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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뜻밖에도 라펠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는 아네트가 깬 걸 확인하더니, 그대로 침실을 나가려 했다. 문턱을 넘으려던 그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손에 들린 반지를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 무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다행히도 라펠은 저 반지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대체 어디서 저걸 발견한 거지?’



아네트는 심장이 다 벌렁벌렁했다. 라펠은 아마 우연찮게 아네트의 방에서 저것을 발견하고 가벼운 손장난을 한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아네트의 심장엔 참으로 해로운 손장난이었다.



라펠이 완전히 침실을 떠나자, 아네트는 힘없이 비틀대는 다리로 일어나 반지를 집어 들었다. 습관처럼 내뻗은 오른손에 웬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네트가 그제야 시큰했던 손의 통증을 떠올렸다.



‘아, 저런. 정말로 골절당했었나 보네.’



아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에 만났던 밀출국 길드의 라일린에게 ‘자수와 번역, 대필을 할 수 있다.’라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손을 이렇게 다쳐서야 면목이 없었다. 만약 후유증이라도 남아서 섬세한 작업이 어려워지면 곤란했다.



어차피 밀출국을 하려면 최소 몇 달간은 더 준비해야 했다. 아네트는 부디 그 전에 자신의 손가락이 완치되길 바라며, 멀쩡한 왼손으로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예 자신의 보석함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어 꼭꼭 숨겨버렸다.



이때, 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아네트는 얼른 보석함을 집어넣고 대꾸했다.



“누, 누구죠?”



“마님, 엘리입니다. 일어나셨다고 들어서…… 시중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밖에서 조심스러운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네트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상당히 찝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하루 이상은 앓았던 것 같았다.



다행히 아네트의 몸 상태를 확인한 카네시스 가의 메이드들은 곧바로 목욕 준비를 시작해 주었다. 그녀들은 아네트가 목욕 도중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게끔 간단한 식사를 권했다. 어차피 목욕물이 데워지려면 좀 기다려야 했으므로,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묽은 수프와 과일 주스를 받아먹었다.



“내가 얼마나 아팠었지?”



“이틀하고도 반입니다, 마님.”



“저런.”



예상보다 오래 누워있었다. 전생에도 병상에 드러누워 살다시피 했던 몸이 또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설마 이번 생에도 또 병사하는 건 아닌가 싶어 아네트는 우울해졌다.



기분이 가라앉은 아네트는 말없이 숟가락만 놀렸다. 그때, 메이드들끼리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더니 한 명이 후후 웃었다. 저들이 왜 저러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찰나, 방금 웃은 메이드가 목소리를 낮춰 아네트에게 속삭였다.



“마님께서 아프신 동안, 주인님께서 줄곧 곁에 붙어 간호하셨어요. 이틀도 넘게 꿈쩍도 하지 않고 살뜰하게 간호하시던걸요. 참 좋은 부군이세요.”



수프 그릇을 오가던 아네트의 숟가락이 허공에 딱 멈추었다. 도무지 제 귀를 믿을 수 없어 황망해진 아네트의 얼굴을 어찌 해석한 건지, 메이드들이 입을 가리며 들뜬 기색으로 웃었다. 신혼부부의 사이 좋은 모습은 괜히 젊은 메이드들을 들뜨게 했다.



한편, 머리가 어지러워진 아네트는 먹던 수프도 물린 채 생각에 잠겼다. 눈을 떴을 때 라펠을 발견하긴 했지만, 순전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상태를 보러 잠시 들렀을 때 자신이 눈을 떴겠거니 싶었다. 근데 이틀 반씩이나 그러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대체 왜 그런 걸까?’



아네트는 전생에 라펠이 자신을 간호했던 건 순전히 정 때문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싫어하는 여자일지언정 5년 동안 살을 맞대고 얼굴을 마주했으니, 미운 정이 들 법도 했다. 여기에 라펠은 성격이 거칠지언정 그 본성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으로서의 의리를 지켜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 해 줬을 터였다.



하지만 아네트는 죽은 뒤 회귀했고, 그들은 아직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신혼 초의 라펠은 자신을 맹렬하게 미워했었기에 간호는커녕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딱히 살을 맞대고 들 만한 정도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펠은 기어이 그녀의 병간호를 해 주었다. 심지어 며칠 전 ‘네가 싫다.’라고 직접 말하기까지 한 사람이. 그렇다면 아네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였다.



‘아무래도 라펠은…… 아픈 사람에게 약한 타입인가 봐.’



아네트는 한숨을 내쉬며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메이드들이 그녀의 붕대를 감은 오른손이 물에 닿지 않게끔 신경 써서 목욕 시중을 들어 주었다. 사실 이 골절도, 그로 인한 발열도 다 라펠이 원인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신세를 진 셈 치고 라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의 날이 새파랗게 선 눈을 마주할 생각을 하자, 모처럼 향긋한 물에 목욕을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네트는 붕대를 감지 않은 반대편 손끝이 하얗게 불어날 때까지 물속에서 미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똑똑똑―



문을 두드린 아네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펠, 안에 있어요? 괜찮다면 대화를 좀 하고 싶어요.”



운을 띄운 아네트는 습관처럼 초조하게 양손을 모아 쥐려다 붕대 때문에 멈칫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바닥을 바라보며 라펠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지극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문을 열기 전, 아네트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아네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방 안에서도 라펠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목욕을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하반신에 타올을 두른 채 느른하게 소파에 늘어져 있는 라펠은 한 마리의 커다란 흑표범 같았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데다 속눈썹이 진한 라펠의 눈매는 사나우면서도 아름다웠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네트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뭔가를 탐색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을 건네왔다.



“몰골이 좀 나아졌군. 이제 살만한 모양이지?”



아니나 다를까, 빈정거림을 담은 질문이 대뜸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간호한 걸 이미 아는 아네트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드러누워 있는 라펠의 앞까지 조심스레 다가간 아네트가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아픈 동안 마음을 많이 써 줬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라펠.”



라펠의 성격을 잘 아는 아네트는 적당히 돌려서 말했다. 만약 직접적으로 ‘간호해 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면, 라펠은 제가 한 행동이 들켰다는 생각에 싫어할 확률이 높았다.



아네트는 이제 라펠과의 대화법을 그럭저럭 터득하고 있었다. 비록 시도 때도 없이 뒤틀리는 라펠의 심기를 전부 파악하는 건 어렵겠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아네트는 온화한 얼굴로 전생엔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를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아네트의 감사 인사를 받은 라펠은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아네트의 오른손에 감긴 붕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거슬리는 것 이외에는 아네트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목욕을 끝마치고 식사까지 하고 와서 그런지, 새하얀 얼굴에 제법 생기마저 돌았다.



이를 본 라펠은 또 삐딱한 변덕이 도졌다. 저는 간호를 하며 스스로의 병신 같은 모습에 별별 고뇌를 다 겪었는데, 막상 자신을 고생시킨 장본인은 푹 자서 그런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소파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든 라펠이 짐짓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말로만 고맙다고 할 참인가?”



“네? 그게 무슨…….”



아무것도 모르는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라펠의 낮은 음성에 한층 더 음험한 기색이 서렸다. 그는 숫제 아네트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추궁했다.



“그대의 말대로 내가 신경을 많이 써 줬는데. 고작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때울 작정이냐고.”



당황한 아네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라펠이 또 왜 이러는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한 아네트는 결국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음…… 당신이 원한다면 감사의 선물이라도 할까 하는데요.”



“선물? 뭘 주려고? 이미 지하에 그득하게 쌓인 게 재물인데.”



전쟁의 일등 공신으로 수많은 전리품을 하사받은 라펠이 이를 드러내며 차게 웃었다. 저 얼굴을 보아하니 선물을 바라는 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뿐이었다. 잠시 손끝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아네트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제게 보여준 호의의 보답으로, 저도 당신이 바라는 걸 들어줄게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요.”



아네트는 자신의 친정 때문에 라펠에게 다소 부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여기에 떠날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라펠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만약 라펠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헤어지기 전에 최대한 다 들어주고 싶었다. 이별의 선물로써.



아네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들은 순간, 소파에 엎드려 있던 라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신의 코앞까지 걸어오자, 근육으로 꽉 짜인 남자의 상반신이 위압적으로 다가들었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그 단단한 몸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부딪혔다.



“라, 라펠?”



아네트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느긋하게 아네트를 궁지로 몰아넣은 라펠이 이윽고 벽에 손을 짚어 그녀를 단단히 가두었다. 고개를 숙여 아네트와 눈높이를 맞춘 라펠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내가 대체 뭘 원할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