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차가운 얼굴을 한 아네트가 선명한 눈동자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물 흐르듯 매끄러운 반론이 루드비히의 심장을 찔러왔다.
“그렇게 제가 결혼하는 게 싫으셨다면 함께 도망이라도 치지 그러셨어요. 그게 아니면 정략결혼이라도 못하게끔 뒤에서 손을 써 주시던지요. 당시 제가 쓴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 주셨다면, 지금 제가 이토록 화가 나진 않을 것 같네요.”
루드비히는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그녀의 반대편 손에 매인 붕대를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다못해 비즈니스 관계에 불과한 라일린조차도 알아차렸던 것인데 말이다.
루드비히는 매번 고통을 호소하는 쪽이었고, 아네트는 그걸 받아주는 쪽이었다. 무려 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루드비히는 그녀 또한 자신처럼 아플 수 있는 사람임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쌀쌀맞게 말했다.
“저도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전하. 정말로 저와 결혼하고 싶으셨다면 전하께선 그러시면 안 됐었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시고, 저를 놓아주세요. 제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말이에요.”
아네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루드비히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아네트에게 지나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루드비히가 기억하는 아네트는 늘 온유한 미소를 띠고, 자신의 고민과 불안을 성심성의껏 들어주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아네트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타인을 대하듯 하는 무감정한 눈동자와 차가운 표정은 자신이 알던 아네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루드비히가 고통에 헐떡이는 걸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온기 없는 시선에 루드비히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필사적으로 변명을 시도했다.
“아네트, 난 최선을 다했어. 부왕께도 그대가 그럴 리 없다고, 나는 도저히 그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간청했었는지 몰라. 하지만 도저히 설득이…….”
“아뇨, 전하.”
아네트는 과감하게 루드비히의 변명을 끊어버렸다. 회귀한 그녀에겐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그래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드비히의 변명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아네트의 어조에 약간의 분기가 서렸다.
“그건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겉치레만 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요.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싶다면 직접 헤엄쳐 들어가든, 구명줄을 던져 주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어떡해!’ 만 되풀이한다고 해서, 그걸 최선을 다했다고 표현할 순 없겠지요. 안 그런가요?”
아네트는 어릴 적부터 응당 루드비히와 결혼할 거라 생각했었다. 일찌감치 짝지어진 어린 소년 소녀에겐 서로밖에 없었다. 순진하기까지 했던 그 믿음이, 그 기대가 깨어졌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너무나 씁쓸해서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아네트는 물론 루드비히가 자신의 부친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렇다 한들, 자신을 이리도 쉽게 포기할 줄은 몰랐다. 이리도 빨리 외면할 줄은 몰랐다. 미약한 항의를 몇 번 해보다, 못 이긴 척 새로운 약혼을 받아들인 건 다름 아닌 루드비히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트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비단 루드비히가 왕세자였기 때문에 참은 건 아니었다. 그저 루드비히에게 화를 내 봐야 달라지는 게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본디 루드비히는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약했다. 그런 사람에게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하는 이쪽의 입만 아플 따름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꾹 참았다. 풀어봐야 의미가 없는 분노를 그냥 물 흐르듯 고요히 흘려보냈다. 하지만 루드비히가 지난 감정을, 해묵은 배신감을 기어이 입 밖으로 꺼내게 만들었다. 하지만 속이 다 후련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네트는 내친김에 마지막 쐐기까지 쾅 박았다.
“그리고 저를 조금이라도 존중하신다면, 이렇듯 부탁드려요. 두 번 다시 제 남편에 대해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라펠은 좋은 남자이고, 제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절 기꺼이 아내로 맞아 주었어요. 이제 그는 제 가족입니다. 그 누구도 본인 앞에서 그 가족을 헐뜯는 경우는 없지요. 제 말 이해하시겠나요?”
루드비히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자신의 가족은 라펠이라며 선을 긋는 아네트의 태도가 너무 아파서 손끝이 다 저릿했다. 한때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여자는 이제 가장 먼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파서,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네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안일했고, 비겁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네트의 손을 영영 놓쳐버렸다. 이제는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어리광을 부려도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땅을 딛고 서 있는데도 꼭 늪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드는 듯했다. 아네트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루드비히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제가 무례를 저질렀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신 사적인 용무로 찾아뵐 일 없길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아네트가 몸을 돌렸다. 왕족의 허락 없이 등을 보이는 건 본디 왕실에 대한 불경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좀 불경해져도 될 것 같았다. 아네트가 누명을 쓰고 추락할 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루드비히의 모습이 가슴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쭉 함께였던 루드비히는 때론 그녀의 가족 같았고, 오래된 소꿉친구기도 했다. 부왕의 인정을 받지 못해 고통받는 루드비히가 늘 안타까웠었다. 그래서 자신만이라도 그의 곁에 한결같이 머무르고자 했었다.
하지만 먼저 손을 놓은 건 루드비히였고, 그들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아네트는 꽃을 떠나는 나비처럼 사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루드비히는 이제 와 감히 그녀를 잡거나, 강제할 수 없었다.
그는 아네트가 누명에 빠졌을 때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망연한 눈동자에 맺힌 마지막 눈물이 흩어져 마를 때까지.
* * *
“다녀왔어요, 여보.”
귀가한 아네트는 우연히 현관 주위를 서성이던 라펠과 마주쳤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라펠의 넓은 어깨가 흠칫하더니, 묘하게 어색한 동작으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왔군.”
아네트를 바라보는 라펠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그는 아네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이 모든 행동이 어설퍼서 티가 났다. 애초에 라펠은 남의 눈치를 보는 인사가 아니었으니, 어색할 만도 했다.
아네트는 그가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해졌다. 분명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흘끗거리는데, 정작 그의 단단한 입매는 꽉 다물려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아네트가 결국 라펠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래요, 라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피곤할 테니 들어가 쉬어.”
아네트의 시선을 슬쩍 피한 라펠이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현관에 홀로 남은 아네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라펠의 이상한 태도 때문에 혹 자신이 루드비히와 마주친 걸 눈치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라펠은 분명 화를 냈을 터였다. 그는 결코 불쾌감을 담아두지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다행이야. 내가 루드비히 전하와 마주친 걸 모르나 봐.’
아네트는 안도하며 앞으로 더 주의 깊게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생엔 여러모로 누명을 쓴 것 때문에 정신이 불안정해서 약간의 대인 기피증마저 왔었다. 이 때문에 외출을 잘 하지 않았다. 여기에 심지어 몸까지 허약했었다. 툭하면 앓아눕는 몸으로 사교활동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전생에 결혼 후, 루드비히 왕세자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현생엔 자꾸 마주치게 되는 게 불안했다. 이 변화가 과연 미래에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까? 아네트는 그게 걱정이었다.
‘역시 라일린 씨의 충고를 들을 걸 그랬나?’
아네트는 성가신 일을 피하려면 뒷문으로 나가라던 라일린의 말을 떠올렸다. 실로 놀라운 정보력과 배짱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뒷세계의 거물이라도 그렇지, 왕세자인 루드비히를 한낱 ‘성가신 일’ 따위로 치부하다니. 곱상한 얼굴과 달리, 라일린은 제법 간이 큰 위인이었다.
아네트는 앞으로 라일린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침실로 걸어 올라갔다. 루드비히에게 마음에 담아둔 말들을 다 내뱉고 나니, 후련하면서도 뭔가 탈진한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한 아네트는 곧 기절하듯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은근슬쩍 침대 속으로 숨어드는 라펠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죽은 듯이 자는군.’
비스듬히 누운 라펠은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잠든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이쯤 되면 질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아네트의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한동안 묘한 눈빛으로 아네트를 내려다보던 라펠이 문득 중얼거렸다.
“내가, 가족이라고…….”
그랬다. 라펠은 이미 아네트의 하녀, 메리를 추궁하여 그녀의 행선지를 대강 캐낸 후였다. 물론 아네트는 비밀 길드인 세크리트를 찾아가는 만큼, 정확한 행선지를 밝히진 않았다. 하지만 라펠의 짐승 같은 감은 기어이 그녀를 추적해 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운명은 아네트의 편이었는지, 라펠은 미처 ‘세크리트’ 길드를 보지 못했다. 하녀에게 들은 애매한 범위를 닥치는 대로 수색하느라 현장에 좀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라펠이 아네트를 찾았을 땐 이미 세크리트를 빠져나온 후였다.
다만 문제는 그 옆에 딴 남자, 루드비히가 버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사실 라펠은 처음에 아네트가 루드비히와 밀회 중이라고 오해할 뻔했다. 사실 그럴만한 모습이기도 했다. 루드비히와 마주 선 아네트를 본 순간, 라펠은 말 그대로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 사이로 오고 가는 대화는 밀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말해 봐, 아네트. 그대도 나보다 라펠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날 이리도… 매정하게 내치는 건가? 그 대단하신 라펠 카네시스에 비하면, 나 같은 건 남자도 아닐 테지!!”
멀리서 루드비히의 고함을 듣는 순간, 라펠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네트는 자신 몰래 바람을 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질척대는 루드비히를 거절하는 중에 가까웠다. 라펠은 왜 자신이 이 사실을 이토록 기껍게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라펠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아네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아네트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런 루드비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라펠은 괜히 초조해졌다.
왜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거지? 라펠은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고, 귓가에서 이명이 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는 소드 마스터에 근접한 라펠답지 않은 신체적 이상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뛰쳐나갈까?’
라펠은 곧 이어질 아네트의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마음이 흔들리면 어쩌지?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다, 자신과 결혼한 게 좋다는 말이 다 거짓이었다면?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완벽한 혈통의 루드비히를 택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