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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가엾은 하녀는 쩔쩔매며 제 주인에게 아네트의 외출에 대해 설명했다.



“네. 두 시간 전에 이 근방으로 나가신다고…….”



이 근방에 나갈 곳이 뭐가 있다고. 라펠은 괜히 아네트가 집에 없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그녀처럼 작고 가냘픈 여자가 돌아다니기엔 밖이 너무 험난했다. 혹시 알겠는가? 저번처럼 왕세자가 나타나 작별 인사나 하자고 질척댈 수도 있는 거고, 다이애나 맥클레어 같은 미친년이 친한 체하며 왕세자비 못 되어 어쩌냐고 지랄을 떨 수도 있지 않은가?



라펠은 저택 밖에 산재하는 모든 위험을 떠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덕분에 그의 앞에서 벌서듯 붙잡혀 있는 하녀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만 갔다. 그러나 하녀의 공포심엔 별 관심 없는 라펠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이 근방이라고?”



“네, 네네. 아마 메리라는 하녀가 마님의 행선지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 불러다 드릴까요, 주인님?”



어떻게든 라펠의 심문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하녀가 간절하게 말했다. 라펠은 사실 그렇게까지 추궁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하녀의 제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자신은 결코 아네트를 옥죄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걱정되니까 어디 갔는지나 알아두려는 것뿐이지.



“그래. 불러와.”



자기 합리화를 마친 라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녀가 메리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쌔게 사라졌다. 그 빠릿빠릿한 태도를 보며 라펠은 고용주로서 만족감을 느꼈다. 역시 귀족이 된 건 자신이 얻어낸 것 중 가장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그러니 아네트 바이에른과도 결혼할 수 있었고 말이다.



‘잠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마지막 생각은 자신이 보기에도 좀 이상했다. 라펠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아네트에게 점점 정이 들어가는 듯하여 불안감이 덜컥 들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그편이 훨씬 편하다고 느꼈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 작정이었다.









* * *









희고 우아한 손이 꼭 아네트의 손을 움켜쥘 듯이 바짝 다가왔다. 그러나 흰 뱀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 손은 아네트의 주위를 한 바퀴 돈 후, 가볍게 붕대 위를 툭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오싹하리만큼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다치셨군요.”



“아, 네. 사고가 좀 있었어요.”



아네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다친 손가락 위를 쓸어내렸다. 아마 일주일 후쯤엔 붕대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네트의 부상을 바라보는 남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뜻 보면 화려한 미인 같은 외모를 한 자줏빛 머리칼의 남자가 혀를 찼다.



“아름다운 손인데, 퍽 안타깝게 되었군요. 이래선 수를 놓기도 어렵겠는걸요.”



그제야 아네트는 저번 상담에서 자신이 할 줄 아는 특기에 ‘수 놓기’를 운운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겸연쩍은 표정-그래 봐야 베일 때문에 얼굴이 보이진 않겠지만-으로 손을 감추며 대꾸했다.



“곧 나을 거예요. 애초에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라.”



그랬다. 아네트가 지금 마주 보고 대화하는 상대는 밀출국 길드 ‘세크리트’를 운영하는 라일린 모슬리였다. 그는 지난번에 아네트에게 밀출국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드디어 연락이 온 것이었다.



라일린이 최상급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를 곱게 휘면서 두툼한 보고서를 건넸다. 아네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오스란드에서 정착하기 좋은 마을들과 그곳의 추천 일자리들, 집값과 땅값의 평균 시세까지 전부 적혀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훌륭하네요. 한번 살펴보고 마음을 정한 뒤 연락 드릴게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상담이 필요하거나 추가 정보를 원하시면 얼마든지 연락 주시지요. 저희 ‘세크리트’는 항상 고객의 만족을 최선으로 생각하니까요.”



라일린이 아주 요요하게 웃었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꼭 히아신스처럼 화려한 자주색 머리칼은 아름다운 컬이 들어가 있었고, 고양이처럼 길고 나른한 붉은 눈동자엔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특히나 웃는 입꼬리 옆에 찍힌 점이 가히 화룡정점이었다.



만약 라일린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델티움의 남자들이 그 발 앞에 전 재산을 가져다 바쳤을지도 몰랐다. 그는 눈짓이나 미소 하나로 사람을 조련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부러워라.’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베일 밑으로 부러움에 찬 눈빛을 했다. 그녀가 배운 거라곤 귀족답게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고고하게 턱을 치켜드는 것, 기품 있는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것들은 사교와 교양 생활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남편과의 관계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자신에게도 저런 요염함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때, 라일린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실례라면 죄송합니다만, 고객님께선 왜 이곳을 떠나시려는 건지요? 부족할 게 없는 분 같은데, 괜찮다면 그 연유를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갑작스러운 라일린의 질문에 아네트는 가슴이 철렁했다. 한 번도 자신의 신분을 밝힌 적이 없거늘, 그는 꼭 아네트가 누군지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에 아네트가 반신반의하며 침묵하자, 라일린이 옆집 이웃의 안부라도 묻듯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아, 제 질문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행여 고객님의 부군 되시는 분께서 추적을 시도할 경우, 그 뒷수습도 해 드려야 하니 사전에 미리 확인하는 겁니다.”



이로써 라일린이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게 확실해졌다. 최대한 신중하게 이곳을 오갔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찌 안 일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아네트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죠?”



“아시다시피 제 사업 분야는 비단 밀입국과 밀출국에만 한정되어있는 게 아니니까요. 정보가 느리면 저 같은 미인이 어찌 이 험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암흑가의 큰손, ‘시크리트’ 길드의 책임자인 라일린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아네트의 정체를 짐작했었다. 다만 밀출국 따위를 알아보기엔 너무 거물인지라 긴가민가했을 뿐.



그러나 아네트가 오늘 손에 감고 온 붕대를 보니 모든 게 확실해졌다. 라일린의 정보 길드는 카네시스 후작가에 초빙된 의원이 어떤 진료를 했는지까지도 파악하고 있을 만큼 유능했다. 생각보다 귀한 고객을 앞에 둔 라일린이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편, 아네트는 자신의 신분이 밝혀진 것에 대해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에 차가운 경계가 서렸다. 이를 눈치챈 라일린이 손사래를 치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저희 ‘시크리트’는 언제나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답니다. 귀하신 분의 시야를 고작 베일 따위가 가리려 드니, 이유 없는 불편을 겪으시는 듯하여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부디 저희의 신의를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결론은 이미 아네트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부질없는 베일 따윈 쓰지 말란 소리였다. 아네트는 생각보다 날카로운 라일린의 정보력에 놀랐다. 과연 정보 길드도 운영한다더니, 예상보다 더 놀라운 수준이었다.



아네트는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베일 달린 모자를 벗어들었다. 확실히 실내에서 목까지 꽁꽁 감추는 모자를 쓰고 있으려니 갑갑하긴 했다. 다행히 자신이 ‘고객’인 이상, 라일린은 쉬이 입을 놀릴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인간이었다면, 세크리트 길드가 지금처럼 크지도 못했을 터였다.



“흠.”



모자를 벗은 아네트의 얼굴을 본 순간, 라일린이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네트는 심기가 퍽 불편했다. 자신의 정체를 상대에게 들켰다는 경각심이 까끌하게 마음을 긁었다.



‘아마 라펠도 나에게 몽유병을 들켰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라펠과의 공감 포인트를 찾은 아네트는 눈을 내리깔았다. 한번 라펠을 떠올리자, 자연히 그녀의 입에서 나올 질문도 정해져 있었다. 아네트는 신중하게 라일린의 또 다른 사업 분야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렇다면 혹시 정보 조사도 의뢰할 수 있나요? 남편의 철광석 광산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좀 있는데요.”



“물론이지요. 다만, 제 질문에 대한 답부터 먼저 주셨으면 좋겠군요. 만약 고객님께서 밀출국을 하실 경우, 남편 되시는 분께서 추적을 시도하실까요?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서.”



화사하게 웃는 라일린은 눈이 어지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잘 보면 참으로 빈틈없이 철저한 얼굴이기도 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라일린은 정말로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아네트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네트도 그의 페이스에 마냥 끌려다닐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이 내심 불쾌했던 그녀는 우아하게 웃으며 일침을 날렸다.



“어디 그것도 정보력으로 한번 알아내 보시지요. 충분히 가능하실 것 같은데.”



얌전해 보이는 아네트에게 뜻밖의 반격을 당한 라일린의 눈이 커졌다. 언제나 문신처럼 미소를 내걸고 있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네트는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라일린은 유쾌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거 완전히 당했군요!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대비해 놓지요. 소소하지만 고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사죄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모처럼 라일린이 퇴폐적이지도, 의미심장하지도 않게 웃었다. 꼭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였다. 묘하게 기뻐 보이는 그 얼굴에 아네트는 떨떠름해졌다. 반격의 효과가 너무 미미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보를 알아보시는 대로 연락 주세요. 잘 부탁드려요.”



비록 한번 쏘아주긴 했지만, 라일린과의 거래는 오래 유지될수록 이득이었다. 정체를 들킨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네트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한 아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본 라일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볼수록 마음에 든다니까.’



최근 라일린은 그녀에게 점점 더 큰 ‘개인적인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물론 아네트에게 이성으로서 흥미를 느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네트는 뭐랄까, 대단히 까탈스러운 수집가의 눈에 띄어버린 보물 같은 느낌이었다.



뒷세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라일린은 취향과 안목이 몹시 고급스러웠다. 어쩌면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만큼이나 눈이 높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런 라일린의 까다로운 취향을 완벽히 만족시키는 대상은 거의 없었다. 단, 델티움 최고의 명문가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아온 아네트를 제외하면 말이다.



‘보고만 있어도 흡족하단 말이지.’



라일린의 붉은 눈동자가 티 나지 않게 아네트의 앉은 자세를 훑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우아한 목과 허리의 각도, 그 위로 살며시 정돈된 드레스의 풍성한 자락까지.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귀족적인 자태였다. 여기에 베일 달린 모자를 벗을 때 드러난 그 얼굴이란. 라일린은 난생처음으로 사람을 박제해서 이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아마 저희의 정보력에 만족하시게 될 겁니다.”



새카만 흑심을 감춘 라일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아네트를 배웅했다.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라일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찔한 눈웃음을 치며 아네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모처럼 귀빈과 안면을 트는 영광을 누렸으니 작은 호의나마 제공해 드리고 싶군요. 이곳을 떠날 때, 가급적이면 뒷문을 이용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꽤 성가신 일을 겪게 되실 테니까요.”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운 라일린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