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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라펠은 진심으로 아네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눈앞의 그녀는 꼭 작고 화사한 햇살 같아서, 크고 음침한 자신은 그저 찡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아네트의 눈빛이 걱정스럽게 바뀌었다. 아무래도 그는 어젯밤에도 잠을 잘 못 이룬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뻔히 라펠이 매정하게 나올 걸 알면서도 최대한 태연하게 권했다.



“괜찮다면 저와 차 한 잔 하지 않겠어요? 마침 허브티를 마시고 있는데, 두통과 피로 회복에 좋대요.”



라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쓱 돌렸다. 역시나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거절당한 아네트의 어깨가 티 나지 않게 조금 처졌다. 그 순간, 라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까칠한 말투로 그녀를 재촉했다.



“뭐해? 차 마시자며.”



뜻밖에 말에 아네트가 눈을 크게 뜬 채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펠이 기다리기 싫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방금 전까지 아네트가 앉아 있었던 창가 근처의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왜 이러지?’



라펠은 내심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자신을 깔아보는 바이에른 가의 딸일 뿐인데, 왜 그녀에게 술주정을 한 게 미안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남편의 의무로서 차나 한 잔 마시고 서둘러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라펠의 내적 갈등을 알 리 없는 아네트는 생긋이 웃으며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모처럼 그와 보내는 다툼 없는 시간이 기쁠 따름이었다. 그녀는 이참에 제 친정에서 혹시 뭘 원하는지 아느냐고 라펠에게 넌지시 물어볼 작정이었다.



쪼르륵―



예쁜 앤티크 찻주전자에서 향긋한 차가 흘러나왔다. 진하게 피어오르는 허브티의 향기를 맡자 정신이 다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라펠은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모처럼 날카로웠던 신경이 완화되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무심코 건너편에 앉은 아네트를 바라보자, 그녀는 아까 읽던 책을 향해 손을 뻗는 중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라펠은 전에도 정원에서 책을 읽던 아네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아네트가 살며시 웃으면서 대꾸했다.



“네. 좋아한다기보단 뭐랄까…… 실내에서 할 만한 취미 생활이 별로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델티움에선 흰 피부를 선호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어릴 적부터 햇볕을 잘 쬐지 못했어요. 밖에 나가면 다들 제 피부가 혹 그을리진 않을까, 넘어져서 무릎에 흉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했거든요. 그게 불편해서 저도 어느 순간부턴 밖에 잘 나가지 않게 되더라고요.”



라펠의 눈이 아네트를 가만히 훑었다. 가냘픈 팔다리와 눈처럼 흰 피부, 섬세한 얼굴은 꼭 장인이 공들여 만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그러나 아련한 표정으로 자신의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는 아네트는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바이에른 가의 여식으로 사는 것도 나름대로 피곤한 일인가 보군.’



무심코 생각하던 라펠은 곧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리 그래도 바이에른 가 출신이니, 아네트는 밥을 굶거나 추위에 덜덜 떨어 본 경험 따윈 없을 터였다. 라펠은 구정물에 찌든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는 자존심 강한 라펠이 죽어도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암울한 출생 문제였다.



다행히 부친인 셀그라티스 왕이 힘을 썼기 때문에, 그의 모친 쪽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알려지기라도 하면 지금도 흰 눈으로 자신을 멸시하는 델티움의 귀족들이 좋아서 미쳐 날뛸 테지.



라펠의 남자다운 각진 턱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 더러운 기분을 떨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릴 툭 내뱉었다.



“난 흰 피부는 아파 보여서 그리 선호하지 않아.”



“……그런가요?”



아네트의 순한 눈꼬리가 실망한 듯 축 처졌다. 그녀는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자신의 팔과 손을 내려다보느라 고개를 숙였다. 이 때문에 라펠은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내심 초조해졌다.



‘왜 자꾸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게 되는 건지.’



아무래도 자신은 재앙의 조동아리를 가진 모양이었다. 괜히 자기 자신이 못마땅해진 라펠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아네트의 풀죽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팔을 뻗은 아네트가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수줍은 듯 떨리는 눈으로 그에게 물어왔다.



“그럼 라펠, 만약 내가 피부를 그을리면…… 그땐 조금이라도 날 좋아해 줄래요?”



아네트의 금빛 속눈썹에 둘러싸인 장미꽃 같은 눈동자가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하면서도 도발적인 물음에 라펠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라펠은 어젯밤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이 싫다.’라는 말을 들은 아네트가 어떤 심정으로 저런 질문을 한 건지 미처 몰랐다. 그녀는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용기를 끌어모아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아네트의 떨리는 눈동자와 마주친 라펠은 갑자기 심장이 서늘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건 일종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저 작은 여자 앞에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차는 다 마셨으니 이만 가 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펠은 차갑게 아네트의 손을 떨쳐 냈다. 그리고 꼭 도망치듯이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매정한 태도는 아네트를 또다시 상처입혔다.



빈자리에 홀로 남겨진 아네트는 처연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허공에 떨쳐진 새하얀 손이 밑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모든 용기를 잃은 그녀는 홀로 남은 빈 테이블 앞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라펠이 마시다 만 찻잔에선 아직까지 연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공에서 너울거리는 그 연기는 꼭 몸을 흔들며 아네트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아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역시 우리는 안 되나 봐. 라펠은, 그는…… 날 싫어해.’



사실 생각하면 라펠에겐 미안한 일뿐이었다. 그는 사생아라는 출신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신과 결혼했다. 그것도 나쁜 소문에 휘말려서 문란하다는 이유로 왕세자비가 되지 못한 자신과.



안 그래도 라펠 입장에선 참으로 찝찝한 결혼이었을 텐데, 심지어 처가에선 그의 출생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사사건건 모욕을 주었다. 그런 처가가 자신에게서 뭔가를 빼앗지 못해 안달인 꼴이 얼마나 진절머리가 날까. 이러니 자신을 보는 라펠의 눈이 차디찰 수밖에.



‘차라리 라펠이 아예 나쁜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몰랐을 때처럼 마음껏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아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찻잔 속 찻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우는 듯도, 웃는 듯도 하여 참으로 기묘했다. 그녀는 라펠의 본성이 그리 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또한 짐승이 되어야만 했을 뿐.



라펠은 아네트가 몸져눕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받았을 때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아주었다. 그리고 아네트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간호했다. 그는 비록 아네트를 사랑하진 않았을지언정, 그녀에 대한 의리는 마지막까지 충실히 지켜주었다.



결국 문제는 라펠이 아니었다. 주위의 적의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날카로운 성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적의들의 대부분은 아네트를 활시위 삼아 라펠에게 쏘아지곤 했다.



아네트는 자신이 라펠을 떠나야만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기로 했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새로운 길을 알아보려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 *









화려한 자줏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미인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흰 피부에 고양이처럼 도발적인 눈매, 입가에 찍힌 점이 더없이 요염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미인의 정체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남자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아네트를 가만히 훑었다. 아네트는 비록 베일을 길게 늘어트린 모자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으나,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남자는 대번에 아네트가 상당히 귀한 몸임을 눈치챘다.



“흠.”



밀출국 길드 ‘세크리트’의 책임자, 라일린은 결국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운을 떼었다.



“외국의 믿을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신다고요? 혹시 어느 왕국으로 가실지는 미리 생각해 두셨나요?”



“네. 가능하다면 오스란드 왕국이 좋겠네요. 살기 좋은 곳이라고 들어서요.”



아네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스란드는 상당히 치안이 안정적이고, 법 체계도 잘 잡혀 있는 왕국이었다. 아직까지 마음을 확실히 정한 건 아니었지만, 미리 알아봐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네트는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이었으니까.



“오스란드라… 좋은 곳이지요. 법 체계가 아주 잘 잡혀 있는 곳이라서 치안도 좋답니다. 뭐, 국경 통과가 좀 까탈스럽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혹시 할 줄 아는 건 뭐가 있으신지요? 일자리를 알선하려면 일단 능력부터 먼저 파악해야 해서.”



라일린이 해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부러 떠보듯이 물었다. 네가 신분을 빼면 뭘 할 줄 아는 말이나 진배없어서, 귀족이라면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만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네트는 동요하지 않고 제가 할 줄 아는 것들을 침착하게 나열했다.



“일단은 델티움과 대륙 공용어, 샤펠 제국어, 오스란드 어 4개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아요. 그러니 번역이나 대필 쪽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아네트는 뻔뻔하게 자신이 악필이란 사실을 쏙 빼고 얘기했다. 뭐, 글씨가 좀 예쁘지 않은 편이긴 했지만 읽는 데 불편하진 않을 터였다. 아네트는 철석같이 자신의 글씨 가독성을 믿었다. 하지만 왠지 다른 장점들을 어필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자수도 평면 자수, 입체 자수, 드론워크 및 하덴거 자수, 커트워크, 스모킹까지 전부 능숙하고요. 오스란드의 의상실들은 수준이 꽤 높지요? 그리고 음…… 경영 관리 쪽이나 회계 서류에도 익숙한 편이에요. 그래서 상단에서 일해도 좋을 것 같네요. 물론 그쪽에서 절 고용할 의사가 있다면요.”



“흐응.”



라일린은 턱을 괸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베일 뒤의 얼굴이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라일린은 이 신비의 여인이 꽤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사치스러운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꽤 영리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