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같이 위층으로 올라가요, 라펠. 내가 손을 잡아 줄게요.”
아네트는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라펠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처음엔 아네트의 손을 뿌리치던 그가 이윽고 어지러운 듯 손을 맞잡아왔다. 아네트는 섭섭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침실까지 그를 부축했다.
비틀거리던 라펠이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뛰어난 검사인 그가 이렇게까지 몸을 못 가누다니, 단단히 취한 게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에게 뭘 물어보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네트는 취한 라펠에게서 옷을 벗기고 양말까지 손수 벗긴 뒤, 그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라펠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의 눈꺼풀은 반쯤 내리감겨 있었고, 술 때문에 얼굴도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물이 잘난지라, 술에 취한 모습이 오히려 퇴폐적이고 야해 보였다.
“오늘은 일찍 자요, 라펠. 주방장에게 일러서 내일은 숙취에 좋은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아네트는 무심코 그의 반듯한 이마에 흘러내린 흑발을 쓸어 넘겨주며 속삭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에는 지금 라펠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그는 속으로 뭔가를 꾸역꾸역 힘겹게 삼키는 사람 같았다.
아네트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라펠이 별안간 제 이마를 쓸어내리던 아네트의 손을 낚아채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네트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그의 몸 위에 엎어졌다.
코앞에 라펠의 잘생긴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북해의 바다처럼 새파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던 라펠이 이윽고 중얼거렸다.
“난…… 당신이 참 싫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네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라펠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묘하게 상처받았다. 아네트는 사실 이번 생에는 라펠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리고 라펠의 단단한 몸 위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손을 뻗은 라펠이 그녀의 등을 내리눌러 제 몸에 더욱 밀착시켰다. 이제 아네트는 그에게 반쯤 끌어안기다시피 한 상태였다.
반대편 손을 들어 아네트의 뺨을 어루만진 라펠이 불쑥 내뱉었다.
“어차피 당신도 내가 싫을 테지.”
아네트는 대체 라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화를 내는 것도 무의미한 짓이었다. 아네트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윽고 작게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요, 라펠.”
전생엔 분명 라펠을 싫어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을 상처 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부친에게 버림받은 충격에 심신이 불안정했던 아네트는 이를 견디지 못했다.
라펠과의 결혼 생활도, 누명으로 인해 달라진 현실도 아네트에겐 너무 버거웠다. 그녀는 끝끝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앓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전생의 결혼 생활은 끔찍했지만, 지금의 아네트가 라펠의 시비를 잘 참아 넘기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래도 내 병석을 마지막까지 지켜 준 사람은 라펠뿐이야.’
라펠은 아네트가 건강했을 땐 더할 나위 없이 못된 남편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꽤 좋은 남편이 되어주었다. 그는 아네트가 병석에서 앓아누운 약 2년간 충실히 그녀를 간호했다.
물론 라펠의 성질은 어딜 가지 않아서 가끔은 수프를 집어던지기도 하고, 아네트에게 고함을 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종국엔 또 후회하는 얼굴로 아네트의 옆에 기어들어 와 그녀의 열을 재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네트는 전처럼 라펠이 밉지가 않았다. 이번에도 비록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그와 결혼했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자신의 남편인 라펠과 함께.
“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라펠, 당신은 내 가족인걸요.”
쓴웃음을 머금은 아네트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라펠이 잘생긴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마치 그녀의 손길을 차갑게 거부하듯이.
“아니, 당신의 가족은 내가 아냐. 그 잘난 바이에른이지. 안 그래?”
라펠이 한층 더 못되게 빈정거렸다. 독한 술기운도 그의 날카로운 혀끝을 무디게 할 순 없었다.
“라펠…….”
그 말을 들은 아네트는 울고 싶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럼 자신만 더 비참해질 테니까.
그녀의 부친은 아네트를 버렸고, 하나뿐인 오라비는 바다 건너 먼 제국에 가 있었다. 새언니인 클로에도 다시 제국으로 귀환한 지금, 아네트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오직 라펠뿐이었다. 하지만 라펠마저도 자신을 싫어했다.
제 밑에 깔린 라펠을 바라보는 아네트의 눈동자가 아픔으로 처연해졌다. 이를 본 라펠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제길. 당신이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난…….”
라펠은 말을 끝마치는 대신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눈을 보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었다. 아네트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투명한 물방울이 이윽고 중력에 이끌려 라펠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라펠이 꼭 불에 덴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우는 건가?”
라펠은 취해서 가물거리는 눈으로도 집요하게 아네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네트는 차분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눈가를 닦고, 남은 눈물을 마저 삼켰다. 바이에른 가의 교육을 받고 큰 그녀는 감정을 참아 누르는 게 익숙했다. 마음의 상처를 능숙하게 감춘 아네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알아요, 라펠. 이해해요. 하지만 당신은 내 하나뿐인 남편이고, 나는 당신을 소중한 가족으로 여겨요. 이건 진심이에요.”
평소보다 더 붉어진 아네트의 눈이 애틋하게 웃었다. 그러자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라펠이 아까 한 말을 고집스레 반복했다.
“그래도 난…… 역시 당신이 싫어.”
그 말을 들은 아네트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표정이 허물어지기 전에, 얼른 몸을 일으켜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이 결혼이 전보다 낫다고 속 편히 받아들였던 건 자신뿐이었나 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네트는 그날 밤새도록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친정의 횡포에 맞서 싸워 라펠을 지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라펠의 술주정을 듣고 나자,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애초에 내가 라펠을 지키는 게 가능할까? 그는…… 나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사실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딱 하나였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
라펠의 인생이 편해지려면, 아네트가 그에게서 떠나 주면 되었다. 그럼 친정에서도 아네트를 빌미 삼아 라펠에게 뭘 내놓으라 요구할 수 없을 터였다. 거기다 싫은 자신의 얼굴을 더 보지 않아도 될 테니, 라펠도 훨씬 안정을 되찾겠지.
아네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남들과 달리 삶을 두 번이나 살게 되었지만, 아네트는 그 어느 쪽도 적당히 산 적이 없었다. 자신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왜 늘 애물단지 취급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못 본 지 오래된 부친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라 괜히 더 슬퍼지는 밤이었다.
‘그래, 내일부터 방법을 한번 찾아보자.’
아무런 준비도, 방향도 없이 새로운 삶을 꿈꿀 순 없었다. 회귀해서 전보단 나아졌다고 해도, 아네트는 본디 온실 속 화초였다. 그러니 이번엔 온실을 벗어나기 전 최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할 작정이었다. 전생처럼 말라죽지 않게끔 말이다.
아네트는 설움으로 젖은 속눈썹을 내리감으며 애써 잠을 청했다. 부디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될 수 있길 소망하면서.
다음날, 라펠은 깨질 듯한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독한 숙취와 몽유병 때문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하지만 오늘치 검술 훈련을 빼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라펠이 가진 모든 것들은 오로지 그 검 끝으로 얻은 것이었으므로.
‘이제 소드 마스터가 머지않았는데.’
라펠은 지독하게 피로한 눈으로 훈련복을 걸치고 세안을 했다. 그의 눈앞을 가로막은 마지막 단계는 도무지 무너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라펠은 이 마지막 단계를 끝끝내 뛰어넘지 못한 수많은 검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초조했다.
아른거리는 수반 위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형편없었다. 새파란 눈동자 주변은 보기 싫게 충혈되었고, 수염은 비죽이 자란 데다 안색도 칙칙했다. 이 몰골을 본다면 제아무리 착한 체하는 아네트 바이에른도 질색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잠들기 전, 아네트를 본 것도 같았다. 그녀와 했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네트의 꽃잎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던 것도 같았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더러웠던 기분이 괜히 더 저조해졌다.
“빌어먹을.”
사실 아네트는 그의 생각보다 잘 해주고 있었다. 콧대 높은 바이에른 가 출신인데도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고, 사생아에 불과한 자신을 남편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제가 아무리 못된 소리를 내뱉어도 화를 내지 않는 그 놀라운 인내심에는 경의를 다 표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아네트가 눈물까지 보인 걸 보면, 자신이 어제 술에 취해 어지간히 심한 말을 지껄인 모양이었다. 라펠은 그녀에게 이혼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이혼’이란 단어를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섬뜩한 것도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라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현관 근처의 응접실 창가에 앉아 온화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네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법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아네트가 거짓말처럼 콧노래를 딱 멈추었다.
‘화를 내려나?’
라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데다 폭언까지 퍼붓는 남편이라니, 미움받는 게 당연했다. 그는 아네트가 자신을 외면하길 기다리며 저도 모르게 초조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아네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선하게 휘어지는 그 눈꼬리에는 자신을 향한 그 어떤 원망도 묻어있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네트가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왔다.
라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까워지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앞에 멈춰선 아네트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안녕, 라펠. 잘 잤어요? 기분은 좀 어때요?”
라펠의 꽉 쥔 두 주먹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이 여자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자신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