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왕궁에서 일하는 시중인들은 기강이 반듯하게 잡혀 있었다. 그들은 모든 행실에 지나치리만큼 신중을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그런데 근무 도중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이 모두 잠들어 버리다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아네트는 시험 삼아 그들 중 한 명을 흔들어 깨워보았다. 그러자 루드비히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시중인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왕세자 궁에 방문한 귀빈을 모시는 중에 졸다니! 기강이 해이하다고 치도곤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이 무슨 불경을……!! 정말 죄송합니다, 카네시스 후작 부인. 진심으로 사죄드리는 바입니다.”
시중인은 앞에서는 아네트에게 공손히 사죄하고, 뒤로는 열심히 제 동료들을 툭툭 차서 깨우는 진기명기를 선보였다. 다른 시중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더니, 머리를 꾸벅꾸벅 숙여 사죄했다. 졸지에 꾸벅꾸벅의 물결에 파묻힌 아네트는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선뜻 용서를 베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중인들은 일제히 반짝이는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당장 화를 내도 모자랄 마당에, 상냥하게 웃으며 자비를 베푸는 아네트는 말 그대로 천사 같았다. 저런 분이 왕세자비가 되었어야 했는데, 대단히 아쉬웠다.
그러나 아네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순간, 아네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책에선 분명 회귀자들이 전에 없던 ‘특수한 능력’을 하나씩 가진다고 했었지. 어쩌면 내 능력은……’
노래로 사람을 재우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네트의 몸에 전율이 쫙 흘렀다. 그녀는 이미 몽유병에 시달리는 라펠을 한번 재운 적 있었다.
당시엔 별 대수롭지 않게 자장가의 효과가 좋았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자신이 ‘능력’을 사용해 라펠을 재운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매사에 신중한 편인 아네트는 가능하다면 몇 번의 시도를 더 해 볼 작정이었다.
‘비록 정령술처럼 거창한 능력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선 오히려 더 유용할지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네트는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정말로 회귀했다는 사실이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로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온전히 자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 * *
생각보다 외출이 길어져서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컴컴한 어둠을 뚫고 귀가하는 마차는 평소보다 느렸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든 아네트는 미처 지루한 줄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어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한 후에도 이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도착했습니다, 마님.”
말을 세운 마부가 조심스레 아네트에게 도착을 알렸다. 아네트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마차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휙 들려 올라갔다.
“꺄악!”
발밑이 푹 꺼지는 기분 나쁜 부유감은 아네트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특히나 딴생각 중에 벌어진 일이라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네트는 본능적으로 손에 닿는 것을 아무거나 잡아당기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것은 불행히도 라펠의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던 아네트를 낚아챈 장본인은 바로 라펠이었다. 그는 아네트에게 머리칼을 붙잡힌 게 대단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이를 드러낸 그의 입술 사이에서 소리 없는 으르렁거림이 들려오는 듯하여 아네트는 오싹해졌다.
“미,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황급히 라펠의 머리칼을 놓은 아네트가 덜덜 떨며 사과했다. 간이 작은 편인 그녀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질 않아 숨이 가빴다. 그런 아네트를 내려다보며 당장이라도 욕설을 퍼부을 것 같았던 라펠은 이를 악문 채 숨을 골랐다. 뭔가를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왜 저리 화가 났지?’
이를 본 아네트는 불안감에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라펠의 분노는 그녀가 머리칼을 붙잡은 것과는 별 상관없었다. 그는 아까부터 모종의 이유로 분노한 채 아네트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라펠의 옷깃에 스며든 밤의 찬 공기가 이를 증명했다.
아네트는 그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입술을 깨물었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라펠의 기질은 아네트에겐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얼굴을 바짝 들이민 라펠이 다짜고짜 그녀를 추궁했다.
“오늘 왕궁에서 누굴 만났지?”
“네? 그야 메모에 남긴 것처럼 새언니를…… 아.”
얼떨결에 대답하던 아네트가 도중에 뭔가를 깨닫고 탄식했다. 어찌 안 건진 모르겠지만, 라펠은 오늘 그녀가 루드비히 왕세자와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그제야 아네트는 왜 라펠이 이렇듯 화가 났는지 이해했다.
사실 라펠의 입장에선 불쾌한 게 당연했다. 자신의 아내가 딴 사람을 만나는 척 속이고, 옛 약혼자와 밀회를 나눈 꼴이었으니까. 아네트의 얼굴에 떠오른 난처한 기색을 본 라펠이 한층 더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늦지 않게 돌아온다더니. 재회가 너무 즐거운 나머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지? 그가 그렇게 잘 해 주던가?”
코앞에서 라펠의 새파란 눈이 북해의 얼음보다도 찬 빛을 품고 쏘아보았다. 회귀한 후에도 그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건 여전히 아픈 일이었다. 불쌍하게 눈을 내리뜬 아네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라펠의 옷깃을 잡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라펠. 새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걸요. 워낙 갑작스레 혼담이 깨진 터라, 서로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그래서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온 것뿐이에요. 이제 두 번 다신 왕세자 전하와 마주할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고개를 든 아네트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펠은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네트의 얼굴이 어찌나 순진하고 얌전해 보이는지, 아마 대부분은 껌벅 속아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라펠은 속지 않았다. 그는 지금 몹시 기분이 더러웠다. 아네트의 메모를 읽은 라펠은 왕궁으로 향했다. 물론 아네트를 데리러 간 건 아니었다. 그 또한 어차피 왕궁에 방문해야만 하는 볼일이 있었다.
라펠은 자신의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을 만나 아네트에 대해 물어볼 작정이었다. 왕이 결혼 전 라펠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던 소문이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펠은 대체 어디서부터 이 불협화음이 발생한 건지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셀그라티스는 라펠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공식 석상에선 라펠을 아끼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교류를 피하는 편이었다. 참으로 가식적인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라펠은 허탕을 치고 왕궁에서 돌아 나왔다. 자연히 기분은 더러웠고, 그는 이왕 왕궁에 온 김에 아네트와 같이 귀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라펠의 판단 실수였다.
‘왕세자궁에서 대체 뭘 하는 거지?’
아네트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 라펠은 대단히 화가 났다. 성질 같아선 당장이라도 두 연놈이 뭘 하는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장소가 왕세자궁이었다. 주인인 루드비히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멋대로 왕세자궁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는 라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등을 돌려 왕세자궁에서 나오는 라펠의 기분은 아까보다 훨씬 더 더러워졌다. 저택으로 귀가한 라펠은 말 그대로 이를 갈며 아네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본래라면 그딴 여자가 어디서 뭘 하든 알 바 아니었지만, 라펠은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제 품 안에 갇힌 아네트를 바라보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라펠, 정말이에요. 왕세자 전하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저 작별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걸요. 아마 왕세자 궁의 시중인들에게 물어보시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내린 아네트가 간곡하게 결백을 호소했다. 그러나 오늘은 영 아네트의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마차를 점검하던 마부가 손에 뭔가를 든 채 눈치 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님, 여기 놓고 내리신 물건입니다.”
마부가 내민 선물상자를 본 아네트는 모든 걸 체념했다. 그녀의 입에서 허허로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신은 오늘 그녀를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라펠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상자를 받아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라펠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손끝에 딸려 올라온 가죽 초커가 쓸데없이 적나라하게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그걸 보란 듯 아네트의 코앞에 들이민 라펠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래, 궁의 시종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답을 듣겠군.”
“아녜요, 라펠! 그건 클레어 언니가…… 잠시, 잠시만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오해에 당황한 아네트가 황급히 손을 뻗어 선물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급한 손놀림으로 안을 마구 뒤적였다. 클레어는 선물 안에 대개 편지를 동봉하는 타입이었으니, 이를 믿은 것이었다.
다행히 상자 안쪽에 붙어있는 봉투 하나가 손끝에 걸렸다. 아네트는 그 안쪽의 편지 내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그것을 라펠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요. 이건 정말로 제 새언니에게 받은 선물이에요. 왕세자 전하와는 아무 관계없어요!”
라펠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 편지를 꺼내 읽었다.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훑어내렸다. 기실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아네트에겐 꼭 영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허탈한 듯 웃은 라펠이 그녀의 코앞에 편지를 들이밀었다. 그곳엔 클레어 특유의 샤프한 글씨체가 간결한 문장을 이루었다. 그것도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 그이와 짜릿한 밤 보내길 바라, 아네트! 너라는 여자에게 아주 확 목줄이 매이게 해 버리라고!
너의 사랑스러운 가족, 클레어가 ―
아아, 클레어……. 아네트는 말없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좌절했다. 그녀의 편지 덕에 클레어에게서 받은 선물임은 확실해졌다. 그것까진 참 좋았다. 하지만 클레어가 편지 안에 ‘그이’라고 뭉뚱그려 적어놓은 통에, 이것이 라펠을 의미하는지 루드비히를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에 클레어가 적은 그 적나라한 멘트들이란…… 지금도 라펠의 남자다운 긴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가죽 초커와 어우러져 더욱 아네트를 낯뜨겁게 했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싶다고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네트의 슬픈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좋아. 그대가 왕세자 궁에서 얼마나 짜릿한 작별 인사를 하고 왔는지 한번 보자고.”
이를 드러내며 잔인하게 웃은 라펠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