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네트는 침묵했다. 눈앞에선 다이애나가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네트가 한때 유력한 왕세자비 후보였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는 척 셀레스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순전히 악의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확실히 회귀 전이었다면 상처받았을지도.’
아네트는 눈앞의 다이애나를 보며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한때 자신의 소꿉친구였는데, 지금은 셀레스틴의 절친이라니. 사람의 인연이란 게 정말 아이러니했다.
다행히 지금의 아네트는 태연하게 이를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래 봐야 5년 전 일이라 이제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누명의 배후로 의심되는 셀레스틴이 눈앞에 있는 것만 아니라면, 이쯤은 충분히 웃어넘길 만했다. 그래서 아네트는 방긋 웃으며 이를 맞받아쳤다.
“어머, 정말요? 굉장하네요. 혹시 셀레스틴 양이 하사받은 패물 중에 블루 다이아몬드 티아라도 있나요? 한 번쯤 꼭 실제로 보고 싶은 귀물인데요. 그녀가 책봉식에 사용했으면 좋겠네요.”
“그, 글쎄요.”
아네트는 정말로 순수하게 티아라의 실물이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덕분에 다이애나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 하는 떨떠름함이 떠올랐다. 여기에 아네트는 한술 더 떠 다정하게 라펠의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애교 있게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 나 아무래도 블루 다이아몬드가 갖고 싶은 것 같아요.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나에게 잘 어울릴까요?”
라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때문에 아네트의 등에서 내심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까지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기울였던지라 자신의 편이 되어줄 줄 알았는데. 혼자 너무 앞서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다이애나 앞에서 면박이라도 당한다면 슬플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라펠이 팔을 빼며 아네트가 낀 팔짱을 풀어냈다. 역시나 이런 골치 아픈 신경전에 낄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라펠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블루 다이아몬드라…….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 그대만 행복하다면 금고를 텅텅 비워도 좋아.”
낮고 그윽한 그 목소리에 다이애나가 ‘어머.’ 하는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입을 막았다. 항상 푸르스름하게 날이 서 있던 남자가 제 아내 앞에서 다정해지는 모습은 낯설고도 퍽 근사했다. 하지만 라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아네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라펠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엔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을 것 같군. 당신의 예쁜 눈동자엔 그편이 더 잘 어울려.”
말을 마친 라펠이 미소를 지으며 아네트의 눈꺼풀 옆에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그야말로 보는 사람의 눈이 녹아내릴 듯한 자상한 모습이었다. 라펠의 적극적인 협조 덕에 아네트는 용기가 생겼다.
“고마워요, 라펠. 역시 당신과 결혼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태어나서 선택권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여자가 꽃처럼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거짓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애나 맥클레어만은 이를 몰랐다. 셀레스틴의 절친으로서 아네트를 조금 긁을 작정이었던 그녀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 되었다.
“그럼, 맥클레어 영애.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저희는 이만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라펠의 허리를 끌어안은 아네트가 웃는 얼굴로 아직 약혼자도 없는 다이애나의 처지를 푹 찔렀다. 다이애나는 아주 잘 반하는 체질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녀가 반한 상대방들은 딱히 그녀에게 호응해주지 않았다. 덕분에 다이애나는 그 흔한 염문설 한번 못 뿌려본 입장이었다. 아픈 곳을 찔린 다이애나가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괜찮지요! 이 주변이 다 저희 가문에서 관리하는 상권인걸요. 요즘 철제 도구들이 얼마나 유행하는지 아시나요? 덕분에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오늘도 밤늦게까지 일하다 나오는 길이랍니다!!”
“어머, 그러시군요. 그거 정말 부럽네요.”
델티움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을 친정으로 둔 아네트가 여유롭게 웃었다. 이에 다이애나가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고 파르르 떨었다. 여기에 라펠마저 가세해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사받은 것 중 철광석 광산도 있었지. 어쩐지 요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이 쏠쏠하다 했어. 아네트,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명의로 돌려주지. 파란색이든, 분홍색이든 그대가 원하는 다이아몬드는 전부 사들이도록 해.”
기가 막혀, 정말! 다이애나는 입을 떡 벌렸다. 요즘 철광석은 말 그대로 채굴 족족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귀족 중에선 철광석 광산이나 채굴권을 가진 자들이 요즘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근데 그걸 통째로 아네트에게 주겠다고? 다이애나는 이 순간, 진심으로 굴욕과 질투를 느꼈다.
본래 철은 무쇠에서 탄소를 제거하기가 어려워 잘 쓰이지 않았던 재료였다. 근데 최근에 새로운 방법이 발견되면서 일상에 철기가 어마어마하게 보급되었다. 아네트가 술집에서 본 철제 식기들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것이었다.
‘철이 돈이 된다라……. 신기하네.’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감탄했다. 그리고 라펠의 철광석 광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그의 철광석 광산이 탐나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네트는 다만, 자신의 부친이 노리는 게 어쩌면 라펠의 철광석 광산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라펠은 생각에 빠진 아네트를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고 그녀의 작은 머리통 위에 키스했다. 그리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다이애나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럼 레이디 맥클레어. 내 부인이 슬슬 피곤해할 시간이라, 이만 실례하지.”
다이애나는 굴욕감을 느끼며 돌아서는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고 마차로 향하는 그들은 꼭 그림처럼 보기 좋은 커플이었다. 특히나 체격이 건장한 라펠이 가냘픈 아네트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괜히 보는 사람마저 얼굴을 붉힐 만큼 설레는 구석이 있었다.
‘두고 보자, 나도 올해는 꼭 연애할 거야!’
속으로 굳게 결심한 다이애나는 휙 몸을 돌렸다. 오늘 이 순간부터 가문에서 하는 철기 사업이 잘 되어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을 듯하여 눈물이 났다. 철기가 잘 팔리면 라펠의 철광석 광산도 수익이 쏠쏠할 것이고, 그는 그 돈으로 아네트에게 다이아몬드를 잔뜩 사 안기겠지.
다이애나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속으로 피눈물이 났다. 까짓것 아네트가 왕세자비가 못 된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렇게 섹시하고 다정한 남편이 있는데! 그녀는 이 순간 왕실에서 패물을 받은 셀레스틴보다, 남편과 다정하게 끌어안고 걷는 아네트가 열 배는 더 부러웠다.
한편, 다이애나를 따돌리고 마차에 탄 아네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그…… 정말 고마워요, 라펠. 내 편이 되어줘서요.”
아네트가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네자, 라펠은 괜히 멋쩍어졌다. 그는 사실 다이애나가 여우 짓 하는 게 꼴 보기 싫어 시작한 일이었다. 뻔히 남편이 옆에 있는 걸 알면서도 아네트에게 ‘딴 남자와 결혼하지 못해 아쉽지?’ 하고 약 올리는 꼴이라니. 그래서 아네트가 자신과 결혼한 게 그리 아쉬워할 일은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라펠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자연히 솔직함과는 담쌓은 인간이었다. 이 때문에 라펠은 아네트의 감사 인사에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마우면 그 손이나 빨리 나아.”
어쩌다 아네트의 손이 저리된 건지 기억은 없었지만, 아마 십중팔구 자신의 탓일 터였다. 라펠은 그녀의 붕대 감긴 손가락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자신의 손이 저렇게 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빨리 나을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아네트가 속도 없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으며 화답했다. 중간에 좀 삐걱대긴 했지만, 라펠과의 첫 외출은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전생엔 몰랐던 로베르트의 묘지에도 가 보았고, 라펠과 단둘이 외식을 하며 술도 마셨다. 다이애나의 존재는 좀 싫긴 했지만, 라펠이 도와준 덕에 통쾌하게 갚아 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이애나 양은… 내 누명에 대해 모르는 기색이었지.’
아네트는 자신을 바라보던 다이애나의 표정이나 말투를 되새겨 보았다. 만약 그녀가 아네트의 누명에 대해 알았다면 그것을 당장 입에 올렸을 터였다. 다이애나가 셀레스틴의 절친이라서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바이에른 가의 ‘입막음’은 완벽했다. 아네트는 비록 자신의 가문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럴 땐 참 편하다고 느꼈다.
아네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마차는 조용히 집을 향해 달렸다. 잠깐 들른 마을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지라, 곧 자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라펠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라펠. 같이 외출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라펠은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트는 사실 라펠의 저런 무뚝뚝한 반응이 훨씬 더 익숙했다. 그녀가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던 그 순간, 뒤에서 라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네트.”
“네?”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복도에 우뚝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라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 아래에서 훈련해도 잘 그을리지 않는 라펠의 흰 얼굴은 꼭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반듯했다. 유독 붉은 그의 입술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아네트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던져왔다.
“그 말…… 진심이었나?”
“어떤 말이요?”
“그, 후회하지 않는다는…….”
라펠은 차마 ‘나와 결혼한 게 최고의 선택이냐’고는 묻지 못하고, 애매하게 빙 돌려 물었다. 설마하니 라펠이 그런 걸 물어볼 줄 몰랐던 아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