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라일린 모슬리, 연령불명의 아름다운 미남자. 그는 델티움 뒷세계의 큰손 중 하나였다. 라일린의 비밀스러운 길드, ‘세크리트’의 사업 분야는 비단 밀출국 쪽에만 한정되어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보 길드를 포함하여 불법적인 ‘심부름’들을 해 주는 조직들을 여럿 갖고 있었다.
자연히 라일린은 그 곱상한 미모와 달리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꽤 자주 해왔다. 그는 상대의 말투만 들어도 꽤 정확하게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라일린이 보기에 아네트는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투는 고상하면서도 침착했고, 밀출국을 얘기하면서도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꼭 다가올 미래의 불행을 예견하고 미리 몸을 뺄 탈출구를 찾는 사람 같았다. 한 마디로 철없는 영애의 가출 시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보아하니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무엇 때문에 고생길을 자처하는 건지.’
라일린은 그녀에게 몹시 흥미를 느꼈다. 그는 뒷골목에 몸을 담았으나 취향이 까다로워, 고상하고 우아한 것들을 좋아했다. 마침 눈앞의 아네트가 딱 그랬다. 그녀의 숨소리, 앉아 있는 자세,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다 빈틈없이 기품을 머금었다.
아네트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선수금을 내놓았다. 라일린은 그걸 받고서 양심껏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라일린은 여기서 그녀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어차피 라일린의 ‘사업’은 다방면으로 손이 뻗쳐 있으니, 운이 좋다면 계속 만나게 되리라.
라일린은 선뜻 그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을 접으며 이 상담을 마무리했다.
“잘 알겠습니다. 오스란드의 살기 좋은 마을 몇 군데와 일자리 정보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추려서 서류로 보내드리지요. 혹시 마음이 바뀌거나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이 반지를 이용해서 연락 주시면 됩니다.”
화사한 영업용 미소를 머금은 라일린이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커다란 자수정이 박힌 그 반지에는 금박으로 ‘S’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라일린이 운영하는 세크리트 길드를 상징하는 마크였다.
아네트는 기꺼이 그 반지를 받아 챙겼다. 만약 밀출국을 할 거라면, 사전에 미리 밑밥을 깔아놓는 작업이 필요했다. 델티움에서 ‘아네트 바이에른 카네시스’는 최소한 행방불명이 되거나, 경우에 따라선 사고사까지 위장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차후 아네트에게 추적이 따라붙지 않을 터였다.
‘아니, 애초에 추적 같은 걸 걱정할 필요가 없으려나.’
베일로 가려진 아네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버린 친정에서 쓸모도 없는 그녀의 생사를 궁금해할 리 없었다. 적어도 자신의 오라버니인 아르옌이나, 새언니인 클레어는 걱정하긴 할 테지. 그들 부부에겐 어떻게든 따로 소식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라펠은…….’
자신의 남편을 떠올린 아네트는 가슴이 아팠다.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네가 싫다고 말하던 라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과 결혼했기 때문이겠지.
라펠에겐 미안한 것도 많았고, 이 삐걱거리는 부부 관계를 잘 개선해 보고 싶은 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그와 잘 지내보려 노력했으나, 역시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였다.
아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손안에 든 자수정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라펠이 그토록 자신을 싫어한다면, 이제 아네트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사라져도 라펠은 여전히 밤에는 잠을 잘 못 이룰 테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대신 그녀라는 낮의 걱정거리가 사라질 테니까.
* * *
저택으로 돌아온 후에도 아네트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호화로운 침대 헤드에 입혀진 금박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바이에른 가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니만큼, 자연히 이런 고급품과 호사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곧 시작될 홀로서기가 두려웠다.
사실은 오빠 부부가 있는 샤펠 제국으로 갈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아네트의 밀출국이 들킨다면, 그들에게도 피해가 가게 될 터였다. 아르옌과 클레어는 꽤 높은 관직에 올라 있으니, 어쩌면 아네트 때문에 불이익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과감하게 오스란드 왕국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앞으로의 세부 계획을 어떻게 짤지 고민하면서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달의 위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한 아네트는 침대 위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지금껏 나고 자란 델티움을 떠나기 위해선 적어도 몇 달간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터였다.
오늘따라 유독 밤이 고요해서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아네트는 멍하니 누워 눈을 깜박이다 문득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바로 그녀의 침실 앞에서.
‘사람의 발소리?’
정체 모를 발소리는 그녀의 침실 앞부터 복도 사이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조심스럽게 침실 앞까지 다가간 아네트는 문에 귀를 대고 눈을 감았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고 있었다.
‘설,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아네트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처음엔 하녀인가도 싶었지만, 이 시간에 굳이 안주인의 침실 앞 복도를 청소하며 잠을 방해할 하녀는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라고 하기엔 발소리가 지나치게 묵직한 느낌이었다. 아네트는 애써 두려움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물었다.
“밖에 누구죠?”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발소리마저 우뚝 멎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침실 밖의 무언가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아 아네트의 호흡이 가빠졌다. 다행히 그녀가 소리쳐서 사람을 부르려던 찰나, 문밖에서 희미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냐, 난…… 정말로 널 버리려던 게 아니라…….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밖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는 아네트가 익히 들어 잘 아는 것이었다.
‘라펠?’
정체불명의 발소리 때문에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남은 건 걱정이었다. 물론 라펠이 자신에게 차갑게 군 걸 떠올리면 섭섭하고 화도 났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라펠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그는 또 지독한 악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조심스럽게 침실의 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새어 나간 등불의 희미한 빛이 남자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비췄다. 자다가 나온 건지, 라펠은 반라의 모습으로 바지만 간신히 걸친 상태였다. 그는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나도 널 구하고 싶었는데…… 로베르트, 해자 너머로 적들이…… 아냐, 그래도 널 버리면 안 됐는데. 미안해.”
라펠의 거친 호흡 사이로 두서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가, 이윽고 밤의 고요함 속에 묻혀 사라졌다. 그는 뭔가를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내리감긴 눈꺼풀 뒤로 그의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라펠, 당신 괜찮아요?”
아네트가 얼른 그의 곁에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깊은 꿈의 수렁으로 끌려 들어간 라펠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라펠은 그 수려한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차디찬 복도의 벽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벽에 자신의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난 비겁해, 약해. 난…… 죽어 마땅한 놈이야.”
자책 어린 중얼거림과 함께 라펠이 벽에 이마를 부딪치는 강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어찌나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심한지, 이마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라펠은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이마가 터질 게 분명했다.
“라펠, 왜 이래요? 멈춰요!!”
놀란 아네트가 얼른 발돋움을 해서 그의 이마를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덕분에 라펠의 이마가 터지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그녀의 작은 손이 벽에 꽤 아프게 짓찧어졌다. 아네트는 하마터면 통증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입술을 꼭 깨물고 참았다.
라펠을 끌어안자 그의 벌거벗은 상체에서 냉기가 훅 풍겨왔다. 제법 오랫동안 밖을 헤맸던 게 틀림없었다. 이에 안쓰러움을 느낀 아네트는 최선을 다해 그를 벽에서 조금 떼어놓았다.
“이리 와요, 라펠. 얼른요. 여긴 너무 춥고 어둡잖아요. 그렇죠?”
아네트는 그가 또 자해를 시작하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침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침실에는 은은한 등이 부드러운 빛을 내뿜었고, 숙면을 돕는 허브 포푸리의 향이 그득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를 느낀 건지, 라펠의 괴롭게 일그러졌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가까스로 라펠을 자신의 침대 위에 앉힌 아네트는 남몰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라펠의 이마를 감싸느라 벽에 찧은 손이 심상치 않았다. 꼭 정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손가락 마디들이 저릿했고, 셋째와 넷째 손가락은 아예 새빨갛게 붓기 시작했다.
‘설마 골절은 아니겠지.’
아네트는 근심 어린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혼곤한 악몽 속에 있는 라펠이 뒤에서 신음했다.
“나도 널… 구하고 싶었어, 로베르트…….”
자신의 손가락부터 구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다고 아네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