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라펠은 사실 아네트가 고른 레스토랑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아네트가 평소 가던 레스토랑과 그리 다르지 않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의 식당을 고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라펠의 예상은 와장창 깨졌다.
“세상에나, 라펠! 저 돼지 좀 봐요. 진짜 커요!”
그랬다. 아네트는 야외 레스토랑을 골랐고, 지금 그들의 눈앞에선 쇠꼬챙이에 꿰인 돼지 통구이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지고 있었다. 벌어진 돼지 입에 물린 사과까지 반질반질하니 완벽했다. 손바닥만큼 잘려 완벽하게 구워진 고기만 먹을 줄 알았던 아네트는 뜻밖에도 돼지 통구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진짜 맛있는 냄새가 나요. 블랙 페퍼, 바질, 커민…… 그리고 또 뭘 넣었을까요? 세상에, 저 윤기 흐르는 것 좀 봐요.”
예쁜 귀족 아가씨가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주방장은 신이 났다. 처음엔 두 남녀의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눈부신 외모 때문에 혹 트집을 잡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외로 조용했고, 무엇보다 가장 비싼 메뉴인 통돼지 구이를 주문해 주었다! 이런 귀빈들을 위해선 기꺼이 없던 서비스까지 박박 긁어낼 수 있었다.
“보십시오, 돼지가 아주 잘 구워졌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제가 특별히 드시기 좋게 잘라 드리겠습니다.”
주방장이 양손에 무시무시한 톱칼과 뼈칼을 들고서 근엄하게 돼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큰 모션과 칼날의 큰 궤적, 무엇보다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부릅뜬 표정까지! 누가 봐도 실용성보단 쇼맨십을 위주로 한 모양새였다. 특히 검사인 라펠이 보기엔 더욱 과장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 정말 대단해요. 태어나서 이런 건 처음 봐요!”
그러나 아네트는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그러다 오른손에 감은 붕대를 깜박하고 잠시 아파하는 허당 같은 면모까지 보였다. 라펠은 장담컨대 늘 우아한 아네트가 이렇듯 흥분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어찌나 들떴는지 아네트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눈은 꼭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아네트. 이리 와 제대로 앉아.”
라펠은 다 큰 성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아네트 바이에른처럼 갓난아이 때부터 우아했을 것 같은 여자라면 더더욱. 하지만 아네트가 처음 보는 구경에 너무 들뜬 나머지 실수라도 할까 봐 신경 쓰였다.
라펠은 그녀가 무심코 다친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려 들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잡아 지탱해 주었다. 내친김에 그녀의 최고급 드레스 위로 흘러내린 냅킨도 다시 꽂아 주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원.
“자아, 한번 드셔 보시지요! 저희 레스토랑 최고의 역작이랍니다!!”
드디어 통구이 해체를 마친 주방장이 땀을 닦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친절하게도 먹기 좋게끔 접시에 부위별로 덜어주었다. 신기하게도 이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조리 도구 및 식기는 전부 철로 되어있었는데, 덕분에 서민 식당이라는 점이 더 실감 났다.
새로운 경험은 아네트의 마음과 식욕을 모두 들뜨게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 구이에선 정말로 근사한 냄새가 풍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이 생긴 아네트는 씩씩하게 포크를 집어 들었다.
“기다려, 아네트.”
인상을 찌푸린 라펠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만류했다. 녹진하게 익은 돼지 껍데기가 입안에 들러붙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을 터였다. 여기에 주방장이 제 딴엔 신경 써서 잘라 준 거라고 해도, 살코기가 제법 큰 편이었다. 라펠은 붕대 감긴 아네트의 오른손을 흘끗 흘겨보았다. 저 부상의 원인이 자신으로 추정되지만 않았어도 이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라펠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나이프를 들어 아네트의 고기를 잘게 썰어주었다. 남들이 하는 걸 봤을 땐 여자에게 잘 보이려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설마 자신이 이러고 있을 줄이야. 나이프를 평소보다 쌀쌀맞게 내려놓은 라펠이 접시를 도로 밀어주었다.
“이제 됐어. 식혀가면서 먹어.”
“고마워요.”
아네트는 기대감에 차 포크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결과는…… 기대를 뛰어넘었다! 매콤한 소스가 발린 돼지고기 껍질은 바삭하게 씹혔다. 그 밑의 두툼한 살코기는 입안에서 짭짤한 육즙을 내뿜으며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야외의 시원한 바람을 쐬며 먹어서 그런지 더욱 기가 막힌 맛이었다.
“진짜 맛있네요…….”
아네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감동했다.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던 라펠이 픽 웃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처음으로 악의 없이 웃자,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내친김에 그에게도 고기를 권했다.
“먹어봐요, 라펠. 어서요.”
허공을 가르는 아네트의 포크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툼한 붕대 사이에 억지로 쥔 포크는 위태위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본 라펠이 고개를 저으며 고기를 더 잘게 잘라주었다. 이쯤 되면 거의 살코기를 으깨는 수준이었다.
해체를 끝마친 라펠이 손을 뻗어 그녀에게서 포크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고기를 날름 삼킨 후, 아네트의 손에 스푼을 대신 쥐여 주었다.
“그냥 스푼으로 먹어. 어차피 격식 따지는 레스토랑도 아니니,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스푼을 받아 든 아네트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혹독한 예절 교육들을 받아 왔다. 당연히 그 안에는 식사 예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근데 으깬 고기를 스푼으로 떠먹으라니. 원래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탈이었다.
‘하지만…… 안될 것 없잖아?’
새로 태어난 아네트의 내면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아네트는 잠시 스푼을 바라보다, 그걸로 으깬 고기를 듬뿍 떠 입안에 밀어 넣었다. 라펠이 잘게 썰어준 고기는 여전히 맛있었고, 향긋했으며, 아까보다 한결 더 씹기 편했다. 아네트는 입안에 가득 찬 기름지고도 짭짤한 맛에 황홀해졌다.
“이것도 같이 마셔 봐. 맛이 나쁘지 않더군.”
라펠이 홀짝거리던 잔을 들어 아네트에게 밀어주었다. 화이트 와인에 레몬과 사과를 넣은, 새콤달콤한 술이었다. 한 모금 들이키자 입안에 감도는 상큼한 맛이 고기의 짜고 기름진 뒷맛을 씻어주었다. 강가 근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밤바람도 기분 좋았다. 한 마디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밤이었다.
무엇보다 아네트를 기쁘게 한 건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얼굴이었다. 따뜻한 불빛을 받은 그의 수려한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전생에선 아네트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나 간신히 본 얼굴이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깐 꼭 친근해진 느낌이네.’
고기를 썰어줘서 그런지 아까의 서운함도 그럭저럭 잊혀졌다. 어차피 자신이 떠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인데, 굳이 인상 쓸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라펠과 작별하기 전, 한 번쯤 웃으면서 떠올릴 법한 추억을 만든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아네트는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외모와 달리 술이 꽤 센 편이었다. 덕분에 세잔이나 연거푸 마시고도 꽤 멀쩡하게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아까보다 한결 표정이 풀어진 라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보니 완전히 주당이었군. 거기서 더 마시면 당신 혈관에 피 대신 와인이 흐를 뻔했어.”
“아직 한두 잔은 더 마실 수 있는걸요. 레스토랑이 생각보다 문을 일찍 닫아 아쉽네요.”
마차로 돌아가는 길에 아네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평소 술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주량이 약하진 않았다. 저렇게 새콤달콤 맛있는 술이라면 얼마든지 더 먹고 싶었다. 그녀의 호언장담을 듣던 라펠이 결국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생소한 모습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아네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더는 안 돼. 귀부인 체면에 등에 업혀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늘 날카로웠던 라펠의 눈매가 해사하게 휘어지고, 그늘진 속눈썹 밑으로 푸른 눈이 빛났다. 아네트는 괜히 들뜬 기분에 마주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마차가 가까워지는 게 아쉬울 만큼 기분 좋은 밤이었다. 이제 마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아갈 터였다.
“어머, 혹시…… 레이디 아네트?”
이때,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해 왔다. 라펠을 보며 웃던 아네트는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서 기분 좋은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는 얼굴이었다.
“다이애나 양. 뜻밖의 만남이네요.”
검은 곱슬머리를 한 여인의 이름은 다이애나 맥클레어였다. 다방면에 걸친 사업으로 유명한 맥클레어 백작가의 둘째 딸인 다이애나는 한때 아네트의 소꿉친구였다. 물론 유년 시절 이후론 교류가 없었지만, 어릴 적 친구는 늘 기억에 남는 법이었다. 덕분에 아네트는 5년이나 지난 후에도 다이애나의 이름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위험하게 여긴 어쩐 일로…… 아! 부군과 함께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카네시스 후작 각하? 저는 맥클레어 백작가의 다이애나라고 합니다.”
다이애나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라펠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법 천연덕스러운 인사였지만, 라펠을 곁눈질하는 그녀의 뺨은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건장한 라펠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여기에 얼굴까지 잘났으니, 그 난폭하고 오만한 성정까지도 이쯤 되면 매력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네트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다이애나가 너무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남편을 바라보는 다이애나의 얼굴엔 ‘멋있어!’라는 감탄이 아로새겨져 있는 듯했다.
뭐, 사실 그것까진 괜찮았다. 다이애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것뿐이지, 상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비록 임자가 있는 남자에게 반한다 해도 결코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아네트가 다이애나의 뺨에 떠오른 홍조를 못 본 체해줄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또 다른 문제는 도무지 못 본 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문제라고 할 것도 없지만, 적어도 아네트에겐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다이애나 맥클레어는…….
“아참, 그러고 보니 레이디 아네트. 아니, 이제는 카네시스 후작 부인이시죠! 혹시 그 얘기 들으셨나요? 제 친우인 셀레스틴이 글쎄, 왕가로부터 결혼식에 쓸 패물들을 두 상자나 받았대요! 역시 왕세자비가 된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인가 봐요! 안 그런가요?”
그랬다. 다이애나 맥클레어는 하필 셀레스틴 키어스의 절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