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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라펠은 침대 옆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앉아 턱을 괴었다. 카네시스 가의 고용인들에게 반쯤 끌려오다시피 한 의원이 손을 떨며 아네트를 진찰했다. 하필이면 전에도 아네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저택을 방문했던 그 의원이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의원은 라펠의 앞에서 뱀 만난 쥐새끼처럼 긴장했다. 흉흉한 라펠의 눈초리 앞에서 움츠러든 의원이 덜덜 떨며 자신의 견해를 읊었다.



“골절로 인한 염증 때문에 발, 발열이 생긴 겁니다. 골절은 다 바로잡았으니, 이제 제가 처방한 염증약을 먹고 푹 쉬시면 금, 금방 나아지실 겁니다.”



부들부들 떨며 처방전을 써 준 의원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으로 라펠을 바라보았다. 이에 라펠은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뭘 봐?”



라펠은 의원이 혹시나 ‘남편이 아내를 때린 모양이군.’ 따위의 생각을 할까 봐 불쾌했다. 물론 이건 라펠의 피해망상에 불과했지만,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네트가 저 작은 손에 쥐는 거라곤 고작해야 수틀과 책이 전부였다. 설마하니 그것들이 손가락뼈를 골절시킬 만큼 위험한 병기일 리 없었다. 심지어 아네트가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멀쩡했단 사실을 감안해 보면, 범인은 십중팔구 자신일 터였다. 몽유병 때문에 켕기는 게 있는 라펠의 눈초리가 더욱 험악해졌다.



그러나 라펠의 생각과 달리, 의원은 그를 의심하여 쳐다본 것이 아니었다. 의원은 라펠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있었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도 기어이 뭔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일종의 소개장이었다.



“이, 이 주변에 상당히 유능한 여성 의원이 있습니다. 보아하니 마님께서 몸이 약하신 듯한데, 이왕이면 같은 여성끼리 서로를 돌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괜, 괜찮으시다면 한번 만나 보시지요.”



의원은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꿋꿋하게 동료를 추천한 뒤, 도망치듯 재빨리 저택을 떠났다. 꽁지 빠지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아하니 두 번 다신 이쪽으로 발걸음하지 않을 듯했다. 동료를 추천한 것도 아마 자신을 대신해서 시달릴 다른 희생양을 밀어 넣은 거겠지.



“뭐, 서로를 돌봐? 별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다 하는군.”



라펠은 미간을 찡그리며 의원이 준 소개장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려다 참았다. 의원의 말마따나 아네트는 작고 약했다. 그렇다면 아예 여자 의원을 카네시스 가의 주치의로 상시 근무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대개의 귀족 가문들은 이미 대를 이어 내려오는 주치의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카네시스 가는 순전히 라펠의 능력으로 새로 얻은 작위였고, 그가 제1대 후작이었다. 저택조차도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새집 냄새가 풀풀 나는 마당에, 주치의가 따로 있을 리 만무했다.



라펠은 혀를 차면서도 결국 소개장을 따로 챙겨 넣었다. 나중에 아네트가 깨어나면 그녀에게 직접 의견을 물을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아네트의 의견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네트의 정신은 혼몽했다. 그녀는 단순히 골절로 인한 염증 때문에 앓아누운 것이 아니었다. 회귀로 인한 정신적 충격과 피로, 라펠과의 신경전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누적되다 끝내 터진 것이었다. 여기에 밀출국을 새로이 결심하면서 이것저것 신경까지 썼으니, 몸이 약한 아네트로선 앓아눕는 게 당연했다.



라펠은 침대 옆 좁은 의자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 아네트가 몸져누운 지 벌써 이틀째였다. 아네트의 침실 안 가구들은 그녀의 체구에 맞춰 아담한 크기라서, 라펠처럼 체격이 좋은 남자가 앉으려면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불편한 자세로 앉은 라펠은 비딱한 눈초리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아네트의 오른손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에 비해 빵빵해진 그녀의 오른손은 꼭 벙어리장갑이라도 낀 것 같았다. 묘하게 그 손이 보기 싫었던 라펠은 이불 속으로 그것을 다시 밀어 넣었다. 손을 뻗어 아네트의 체온을 재 본 라펠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돌팔이 새끼. 금방 낫는다더니.”



의원이 처방해 준 약을 끼니마다 먹여도 아네트의 열은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라펠은 누군가를 병구완해 본 적이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네트를 간호하는 일은 익숙했다. 그는 꼭 많이 해 봤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아네트를 깨워 약을 먹였고, 물수건으로 목덜미와 뺨을 닦아주었다.



지금껏 검만 쥐고 휘두른 그의 손은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간호를 척척 해냈다. 덕분에 아네트의 상태는 제법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라펠은 요 이틀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한 고민을 또다시 떠올렸다. 까짓것 병간호는 이 저택에 흘러넘치는 수많은 메이드들 중 아무나 찍어 시키면 그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아네트에게 매 시간마다 다른 메이드를 붙여 극진한 간호를 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근데 자신은 대체 왜 이 여자의 옆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못하는 것인가. 그것도 몸소 병시중까지 들어가면서.



라펠은 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제 방에 틀어박혀 일부러 술을 마셔보았다. 그러나 만취한 상태로도 결국 되돌아오는 곳은 그녀의 침실이었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지만, 제 눈이 닿지 않는 데에서 아네트가 별안간 숨이 턱 멎어버릴 것 같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저 재수 없는 바이에른 가의 여식이 뭐가 예쁘다고 이러고 있는 건지,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뭐, 예쁜 건 사실인가.’



라펠의 새파란 눈이 곤히 잠든 아네트의 얼굴을 훑었다. 요 이틀간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얼굴인데, 스스로도 자괴감이 들 만큼 예쁘게 보였다. 자신과 결혼하기 전까진 델티움 사교계에서 가장 첫손에 꼽히는 신붓감이었다더니, 그럴 만했다.



그래, 모든 건 아네트의 저 요사한 얼굴 때문이었다. 저 바이에른 가의 여자가 쓸데없이 예쁜 외모를 하고 있어서 자신이 이토록 병신 같은 짓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라펠은 이를 득득 갈면서 괜히 살벌한 눈으로 아네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잠든 와중에도 위기감을 느낀 건지, 아네트가 눈가를 약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응…….”



흰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붉은 그녀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며 움찔거렸다. 제 짜증도 모르고 입까지 벌려 가며 속 편히 자는 아네트의 모습이 얄미웠다. 인상을 찌푸린 라펠은 손을 뻗어서 그녀의 통통한 입술을 괜히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아네트가 입술을 오므리며 그의 검지 끝을 살며시 빨았다. 뭔가 먹는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손가락을 감싸고, 작고 촉촉한 혀가 사탕이라도 빠는 것처럼 둥글게 움직였다. 예민한 손끝에 느껴지는 그 감촉은 환장하리만큼 야하면서도 달큼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라펠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의 손가락을 빠는 아네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맛이라도 다시듯 입술을 연신 오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 예쁜 입술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저 안에 손가락 말고 다른 걸 처넣고 싶었다. 그것도 잔뜩 성이 난 무언가를.



“……!!”



갑자기 하반신이 뻐근해지자, 라펠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황급히 손가락을 잡아 뺐다. 그리고 곧바로 아네트의 침실을 뛰쳐나왔다. 화가 난 것처럼 일그러진 라펠의 입에선 차마 나오지 못한 욕설들이 알아듣지 못할 노성으로 튀어나왔다.



아네트 바이에른, 언젠가 저 요망한 여자가 기어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릴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머리가 멍했다. 꿈속에서 뭔가 맛있는 걸 먹은 것도 같았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밝은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색채 옅은 눈동자를 공격해 왔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서너 번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비로소 시력이 돌아왔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낯익은 방의 풍경이었다. 아네트는 잠이 덜 깨서 몽롱한 기분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력보다 한발 늦게 회복된 청력이 아네트에게 묘한 소리를 전달해 주었다.



딱― 따악―



금속성의 무언가가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아네트는 천근만근인 고개를 들어 가까스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놀랍게도 라펠이 앉아 있었다.



묘하게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한 라펠은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제 덩치보다 한참 작은 크림색 의자에 억지로 끼어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험악한 얼굴인데도 그닥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네트는 멍한 머리로 라펠이 대체 왜 저기에 앉아 있는 건지 고민하며 그를 응시했다.



손에 무언가를 쥔 라펠은 무료한 표정으로 그것을 침대 옆 협탁에 딱딱 부딪히며 이 기묘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눈을 굴려 라펠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아네트가 화들짝 놀랐다.



‘저 반지는……!’



아네트가 밀출국 길드의 책임자, 라일린에게 받은 그 반지였다. 분명 서랍에 넣어놓았던 것 같은데, 저것이 왜 라펠의 손에 들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놀란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기척을 느낀 라펠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일어났군. 잘 됐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라펠이 몸을 휙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