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저를 조금이라도 존중하신다면, 이렇듯 부탁드려요. 두 번 다시 제 남편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라펠은 좋은 남자이고, 제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절 기꺼이 아내로 맞아 주었어요. 이제 그는 제 가족입니다. 그 누구도 본인 앞에서 그 가족을 헐뜯는 경우는 없지요. 제 말 이해하시겠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라펠은 할 말을 잃었다. 묘하게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아네트에게 딱히 잘해준 적도, 그녀를 믿어준 적도 없었다. 다만 아네트가 한결같이 그에게 신의를 지켰을 뿐.



근데도 지금 아네트의 입으로 듣는 자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관대하고, 멋진 남자처럼 들렸다. 그래서 라펠은 자기 자신이 오히려 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감히 청하건대,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신 사적인 용무로 찾아뵐 일 없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할 말을 끝마친 아네트가 등을 돌렸다. 델티움에서 가장 고귀하고 잘난,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왕세자에게서.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집으로,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해서.



이를 본 라펠은 처음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확신에 찬 아네트의 걸음걸이가, 그녀의 꼿꼿한 등이 눈부셨다. 이제 저 멀리 서 있는 루드비히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라펠은 그저 못 박힌 듯 아네트의 뒷모습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녀가 완전히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가족, 이라…….’



라펠은 속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다행히 아네트의 뒤를 밟은 건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귀가한 아네트는 자신의 태도를 좀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이었지만, 의심하진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네트가 잠든 후, 침실로 숨어들어 온 라펠은 말없이 그녀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여자는 자꾸만 그에게 생소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여자는 나에게 해로운 것일까, 좋은 걸까. 라펠은 도무지 답을 내릴 수 없는 눈앞의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누워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작고 규칙적인 숨결이 따뜻했다.









* * *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래서인지 뒤뜰에 핀 라일락에서 기가 막히게 근사한 향기가 실려 왔다. 하지만 그 향기조차도 아네트의 머리칼과 목덜미에서 나는 살 내음보다 더 향긋하진 않았다.



아네트는 소파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네트를 뒤에서 끌어안은 라펠이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가, 쭉 핥아 올렸다. 그러자 라펠의 품 안에 갇힌 아네트가 어깨를 움츠리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입에서 꼭 반짝이는 종소리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지러워요, 라펠.”



“뭘 그리 보고 있는 거지?”



꼭 커다란 고양잇과 짐승처럼 아네트를 방해한 라펠이 고개를 숙여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네트가 방금까지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확인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고급 종이에 은박으로 글씨를 새긴 것은 다름 아닌 초대장이었다.



“가든 이브닝 파티? 엘로크 후작가에서 개최하는 모양이군.”



“네. 그곳의 여름 정원은 꽤 아름답거든요. 당신도 가 본 적 있나요?”



“딱히.”



라펠은 사람 많은 곳에 나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인들은 선망 어린 눈으로 그에게 추파를 던졌고, 다른 남자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기며 뒤에서 흉을 보았다. 용모와 능력에서 상대가 되질 않으니, 그들이 물어뜯을 수 있는 거라곤 오직 라펠의 혈통뿐이었다.



성미가 불같은 라펠이 그따위 짓거리를 참아 줄 리 없었다. 그는 심지어 귀까지 밝았다. 현장을 적발하는 즉시 뒤엎고, 쥐새끼 같은 무리들에게 단단히 겁을 주었다. 하지만 무도회에서 매번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주최자에게 미안한 일이었으므로, 라펠은 자연히 사교계를 꺼리게 되었다.



그래도 주최자가 엘로크 후작가라면 꽤 괜찮았다. 정치적인 중립을 표방하는 가문이고, 역사가 오래된 명문가라서 초대객들도 제법 교양이란 게 있는 편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결혼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무도회를 이곳으로 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누명을 벗으려면 셀레스틴 키어스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셀레스틴은 다른 건 몰라도, 엘로크 후작가의 파티에는 꼭 참석하는 편이었지.’



파티 주최자인 엘로크 후작 부인은 셀레스틴이 오랫동안 다닌 독서 모임의 회장이기도 했다. 그러니 셀레스틴은 아마 이 엘로크 가의 파티에 참석할 터였다.



아네트는 다시 셀레스틴과 마주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기대되었다. ‘그’ 납치사건 이후로 셀레스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아네트는 과연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서도 태연하게 피해자인 척 연기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라펠은 아네트가 왜 이리 비장한 표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초대장을 내려다보는 아네트의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녀는 꼭 방울뱀과 싸우기로 한 토끼처럼 겁을 잔뜩 먹은 눈이었다. 그래서 라펠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아네트에게 물었다.



“갈 건가? 이 파티.”



“음…… 네, 그럴 생각이에요.”



아네트가 솔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꼼꼼히 초대장을 뜯어본 라펠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길은 초대장에 적힌 장소와 시간을 주목하고 있었다.



“개최 시간이 너무 늦잖아. 밤인데 이상한 놈이라도 붙으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장소가 야외로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야? 엘로크 후작가에서 책임이라도 진다던가?”



아네트는 라펠이 왜 갑자기 파티에 트집을 잡나 싶어 의아해졌다. 여름의 야외 가든파티는 원래 밤에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낮에는 너무 더웠기 때문이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아네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인걸요. 밤이 되어야 좀 선선하니 기분이 좋을 거예요. 그리고 이브닝 파티라고 해 봐야, 저는 어차피 9시 전엔 나올 생각이에요.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아네트의 대답은 몹시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라펠이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뒤에서 아네트의 귓바퀴를 자근자근 깨물었다. 꼭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내 말은, 위험하다는 얘기야. 감기도 위험하고, 돌아오는 길도 위험하고. 아무튼 밤의 파티는 위험하다고.”



“……그럼 저에게 가지 말라는 얘기인가요?”



잠시 침묵하던 아네트가 고개를 돌려 라펠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로크 후작가의 이브닝 파티라면 아네트의 재데뷔 장소로 적합한 곳이었다. 거기다 왕세자비 대관식 준비로 한창 바쁜 셀레스틴이 올 가능성도 컸다.



이런 곳은 흔치 않았다. 아네트는 가급적 이 파티에 꼭 참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라펠이 자꾸 이런 식으로 막으려 든다면 그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곧 다가올 싸움을 예상한 아네트의 눈꼬리가 우울함에 축 처졌다.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이를 본 라펠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품 안에 끌어안겨 있던 아네트의 몸이 놀란 듯 움츠러들었다. 바로 귓가에서 험악하게 소리를 쳤으니, 그녀가 겁을 먹을 만도 했다. 이를 본 라펠이 눈썹을 찌푸리며 스스로의 행동을 문득 돌아보았다.



‘내가 요즘 왜 이러지?’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아네트의 눈치를 보고 있단 사실을 자각했다. 오늘도 보라, 그녀의 주위를 일없이 얼쩡거리다가 기어이 가서 말을 붙이지 않았던가. 초대장을 빼앗으며 고나리질까지 해대고. 이 모든 게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게 다 저번에 아네트의 뒤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꾸 자신을 좋은 남편이랍시고 추켜세워 대니까, 그 장단에 맞추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무슨 어릿광대도 아니고 원. 어쨌든 아네트의 저런 표정을 보고도 계속 지랄을 떨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은근슬쩍 목소리를 누그러트린 라펠이 내뱉었다.



“내 말은…… 위험하니 나도 같이 가겠단 말이야.”



“같이 가겠다고요?”



아네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와 라펠은 전생에 단 한 번도 같이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부부 사이가 워낙에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네트는 당시 일종의 대인기피증까지 있었다. 제아무리 입단속을 단단히 했다 해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사람들이 다들 제 앞에선 모르는 척해도, 뒤에선 다 알고서 수군댈까 봐 두려웠다. 자연히 아네트는 저택 안에 틀어박혀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부부로서 동반 참석한 파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왜, 내가 가는 게 싫은가?”



아네트가 말이 없자, 그녀를 바라보던 라펠의 잘생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전 같았으면 사생아 남편이 부끄럽냐며 빈정댔을 터였다. 하지만 아네트가 자신을 옹호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지금은 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펠의 비딱한 성격은 간혹 이런 식으로 표출되곤 했다. 빨리 대답해라, 나랑 가는 게 좋다고 대답하라는 일종의 압력이었다. 이를 잘 아는 아네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당신과 같이 파티에 갈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기뻐요.”



아네트의 다정한 말에 라펠이 움찔하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관자놀이 부근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아무래도 아네트는 저를 말 한마디로 들었다 놓았다 할 줄 아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