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라일린의 충고를 들은 아네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했다. 뒷문으로 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라일린이 좀 더 자세히 알려 준다면 선택하기가 쉽겠지만, 그는 심술궂게도 그저 생글생글 웃을 따름이었다.
이에 반발하듯 아네트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뼛속까지 몸에 밴 귀족적인 자태로 선언했다.
“살아보니 문제는 그저 피한다고 다 능사가 아니더군요. 그러니 전 정문으로 나가겠어요. 그곳에 뭐가 기다리고 있든, 그것 또한 제가 맞닥뜨려야 할 과제일 테니까요.”
라일린이 ‘부디 뜻대로 하시길.’이란 짧은 말과 함께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아네트가 반드시 후회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를 굳이 귀띔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때론 직접 마주쳐 봐야 아는 것들도 있었으니까. 고개를 숙인 라일린의 요염한 입술에 심술궂은 미소가 걸렸다.
이를 알 리 없는 아네트는 모자를 단단히 눌러 써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확신에 찬 걸음으로 정문을 향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게 뭐가 되었든, 자신의 힘으로 직접 해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정문으로 나간 아네트는 채 5분도 되지 않아 라일린의 말처럼 후회했다.
‘그냥 뒷문으로 나갈걸!’
그녀는 5분 전의 자신을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물론 피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엔 때론 피하는 게 더 나은 문제들도 있는 법이었다. 이를테면 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루드비히 왕세자처럼 말이다.
“아네트.”
긴 은발을 하나로 묶어 내린 루드비히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은으로 빚어 만든 듯한 그의 우아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를 본 아네트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대체 멀쩡한 약혼녀인 셀레스틴을 놔두고서, 왜 자꾸 자신에게 이런단 말인가.
“아네트, 미안해. 난 그저…… 억!!”
슬픈 표정으로 다가오던 루드비히 왕세자가 가로수에 부딪혀 이마를 움켜쥐었다. 그는 은발에 큰 키,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가끔은 정말로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완벽한 겉모습과 달리,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루드비히의 놀라운 재주였다.
아네트는 이토록 몸치인 루드비히가 무려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라펠의 배다른 형제라는 게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딴생각을 하면서도 차분히 루드비히의 이마에 손수건을 대 주었다.
“전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설마 제 뒤를 밟으신 건가요?”
왕세자에게 말을 건네는 아네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과 어조는 상당히 단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네트는 ‘세크리트’를 방문하기 위해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고로 그녀의 얼굴은커녕 목조차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히는 자신을 보자마자 대번에 ‘아네트.’ 하고 이름을 불렀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알아보다니, 설마 ‘놀라워라, 사랑의 힘이여!’ 따위는 아닐 터였다. 차라리 아네트가 외출할 때부터 그 뒤를 밟았다는 가설이 좀 더 신빙성 있었다.
오늘따라 개인 정보를 유독 많이 털린 아네트는 상당히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유부녀인 자신이 루드비히와 자꾸 얽혀서 좋을 게 하등 없었다. 이런 아네트의 거부감을 알아차린 루드비히가 더 다가오지 못하고 쓸쓸한 눈빛을 했다.
“아네트. 내가 이러는 게 그대에겐 민폐겠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더군. 도무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아네트, 그대가 아니면 말이야.”
루드비히가 처연하게 은빛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지독한 쓸쓸함과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라면 누구나 모성애를 느끼고 다독여 줄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별 동요 없이 루드비히의 말을 부드럽게 반박했다.
“전하께는 약혼녀 되는 분이 따로 계시지요. 그뿐 아니라, 이 델티움에서 왕세자 전하의 고민 상담을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답니다. 다만 전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셔서 그렇지요. 부디 마음을 열고 새로운 인연들을 찾아보셔요. 인간관계는 중요하잖아요.”
“그대가 잘 몰라서 그래! 셀레스틴은, 그녀는 정말… 그대와 너무 달라. 비교조차 할 수 없어. 나는, 아네트. 도저히 그녀를 내 약혼녀로 생각할 수가 없어서…….”
루드비히가 말하던 도중, 감정이 울컥 치솟은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예술가에 가까운 그는 기본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불안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옆에서 늘 그런 루드비히를 차분하게 다독여 주곤 했었다. 좋게 말하자면 정신적 지주였고, 솔직히 말하자면…….
‘감정 쓰레기통이었지.’
아네트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만약 루드비히가 새 약혼녀인 셀레스틴 키어스와 잘 지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처럼 자신에게 매달릴 일도 없었을 터였다. 아네트는 과연 루드비히가 자신을 여자로서 좋아하는 건지, 그저 엄마를 따르듯 기대고 의지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뭐, 어느 쪽이든 이제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네트, 제발. 그렇게 매몰차게 날 밀어내지 마. 그대마저 나에게 이러면, 정말 난…….”
괴로운 듯 크게 뜬 루드비히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아네트의 손을 잡아 올려서 그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그 모습이 꼭 아네트에게 기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애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루드비히의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는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라펠을 떠날 생각으로 밀출국 길드에 온 입장이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자신은 여전히 라펠의 아내였다. 지금 루드비히가 가엾다고 그를 자꾸 받아주면, 나중엔 라펠이 가엾어질 터였다. 어차피 둘 중 하나를 상처입혀야 한다면, 라펠이 아닌 루드비히를 상처입히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전하. 지금 전하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해요. 전하께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하지만 제가 그 방법이 되어드릴 순 없어요. 저는 이미 라펠과 결혼한 몸이니까요.”
아네트는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루드비히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선 긋기였다. 그녀는 어영부영 루드비히의 하소연을 받아주다가, 나중에 라펠의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착한 여자 병’에 걸린 철부지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아네트의 손을 놓친 루드비히는 천천히 허공에서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고, 아름다운 얼굴에 광기 어린 절망이 떠올랐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루드비히가 울 듯이 고함을 쳤다.
“그놈의 라펠, 라펠!! 모두가 그놈의 얘기만 해 대지. 차라리 그가 왕세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야. 하다못해 부왕조차도 그렇게 얘기하고!!!”
핏발이 선 루드비히의 푸른 눈은 지독하리만큼 라펠과 닮아 보였다. 늘 조용조용하던 루드비히가 이렇듯 고함을 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운 은발을 쥐어뜯는 그의 손길은 몸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욱 극심해 보였다.
“그렇다면 난 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거지? 내가 없었다면 라펠, 그놈도 어엿한 왕위 계승권자였겠지!! 그놈은 내 모든 걸 앗아갔어. 아바마마의 부정, 세간의 평판, 심지어 아네트 당신마저도……!!”
루드비히의 슬픈 절규를 듣던 아네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셀그라티스 왕이 또 루드비히를 라펠과 비교한 모양이었다. 그는 비교적 좋은 왕이었지만, 결코 좋은 부친은 못 되었다.
셀그라티스는 하나뿐인 왕세자가 지독한 몸치인 데다, 류트 타길 좋아하는 음악가 성향이란 걸 못마땅해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루드비히를 자신의 사생아인 라펠과 비교하며 종종 모욕을 주곤 했다. 마음 여린 구석이 있는 루드비히는 이러한 부왕의 태도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부친의 인정을 갈망했다. 그것이 루드비히를 미치게 만드는 주요인이었다.
“말해 봐, 아네트. 그대도 나보다 라펠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날 이리도… 매정하게 내치는 건가? 그 대단하신 라펠 카네시스에 비하면, 나 같은 건 남자도 아닐 테지!!”
루드비히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찾아온 이곳에서 그는 한층 더 크게 상처 입었다. 아네트가 그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처음 본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하나뿐인 루드비히의 반려였다. 적어도 루드비히에겐 늘 그랬다. 그런 아네트의 내침은 루드비히를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그의 고함을 듣던 아네트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루드비히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약한 사람이었고, 정신적으로 다소 의존적인 경향이 강했다. 아네트는 본디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에게 다정한 편이었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루드비히가 자꾸 라펠을 물어뜯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펠 또한 편하게만 살아온 인생은 아니었다. 그는 혈통 빼곤 부족할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왕의 비호를 받았고, 검술도 뛰어났으며, 인물도 훤칠한 데다, 후작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라펠이 이를 악물고 뼈를 갈아내다시피 해서 얻어낸 것들이었다. 이를 잘 아는 아네트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루드비히 전하.”
난생처음 듣는 아네트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루드비히가 흠칫했다. 그녀를 죽 알아 온 세월 동안 처음으로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고작 이름 한 번 부른 것만으로 대화의 분위기를 바꾼 아네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아시다시피 저는 무고한 누명을 쓴 사람이고, 당시 전하께선 제 손을 놓아 버리셨지요. 물론 당시 상황이 불리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랬다 한들, 전하께선 절 지켜 주셨어야 했어요. 제가 전하께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였다면 말이에요. 안 그런가요?”
“아네트, 그건… 내 말을 들어봐, 그때 난…….”
“아뇨, 전하께서 제 말을 들으셔야 해요. 전하께선 당시 폐하의 진노가 두려워서 결국 절 포기하셨어요. 저는 그 일로 왕세자비 후보에서 제명되었고, 끝내는 팔려가듯 정략결혼까지 했죠.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저 아닌가요? 하지만 전 전하를 원망하는 대신, 이해해 보려고 했어요. 한데 왜 전하께선 이제 와 저를 힐책하려 드시는지요?”
아네트의 어조는 딱히 흥분해 있지도, 그렇다고 분노에 차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꼭 책이라도 읽듯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듣는 루드비히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명치를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몹시 아팠다.
그러나 아네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조용한 분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