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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비록 차를 권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제라드의 입까지 억지로 열 순 없었다. 제라드 또한 바이에른 공작가의 집사이니만큼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아네트의 질문을 요리조리 비켜 가면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와중에 제라드의 앞에 놓인 찻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네트는 난처함을 느끼며 눈썹을 찡그렸다. 제라드는 단단히 작정을 한 건지, 그녀의 회유에도 설득에도 넘어오질 않았다. 자신이 갖고 온 화약을 오직 라펠 앞에서만 드러낼 작정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부친의 명을 받고 온 제라드를 억지로 다그쳐서 입을 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출가외인이 된 아네트는 자신의 명령을 우선하라며 제라드를 핍박할 권한이 없었다. 그녀는 초조함에 남몰래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쥐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제라드는 그녀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드디어 찻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제라드가 안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발을 한 올도 남김없이 단정하게 뒤로 넘긴 집사의 얼굴은 얄미우리만큼 빈틈이 없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제라드가 입을 열어 정중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차도 다 마셨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친절한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카네시스 후작 부인.”



아네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라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아네트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제라드, 가기 전에 부탁이 하나 있어.”



그녀를 돌아보는 제라드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아네트가 자신을 또 회유하려 들까 봐 견제하는 표정이었다. 아네트는 그가 거절의 말부터 꺼내기 전, 재빨리 말을 마저 이어갔다.



“별 건 아니고 사적인 부탁인데, 내가 요즘 취미로 성악을 배우고 있거든. 근데 재능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남에겐 부끄러워서 차마 들려줄 수 없지만, 나를 오래 돌봐주었던 그대라면 괜찮을 것 같아. 혹시 내 노래를 한번 들어줄 수 있을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네트는 저번에 루드비히 왕세자가 했던 부탁을 알차게 응용했다. 예상외의 부탁에 제라드는 바로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비록 주인인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의 명을 따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네트를 좋아했다. 잠시 고민하던 제라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의 승낙에 아네트가 기쁜 듯 웃었다. 눈을 곱게 접는 그 미소가 소녀 시절과 너무도 똑같아서,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아련한 눈빛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아네트는 눈을 감으며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시간은 한 장 한 장 덧없이 떨어지는 꽃잎



이 추락의 비극이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한시라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좋아, 몇 번이라도 그대의 앞에서 나는 기쁘게 떨어지리라









아네트는 최근 궁정에서 들은 기억이 있는 오페라를 적당히 개사해서 불렀다. 어차피 정말 중요한 건 노래가 아니었다. 기억이 허락하는 데까지 노래를 부르던 아네트는 살그머니 눈을 떠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작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제라드는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다. 이를 본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새삼스럽게 자신의 능력에 감탄했다.



‘정말로 이게 내 능력인가 봐.’



그러나 한가하게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능력이 아직 얼마만큼 사람을 오래 재울 수 있는지 몰랐다. 그러니 제라드가 깨어나기 전, 얼른 그의 몸을 뒤져봐야 했다. 운이 좋다면 단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었다.



“미안해, 제라드.”



작게 속삭인 아네트는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라드가 입고 있던 재킷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다행히 조끼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웬 편지였다.



아네트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끔 조심조심 편지를 뜯어보았다. 비록 보낸 사람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네트는 부친의 정교하고 우아한 필체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짤막한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 선물은 주는 자가 아닌, 받는 자를 위한 것.



이게 무슨 뜻이지? 아네트는 한 줄뿐인 편지의 내용을 속으로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혈통을 중시하는 알라만드는 그 누구보다도 귀족다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원하는 걸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건 천박하다고 여겼다.



다행히 아네트는 그의 딸로 오랫동안 지내왔기 때문에, 부친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얼추 눈치챌 수 있었다.



‘일단 라펠이 보낸 결혼 예물이 마음에 안 드신 건 확실해.’



그러니 예물들을 보란 듯 돌려보냈을 것이다. 여기에 이 편지의 내용까지 감안해 보면, 아무래도 부친이 라펠에게 바라는 ‘선물’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그제야 왜 부친이 자꾸 제라드를 보내 라펠과 접촉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엔 라펠이 사생아라서 그를 사위로 맞아들이는 게 싫어 모멸감을 주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부친의 진짜 목적이었다면, 저번의 예물 반환 사건이면 이미 차고 넘쳤다. 부친은 라펠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뭘까?’



아네트는 미간을 찡그렸다. 바이에른 공작가는 델티움 최고의 명문가였다. 그들은 권세와 부, 명예 중 그 어느 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집안이었다.



반면에 라펠은 이제 막 새로 가문을 시작한 신흥 귀족이었다. 비록 눈부신 전공을 세워 하사받은 재물과 영토가 몇 있었지만, 부친이 탐낼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네트는 곰곰이 전생의 기억을 뒤지면서 부친이 원하는 게 뭘지 고민했다.



“으으음…….”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때, 잠들어 있던 제라드가 섬세한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날 낌새를 보였다. 잠든 지 고작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아네트의 ‘능력’은 그리 오랫동안 사람을 재우진 못하는 듯했다.



아네트는 제라드가 완전히 일어나기 전, 서둘러 편지를 도로 풀로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제라드의 품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시치미를 뚝 뗀 아네트가 태연하게 제라드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제라드, 제라드? 일어나 봐. 빨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네트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부드러운 눈꺼풀이 여러 겹으로 접히고, 금빛 속눈썹 밑으로 진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며 아네트를 바라보던 제라드가 이윽고 잠이 덜 깬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아네트 아가씨.”



눈을 살짝 내리뜬 제라드가 제 어깨를 흔들던 아네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 위에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마치 자신의 아가씨가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아네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또 ‘아가씨’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제라드는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아네트는 짐짓 그의 실수를 모르는 체하며, 제라드에게 잡힌 손을 빼고서 손뼉을 딱 쳤다. 그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제라드. 내 노래가 그렇게 지루했어? 끝까지 듣기도 전에 잠들다니. 나 조금 상처받았어.”



아네트가 부러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제야 잠들기 전 상황을 기억해 낸 제라드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그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잠들었었다니, 제라드 본인조차도 자신의 태만한 모습이 믿겨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 카네시스 후작 부인. 제가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라드가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사과의 인사를 올렸다. 이에 아네트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 쓸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야……. 내게 재능이 없는 걸 어찌 남 탓을 하겠어. 바쁜 와중에 어리광을 받아줘서 내가 고맙지. 이제 얼른 돌아가 봐, 이러다 늦겠어.”



“……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미 졸아버린 터라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제라드는 도통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별로 피곤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잠들어 버린 거지? 어찌할 줄 모르고 우물쭈물하던 제라드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서 카네시스 후작저를 떠났다. 한동안 아네트를 볼 면목이 없을 듯했다.









그날 밤, 아네트는 라펠이 돌아올 때까지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친정과 라펠은 늘 사이가 지극히 나빴다. 그래서 라펠이 딱히 친정에 뭘 넘겨준 기억도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라펠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뿐이었다. 그는 아마 자신의 친정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을 터였다. 아네트는 초조하게 양손을 모아 쥔 채 라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자신의 친정이 자꾸 그에게서 뭘 빼앗으려 드는 게 미안하고 속상했다.



‘나를 라펠에게 시집 보낸 것도 혹시…… 원하는 게 있어서였을까?’



아네트는 이 가능성도 한번 검토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애초에 이 결혼이 자신의 누명 때문에 성사된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부친도 할 수 없이 이 결혼에 동의했던 것이라고 믿었다.



어차피 왕세자비가 되지 못한 아네트는 아무 가치도 없었다. 여기에 왕이 제안한 결혼까지 거절한다면, 아네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네트와 바이에른 공작가에게 지대한 악영향이 생길 터였다. 그녀의 친정도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만약 친정에게도 나름의 꿍꿍이가 있었다면? 이미 쓸모가 없어진 아네트를 라펠에게 시집 보내되, 대신 그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작정이었다면?



아네트는 결혼식에 참석했던 제 부친의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자정이 좀 넘은 야심한 시각, 드디어 라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네트는 얼른 층계 밑으로 내려가서 그를 반겼다.



“라펠, 당신 왔어요? 왕궁은 잘 다녀왔나요?”



라펠은 대답 대신 흐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술잔이라도 기울이다 온 건지, 숨결에서 상당히 독한 술 냄새가 풍겼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