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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아네트의 취미, 그리고 특기의 과반수는 전부 손으로 하는 것들이었다. 만약 정말로 손에 골절을 입은 거라면 곤란해졌다.



‘고작 벽에 좀 부딪힌 것뿐인데.’



퉁퉁 붓기 시작한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던 아네트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문득 전생에서 자신의 병을 봐 주었던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네트가 태생적으로 ‘새 뼈’ 체질이라며, 뼈가 상하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의원을 부르려면 적어도 내일 오전은 되어야 했다. 아네트는 시큰거리는 손에서 애써 시선을 떼고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네트는 여전히 과거의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라펠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제 괜찮아요, 라펠. 당신은 나쁘지 않아요.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어요.”



아네트는 멀쩡한 다른 쪽 손을 뻗어 그의 흑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작고 따뜻한 손이 잘생긴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겨 주고, 주름이 잡힌 미간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자 불안정했던 라펠의 호흡이 점차 느릿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선을 가진 라펠의 얼굴은 참 남자다운 미남이었다. 저 얼굴로 조금만 웃어준다면 참 근사할 텐데, 슬프게도 라펠은 그녀를 보면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아네트는 아픈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준 덕에 델티움은 안전한걸요. 이제 당신을 해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그러지 못하게 당신을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푹 자요.”



아네트의 조곤조곤한 속삭임은 그 자체로도 이미 노래 같았다. 이를 꽉 악물어서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라펠의 입매가 조금 느슨해졌다. 아네트는 내친김에 손을 뻗어 그의 차가운 맨어깨를 토닥이며 체온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 자요, 사랑스러운 그대



이슬을 머금은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오를 때



창가에 놓인 은반지가 햇볕에 따뜻하게 반짝일 때



그대는 고운 잠이 들 거에요…….



이제는 능력을 사용하는 게 제법 익숙해진 듯했다. 라펠은 어느새 편안해진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아네트는 그의 단단한 근육질의 상체 위로 이불을 당겨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깨어있을 땐 그렇게나 미운 말만 내뱉더니, 잠들어 있는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잘생긴 얼굴에 내리감은 긴 속눈썹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언젠가 저 얼굴이 희미해져서 기억조차 하지 못할 날이 올까?’



아네트는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마도 그렇진 않을 터였다. 이런 얼굴을 잊어버릴 수 있을 리 없지.



아네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뻗어 라펠의 날카로운 콧대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그는 어찌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아네트의 손길을 무방비하게 허락했다. 평소 예민하던 라펠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아네트의 능력은 피곤한 사람에게 쓸수록 더 잘 드는 모양이었다. 그 대신 정신이 멀쩡하거나, 졸리지 않은 사람에게 쓰면 5분도 채 못 가는 듯했다. 한낮에 자신의 앞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던 제라드를 억지로 재웠을 때처럼 말이다.



“잘 자요, 라펠.”



아네트는 가만히 그의 맞은편에 누워서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자 가까운 곳에서 쌔근쌔근 잠든 라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전생엔 단 한 번도 라펠과 함께 잠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회귀도 이렇게 보니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덕분에 델티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져갈 추억이 늘었으니까.



아네트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다친 손이 좀 욱신거리긴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의원을 부르면 괜찮을 터였다. 처음으로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라펠은 나른한 기분에 젖어 눈을 떴다. 일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컨디션이 최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간밤에 모처럼 푹 잔 게 틀림없었다.



이런 날일수록 검술 수련에 한층 더 박차가 가해지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소드 마스터의 벽을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감에 눈을 뜬 라펠은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고 흠칫 굳어졌다.



‘아네트 바이에른?’



아네트는 그와 마주 본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손바닥만한 새하얀 얼굴에 오목조목 들어차 있는 섬세한 이목구비가 꼭 인형 같았다. 잠에 취한 눈가와 뺨에 떠오른 발그레한 홍조만이 그녀가 산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라펠은 눈으로 그녀의 잠든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아네트의 흘러내린 긴 금발도, 슈미즈 밖으로 살짝 드러난 흰 어깨도 다 햇살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거렸다. 이를 본 라펠은 어쩐지 불편한 기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아네트를 보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상반신을 일으킨 라펠은 약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향긋한 허브 냄새가 풍기는 방은 온통 새하얀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포근한 융단과 창가에서 흩날리는 벚꽃색 커튼을 보니, 아네트의 침실임이 확실했다.



‘내가 왜 여기서 잠든 거지?’



라펠의 눈썹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빌어먹을 몽유병 때문에 아무래도 아네트의 침실까지 걸어온 모양이었다. 지금껏 아무리 병이 심해도 단 한 번도 침실 밖까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 꼴을 보아하니 앞으론 제 침실에 자물쇠라도 걸어야 할 모양이었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라펠은 자신이 잠든 사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침에 깨어나 보면 가끔은 눈가가 짓물러 있고, 손아귀가 헤져 있기도 했으며, 목이 쉰 듯 깔깔하게 아프기도 했다. 이를 감안해 볼 때 어지간히 추한 진상을 떠는 게 틀림없었다.



자존심 강한 라펠은 자신이 질질 짜고 애원하며 밖을 나돌아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미칠 것 같았다. 만약 그 꼴을 아네트가 보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치욕스러워서 저절로 이가 갈렸다. 자연히 아네트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일어나, 아네트.”



이를 악문 라펠이 손을 뻗어 잠든 아네트를 깨웠다.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추태를 목격했는지 따져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가 몸을 흔드는데도 쉬이 깨어나지 않았다.



“으음…… 라펠.”



아네트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내리감긴 그녀의 긴 속눈썹은 영 눈을 뜰 기미가 안 보였다. 성미가 급한 라펠이 으르렁대며 그녀의 작은 얼굴을 한 손에 움켜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아네트. 지금 당장!”



그 순간, 아네트의 가녀린 몸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축 늘어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라펠이 그녀를 깨우다 말고 흠칫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아네트는 쉬이 눈을 뜨지 못한 채 그의 손아귀에서 이리저리 힘없이 흔들릴 따름이었다. 손안에서 늘어지는 가녀린 목의 감촉이 라펠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제야 라펠은 아네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단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분노가 당혹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하며 아네트의 상태를 살폈다. 단순히 잠에 취해 체온이 높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발그레하게 물든 아네트의 뺨도 홍조가 아니라 열꽃이 핀 것이었다.



당황한 라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아네트를 깨웠다. 일단 그녀를 깨워야 어디가 아픈지라도 물어볼 수 있을 터였다. 그의 손이 팔 부근에 가 닿는 순간, 아네트가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아!”



반사적으로 다친 곳을 감싸 쥔 아네트가 아픈 듯 훌쩍였다. 라펠의 눈길이 그녀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왜 이제야 눈치챈 건가 싶을 만큼 아네트의 손은 새빨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검사라서 부상에 익숙한 라펠은 그녀의 손이 왜 저러는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골절이로군.’



열이 나는 것도 골절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라펠은 미간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살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 같은 작은 손은 열 때문에 뜨거웠다. 다행히 그리 심한 골절은 아니었지만, 아네트가 워낙에 곱게 자란 몸이라서 이마저도 크게 앓는 모양이었다.



“눈 좀 떠봐, 아네트. 많이 아픈가?”



라펠이 초조하게 그녀의 뺨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아네트가 가까스로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에 들뜬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에 기어이 눈물이 어룽지더니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를 본 라펠의 가슴이 묘하게 지끈했다. 때맞춰 아네트가 힘없이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라펠…… 나, 몸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요.”



라펠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녀의 눈물이 제 손에 닿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사람의 눈물이 아프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라펠은 제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면서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잠깐만 있어, 아네트.”



라펠은 황급히 침실을 벗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계단을 몇 개씩 뛰어넘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래층에 도착한 그가 주위의 고용인들을 붙잡고 사납게 윽박질렀다.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