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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아네트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당황하자, 루드비히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가 바라보는 쪽을 향했다. 그는 무심코 상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건 그대가 들고 있던 상자 아닌가? 보아하니 뚜껑이 망가진 것 같은데, 내가 시중인들을 시켜서 지금…….”



루드비히 또한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내용물이 뭔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애틋한 분위기가 가득했던 후원에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다. 그것도 아주, 몹시 무거운 침묵이.



아네트는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쯤 되니 차라리 불법 미약인 편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향수나 화장수라고 변명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 초커와 채찍만큼은 도무지 뭐라 둘러대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귀하신 분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루드비히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시중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철저한 직업 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바닥에서 상자를 줍고, 내용물을 도로 정돈해 묵묵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벤치 위에 올려놓은 후,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뒷걸음질 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동안 아네트는 눈을 질끈 감고 세상이 멸망하기만을 빌었다. 당연히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고, 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새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선 루드비히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도 뭘 묻는지 모르는 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대는 설, 설마 라펠과 저런 걸……?”



“아뇨,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기겁을 한 아네트가 평소와 달리 강경하게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위기감을 느낀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일단 내뱉었다. 아네트의 신중한 인생에서 이렇듯 생각보다 말이 먼저 앞서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그, 저건 저희 집에서 키우는 개가 한 마리 있어서요! 정말 집채만한 개인데, 아마 전하께서도 그런 크기는 보신 적 없을 거예요. 근데 어찌나 성질이 사나운지 교육을 좀 시켜야 해서, 그래서 특별히 주문 제작을…… 왜냐하면 진―짜 큰 개거든요.”



아네트는 어쩐지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찝찝해졌다. 분명 되는 대로 주워섬긴 변명이었는데, 이상하게 라펠을 간접적으로 욕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네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길고 장황한 변명이 끝나자, 루드비히가 기세에 떠밀린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 그랬군.”



“……네.”



모든 걸 해탈한 아네트가 초점 없는 눈으로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세상이 멸망해 주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아네트의 회귀 후 능력은 그런 쪽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자신에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스러울 따름이었다.



아네트와 루드비히 사이로 다시금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루드비히가 이윽고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 앉아서 얘기하지.”



그는 말을 더듬었다. 단언컨대 분명히 더듬었다. 아네트는 딱 죽고 싶은 심정으로 말없이 벤치 위에 도로 앉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상자를 집어 들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왕족 앞에서 허락 없이 자리를 뜨는 건 모욕죄에 해당했다.



다행히 루드비히도 어지간히 화제를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뭔가 필사적으로 고민하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번에 내가 새로운 류트 곡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 기억해? 마침 그 곡을 며칠 전 완성했거든. 한번 들어보겠어?”



“네, 전하.”



이젠 뭐가 되었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아네트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가 손짓하자, 뒤의 시중인들 중 한 명이 뛰어가서 류트를 가져왔다. 자세를 잡은 루드비히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류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도 루드비히의 류트 연주 실력은 월등히 뛰어났다.



아네트는 눈을 감고 류트 연주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루드비히의 섬세한 손끝에서 천상의 음률처럼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연주를 끝낸 루드비히가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예전 같군. 내가 류트를 연주하면, 그대가 지금처럼 곁에 앉아 들어주곤 했지. 기억나?”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음악은 확실히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아네트도 옛 추억에 약간의 향수를 느꼈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아네트의 옆얼굴은 아름다웠다. 이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네트, 그대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 부디 내 청을 들어주겠어?”



아네트는 선뜻 수락하지 않고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설마 또 내 왕세자비는 너뿐이라는 뒷북을 울리려는 건 아니겠지. 아네트는 그의 입에서 무슨 청이 나올지 조금 긴장했으나, 다행히 루드비히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괜찮다면 전처럼 내 연주에 맞춰서 노래를 불러 줘.”



루드비히의 긴 은빛 속눈썹 밑으로 라펠과 닮은 푸른 눈이 처연하게 빛났다. 뜻밖의 청에 잠시 고민하던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은 썩 어렵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부왕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그리고 셀그라티스 왕은 루드비히가 악기나 연주하는 꼴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루드비히는 자신이 좋아하는 류트를 연주하기 위해 아네트를 이용하곤 했다. 그녀와 담소를 나눈다는 핑계로 문과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류트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네트가 왕세자비가 되려고 루드비히에게 몸을 막 내던진단 누명도 여기에서 시작된 게 틀림없었다. 하긴, 다 큰 남녀가 단둘이 밀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면 그런 쪽으로 오해할 만도 했다. 아마 몸으로 하는 합주인 줄 알 테지.



아네트는 과거의 어리석었던 자신을 향해 혀를 찼다. 그리고 루드비히의 청에 조건을 하나 달았다.



“물론이지요. 어차피 한 곡뿐이니 그냥 여기에서 하지요. 대신 그 후엔 정말로 가 봐야 해요.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는걸요.”



“이해해. 내 청을 들어줘서 고마워, 아네트.”



루드비히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 애수에 젖은 눈빛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이 연주가 끝나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의 남편, 라펠이 있는 집으로. 그리고 자신과 아네트는 이제 영영 남이 되겠지.



루드비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이 아네트의 남편이 될 거라 굳게 믿었었고, 여전히 그렇게 되고 싶었다. 라펠이 아닌, 바로 자신이. 하지만 아네트는 이미 자신의 새 남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루드비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했다.



‘부왕의 애정도, 아네트도…… 전부 그놈이 빼앗아 가는군.’



루드비히의 푸른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네트에게 집중할 때였다. 마음을 다잡은 루드비히는 이윽고 류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금발에 직접 왕세자비의 관을 씌워주리라 믿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처럼.



아네트는 살며시 눈을 내리감고 그 연주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미 과거에 여러 번 불러 본 노래였다. 처음엔 가사도 없는 멜로디에 불과했던 그녀의 흥얼거림은 이윽고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당신의 검 끝은 차가운 겨울의 색



끓어오르는 전장의 함성은 울컥 터지는 용암의 색



왕가에 바치는 충성은 늘 푸르른 상록수의 첫 이파리 색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이 모든 색이 한데 녹아들 때,



나는 발을 한번 구르고 자유롭게 떠날 거예요









아네트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물론 취미 수준이라 기교가 그리 썩 뛰어나진 않았지만, 목소리 자체가 부드럽고 고와서 그럭저럭 들을만하다는 평이었다.



그녀는 왕궁에 드나들던 시절, 오늘처럼 루드비히와 종종 합을 맞추곤 했다. 비록 예전만큼의 가창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노래를 하니 즐겁긴 했다. 그래서 아네트는 어느 순간부터 류트 연주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자유롭게 떠날 거예요…….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끝마친 아네트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놀라서 흠칫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류트를 연주하던 루드비히가 눈을 감고 벤치 위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설마 기절한 건가? 내 노래가 너무 형편없어서?’



간담이 서늘해진 아네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루드비히의 몸을 흔들었다. 설마 노래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종종 발작을 일으키는 루드비히가 또 쓰러진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면 류트를 연주하다 제 손으로 머리를 쳤던가. 지독한 몸치인 루드비히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다.



“전하, 전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어디 아프신가요?”



“으음음…… 아네트?”



다행히 루드비히는 금방 눈을 떴다. 혼절한 건지, 잠깐 잠이 든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힘겹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루드비히가 이내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저런, 너무 피곤해서 잠시 잠들었나 봐. 미안해, 아네트.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정말 이상하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모양이야. 기껏 대화하자고 그대를 붙들어 놓고 깜박 잠들다니, 면목이 없군. 그럼 부디 조심해서 귀가하도록 해.”



루드비히가 잠이 덜 깬 눈으로 횡설수설하며 아네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잠기운이 어지간히도 무거웠던지, 그의 섬세한 눈꺼풀에는 여러 겹의 주름이 생겨 있었다. 아네트는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바라던 바였으므로 선뜻 루드비히와 작별했다.



‘이상한 일이네.’



아네트는 저 멀리 사라지는 루드비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루드비히는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본디 잠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좋아하던 류트 연주 도중에 잠이 들다니, 참 루드비히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별생각 없이 뒤로 돌아선 아네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시중인을 발견했다. 아까 그녀가 루드비히와 단둘이 산책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동행을 요청했던 그 시중인들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서 있었던 그들은 서로에게 기댄 채 쿨쿨 잠들어 있었다. 마치 루드비히가 그랬듯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네트는 놀라서 입을 가린 채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