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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라펠은 이상하게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를 본 순간,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자신의 질문에 과연 아네트가 뭐라고 대답할지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아네트는 의외로 그 질문을 대수롭게 여기진 않았다.



‘아마 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냐고 묻는 거겠지?’



물론이었다. 라펠은 전생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병상을 지켜주었다. 그녀가 병 때문에 약해지고, 추한 몰골로 죽어갔어도 싫은 티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 남자는 세상에 흔치 않았다. 이를 떠올린 아네트가 미소와 함께 온화하게 답했다.



“네. 이건 왕실에 대한 불경이겠지만, 전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다 당신과 결혼한 게 훨씬 좋은걸요.”



참으로 이상했다. 낯부끄러운 소리를 한 아네트는 태연한데, 이를 듣는 라펠의 얼굴이 오히려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여자 앞에서 얼굴을 붉혀본 건 처음인지라 당혹스러웠다.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다 자신과 결혼하는 게 더 좋다니, 입에 발린 말이라도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라펠은 고작 왕의 사생아였다. 그리고 델티움 사교계는 혈통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라펠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종종 타 귀족들에게 조롱을 받곤 했었다. 그에 비해 라펠의 배다른 형제인 루드비히는 무려 하나뿐인 고귀한 왕세자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라펠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강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유독 자신과 결혼한 아네트에게 매몰차게 군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딴 경쟁자를 끌어내릴 만큼 필사적으로 왕세자를 노렸던 여자라면 애당초 이 혼사가 눈에도 차지 않을 터였다. 정말로 원했던 보물 대신에 할 수 없이 갖게 된 고물이라니! 여자에게 그런 취급을 받기엔 라펠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러니 아네트에게 내쳐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내칠 작정이었다. 결혼 초 라펠의 쌀쌀맞은 태도는 이러한 심리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근데도 왕세자보단 나와 결혼하는 게 더…… 좋다고?’



스스로도 얄팍한 걸 알지만, 라펠에겐 더없이 효과적인 말이었다. 라펠은 애써 위로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잡으려 애쓰며 등을 휙 돌렸다. 어두운 복도에서도 혹 자신의 붉어진 얼굴이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이를 모르는 아네트는 그저 라펠이 이제 자러 가나보다, 싶었다. 모처럼 로베르트의 무덤에도 다녀왔으니 부디 라펠이 편하게 잠들었으면 했다. 아네트는 진심을 담아 라펠의 등 뒤에 대고 다정하게 밤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라펠.”



“……그, 아네트.”



아네트가 막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별안간 라펠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언제나 경청할 자세가 되어있는 아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펠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애꿎은 바닥을 쏘아보며 힘겹게 입을 떼었다.



“가끔…… 그대의 침실에 가도 될까?”



뜻밖의 질문에 아네트는 참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라펠의 단점 중 하나는 문을 쾅쾅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네트의 허락을 구하긴커녕 노크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복도에 우뚝 선 채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노려보는 라펠의 얼굴은 진심 같았다.



‘저러니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네.’



‘저’ 라펠이 귀여워 보이다니. 회귀 전엔 그렇게나 무섭고 싫은 남자였는데. 아네트는 신기한 기분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침묵을 거절로 착각한 건지, 라펠이 아까보다 좀 더 초조한 말투로 덧붙였다.



“내가 잠을 잘 못 잔다는 거…… 알잖나.”



그 말에 아네트는 괜히 제 발이 저렸다. 자신과 있으면 잠이 잘 온단 말 같은데, 혹시 라펠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챈 건 아닐까?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회귀에 대해 들키고 싶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숨긴 아네트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저와 함께 잠들면 좀 나은가요?”



“훨씬.”



단호한 말투로 대꾸한 라펠이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길고 아름다운 눈매 안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어쩐지 그의 곧은 시선과 마주치자, 아네트는 부끄러움에 뺨이 살짝 상기되었다. 라펠의 시선은 꼭 그녀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게 잠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아네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 어떻단 말인가. 드디어 그녀의 승낙을 얻어 낸 라펠이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처음으로 라펠이 ‘고맙다’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이를 듣는 순간, 아네트는 정말로 모든 게 전과는 달라졌음을 체감했다. 서로의 침실을 향해 등을 돌린 두 남녀의 사이로 긍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밤은 모처럼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듯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아네트는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는 어김없이 잘난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반듯한 이마에 날카로운 콧날, 붉은 입술을 가진 남자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목의 울대와 넓은 어깨, 근육질의 상체는 야성적이기까지 한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네트는 반쯤 잠에 취한 채 비현실적인 라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뿌연 머릿속으로 간밤의 일이 얼핏 떠올랐다.



‘아아, 어젯밤도 여기서 잤었지.’



라펠은 근사하게 포장하자면 꼭 숙련된 암살자 같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밤도둑 같았다. 그는 잠이 안 올 때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아네트의 침실로 숨어들어 왔다. 불행히도 아네트는 빨리 자는 편이었기에 그가 언제 숨어들어왔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그녀는 아침마다 라펠을 발견하고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러나 간밤처럼 라펠이 온 걸 미리 알아차릴 때도 있었다. 그의 몽유병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아네트는 그럴 때마다 잠에서 깨어 라펠의 손을 이끌고 침대로 데려왔다. 그리고 능력을 써서 그를 잠재웠다. 덕분에 그녀의 자장가 실력은 날이 다르게 늘고 있었다.



아네트는 나오려는 하품을 참으며 조심조심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든 라펠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젯밤은 몽유병 증세가 나와서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 라펠은 그럭저럭 잘 잔 모양이었다. 그의 눈 밑도 그늘지지 않았고, 안색도 좋아 보였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그의 모습은 꼭 전쟁의 신처럼 아름답고 강인했다.



‘좀 더 자게 놔두자.’



아네트는 좀처럼 편히 잠들지 못하는 라펠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그가 최대한 오래 잘 수 있게끔 배려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라펠이 깨지 않게끔 아주 살금살금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나가려니 뭔가 좀 마음에 걸렸다.



‘저대로 자다가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라펠은 밤에 잘 때 상반신을 벗고 자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의 탄탄한 상반신은 이불 위로 반쯤 드러나 있었다. 물론 눈에는 아주 보기 좋았으나, 라펠의 건강에는 별로 안 좋을 것 같았다.



고민하던 아네트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 그의 목 위까지 덮어주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도 꼼꼼히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다. 그러자 기척에 예민한 라펠이 미간을 살풋 찡그리며 깨어날 기미를 보였다. 당황한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꼭 아이라도 달래듯이.



“자자, 코 자요.”



일단 내뱉고 나자 아네트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코 자요.’라니. 만약 라펠이 깨어나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본다면 얼마나 창피할까.



다행히 라펠은 깨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아네트는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뒤꿈치를 든 그녀는 최선을 다해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왔다. 부디 라펠이 깊이 잠들 수 있길 바라면서.



찰칵―



불행히도 아네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라펠의 날카로운 청각을 비껴갈 순 없었다. 그는 사실 아네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같이 깨어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잠든 척한 이유는 아네트를 보기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너무 자주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하지 못한 라펠은 내심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괜히 아침에 아네트와 마주쳤다가 그녀에게 눈치라도 받으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평소 같았으면 이런 구질구질한 걱정을 하기 싫어서라도 발걸음을 딱 끊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네트의 침실에서 청하는 잠이 너무 달콤했다. 대체 왜 이곳에선 이리도 잘 잘 수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하긴, 아네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를 쫓아낼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한번 내린 결정을 기분에 따라 번복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라펠은 아까 전 아네트가 보였던 행동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코 자자, 라니.’



늘 차분하고 영리해 보이던 아네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라펠은 사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을 때 긴장했다. 만약 자신을 깨워서 당장 나가라고 한다면, 내면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그게 자존심이 될지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네트는 뜻밖에도 자신에게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고, 어깨를 토닥여 왔다. 그 작고 가벼운 손의 감촉은 어깨가 아니라 그의 심장 위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라펠은 어쩐지 심장이 죄여 오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라 미간을 찡그리며 애꿎은 가슴 위를 문질렀다.



‘어쨌든 이런 것도 나쁘진 않군.’



아마 이런 게 결혼 생활이란 거겠지. 라펠은 속으로 생각하며 꼭 늘어지게 한숨 자고 일어난 사자처럼 만족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를 뻗을 때마다 느껴지는 몸의 활력이 기분 좋았다. 고작 며칠간 잠을 잘 잤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아침이 달라질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니 아네트의 침실에 숨어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라펠은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을 확신했다. 이따 검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네트와 저녁을 같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름지기 부부란 그런 것이니까.









“뭐? 아네트가 외출했다고?”



불행히도 라펠의 좋은 기분은 반나절밖에 가지 못했다. 검술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라펠은 심기가 급격히 불편해졌다.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리며 되묻는 라펠의 말에 하녀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