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라펠은 턱을 괴고 아네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라펠에게 여러 번 혹사당한 그녀는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수면 문제가 있는 라펠과 달리, 아네트는 의외로 머리만 대면 잘 자는 타입이었다.
손을 뻗은 라펠은 잠든 아네트의 이마와 목덜미를 매만져 습관처럼 열을 재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까진 확인해 보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드러난 손목을 볼 때 딱히 덧난 것 같진 않았다.
라펠은 병석에서 갓 일어난 아네트를 너무 혹사시킨 듯하여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저 작고 약해빠진 여자를 그토록 거칠게 안다니, 다음부턴 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울어서 약간 짓무른 아네트의 눈가가 그의 가슴을 기묘한 방식으로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꼭 작은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라펠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네트를 천천히 훑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다소곳이 모으고 잠든 아네트의 자세는 쓸데없이 반듯했다. 그마저도 어쩐지 아네트의 모범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듯하여, 라펠은 성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네트를 보며 웃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빌어먹을.”
실컷 저 여자를 붙들고서 원하는 만큼 싸질렀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야 정상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형식적인 부부 관계였고, 이 또한 아무 감정 없는 섹스에 불과했으니까. 근데 자신은 왜 미친놈처럼 혼절한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가.
라펠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눈이 쓰라려 올 때까지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나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아네트의 얼굴은 여전히 욕이 나올 만큼 예뻤다. 뺨에 약간 남아 있는 눈물 자국도, 깨물어서 부은 입술도, 이마와 뺨에 흐트러진 금발도 뭐 하나 미운 것 없이 예쁘기 그지없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라펠은 혼란스러웠다. 진심으로 그랬다. 지금도 아네트의 부친인 알라만드 바이에른이 했던 모욕적인 언행들을 떠올리면 이가 득득 갈렸다. 지독한 혈통 우월주의인 바이에른 공작가와 사생아 출신인 라펠은 말 그대로 최악의 상성이었다.
근데도 왜 자신은 그 빌어먹을 알라만드 바이에른의 딸이 저리도 예뻐 보이는 것인가. 깊은 자괴감을 느낀 라펠은 제 이마를 침대 시트에 문지르면서 괴로워했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라펠?”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아네트가 졸음 가득한 눈으로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주제에, 힘겹게 라펠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더듬더듬 라펠의 맨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를 뜬금없이 다독여 왔다.
“괜찮아요, 라펠. 당신은 이제 안전해요.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내가…… 지켜 줄게요.”
정사에 시달려서 잔뜩 쉰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한 말들을 내뱉었다. 라펠은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며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몽사몽 한 상태의 아네트는 미처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졸려서 띄엄띄엄 끊어지는 목소리로 라펠을 마저 다독였다.
“당신은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괴로워하지 말아요. 전쟁은 다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안심하고 이제…….”
점점 늘어지던 아네트의 목소리가 결국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라펠의 어깨를 간신히 토닥이던 작은 손도 결국 시트 위로 스르르 미끄러졌다.
라펠은 미동도 없이 도로 잠든 아네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엔 아네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의아했지만, 이윽고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거지 같은 정신병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를 악문 라펠의 눈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짐작 가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잠들었던 아네트, 그리고 그녀의 침실에서 깨어난 자신.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바보였다. 다만 자신의 약점을 들키기 싫어하는 라펠의 자존심이 애써 눈을 감고서 안 들켰을 거라고 자위했을 뿐이었다.
“하…….”
눈을 가린 라펠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남들에게 들통날까 봐 그토록 벌벌 떨었던 약점이 하필이면 아네트 바이에른에게 들켰다. 그 빌어먹을 바이에른 가의 딸에게. 거기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아네트는 이런 자신을 동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참으로 엿 같은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눈앞이 벌게져서 길길이 날뛰어도 부족할 판국인데, 생각보다 기분이 그리 더럽지 않았다. 옆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아네트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서 자신의 비밀을 영영 묻어둬야겠단 충동도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펠은 그래서 더 절망스러웠다.
눈을 가렸던 팔을 치운 라펠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침실을 떠났다. 지금 당장은 머리가 복잡해서 아네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아네트 바이에른이란 작은 전리품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 작은 손아귀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고뇌에 빠진 남자의 그림자가 복도에 길게 드리워졌다. 오늘 밤도 잠을 쉬이 이루긴 어려울 것 같았다.
두 번째 삶에도 어김없이 아침 해는 떴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 아네트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몸단장을 한 뒤, 햇볕이 잘 드는 응접실 소파에서 책이나 읽을 요량이었다. 그나마 다친 손으로 할 수 있는 취미는 그것뿐이었다.
이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네트는 머리를 빗겨 주러 온 하녀겠거니 했다. 별생각 없이 들어오라고 답하자, 누가 봐도 하녀는 아닌 남자가 불쑥 들이닥쳤다. 라펠이었다.
“오늘 바쁜가?”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선 라펠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자세가 꼭 시장 건달들처럼 불량해 보였지만,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비열함을 상쇄시켜 주었다. 어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오늘 갑자기 나타나서 왜 저런 걸 묻는담? 의아해진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일 없어요. 왜 그래요?”
“잘 됐군. 괜찮다면 나와 외출 좀 하지.”
라펠은 목적지가 어딘지도 밝히지 않고 불쑥 통보부터 했다. 이에 놀란 아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도 했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약간 변명조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 여기서 별로 멀진 않아.”
잠시 라펠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네트가 이윽고 말갛게 웃었다.
“그래요. 지금 준비할게요.”
물론 라펠 때문에 골절당한 손가락이긴 했지만, 앓아누운 동안 그의 신세를 진 건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외출하자는 요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라펠과 동반외출한 적이 드문 터라, 기대가 되기까지 했다. 자연히 아네트의 미소가 한층 더 환해졌다.
저, 저 요망한 웃음. 라펠은 저도 모르게 눈부신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네트가 웃을 때마다 이상하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빛이 날 리는 없으니, 순전 자신의 착각일 터였다.
어쨌든 이를 견디지 못한 라펠은 뒷걸음질 쳐 달아났다. 어차피 아네트가 준비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자신도 심장을 좀 준비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 * *
“그만 좀 일어나지?”
머리 위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아네트는 눈을 떴다. 마차가 멈춰있는 걸 보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이 그새 라펠의 어깨에 기대어 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밀어내지 않고 기대게 해 준 걸 보니, 역시 라펠의 본성은 그리 모질지만은 않았다.
아직 낮인데도 밖이 어둑어둑했다. 이 때문에 약간 그림자가 진 라펠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위험하고 퇴폐적으로 보였다. 머리까지 검어서 그런지, 그는 꼭 아네트의 영혼을 훔치러 온 악마나 인큐버스처럼 보였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아네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펠, 여기가 어디예요?”
굳이 대답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새하얀 대리석들의 향연이 아네트의 시선을 강탈했다. 여기에 싸하게 올라오는 차가운 음기까지 더해지자,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라펠이 그녀를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공동묘지였다.
귀족들은 대개 가문의 묘지를 별도로 소장하므로, 아네트는 공동묘지가 처음이었다. 귀족의 묘지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생각보다 잘 관리된 곳이었다. 아마 연고 없는 젠트리들을 위한 곳이 아닐까 싶었다.
“음, 묘지에 올 줄 알았으면 검은 드레스를 입을 걸 그랬어요.”
아네트가 조금 멋쩍게 웃었다. 회귀 후 남편과 하는 첫 외출인데, 설마하니 묘지로 올 줄이야. 딱히 로맨틱한 데이트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 또한 예상 밖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연한 푸른색 드레스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괜찮아. 미리 말 안 했는데 어찌 알겠어.”
라펠이 뜻밖에 이성적인 대꾸를 해 왔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위아래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게 좀 얄미웠다. 그를 슬쩍 흘겨본 아네트는 조용한 묘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대체 왜 이곳에 온 건진 알 수 없었다.
“근데 라펠, 이곳엔 어쩐 일로…….”
별생각 없이 묻던 아네트의 눈동자가 문득 떨렸다. 설마…… 올 때는 두 명이었지만, 갈 땐 한 사람만 돌아가려나? 오래된 옛 괴담을 떠올린 아네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한번 죽어 본 그녀의 눈엔 묘지가 괜히 더 불길해 보였다.
어깨를 으쓱한 라펠은 대답 대신 그녀를 어디론가 에스코트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아네트를 이곳에 묻어버릴 작정은 아닌 듯했다. 아네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소 긴장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야.”
라펠이 어느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묘비들에 비해 유독 더 크고 호화로운 묘비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읽던 아네트가 놀란 눈을 했다.
‘이 묘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