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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아네트는 루드비히가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 건지 궁금했다. 루드비히에겐 고작 몇 주 전 이야기겠지만, 회귀한 아네트에겐 무려 5년 전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아네트는 꼭 남의 일처럼 객관적인 자세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난, 아네트…… 그러니까, 그대의 결혼 선물 못 보내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전하.”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오히려 옛 약혼자인 루드비히가 결혼 선물을 보내면 그건 그것대로 재앙이었다. 그나저나 이 상황에서도 고작 하는 말이라곤 ‘결혼 선물 못 보내서 미안해.’라니. 아네트는 전과 달리 루드비히의 이런 유약함이 한심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에 어린 비난을 눈치챈 루드비히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만큼이나 섬세한 성격의 그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이윽고 자신의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루드비히가 꼭 심장을 토해내듯이 고백했다.



“아니, 사실은 안 미안해. 당신의 결혼식에 축하 선물 따윈 보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일부러 안 보냈는데,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해야 맞는 거겠지. 근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안 미안해. 그래서 난…… 그게 그대에게 줄곧 미안했어, 아네트.”



두서없이 중얼거린 루드비히가 더더욱 깊이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쯤 되면 미안하다는 건지, 안 미안하다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제 루드비히에게서 보이는 거라곤 긴 은발 사이로 빠져나온 귓바퀴뿐이었다. 그 귓바퀴가 어느 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그가 처연하게 속삭였다.



“대체 어찌해야 할까. 나에게 왕세자비는 오직 아네트, 그대 하나뿐인 것을.”



“전하…….”



루드비히의 고백을 들은 아네트는 먹먹함에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루드비히의 말에 감동받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아네트는 사실 화가 좀 나려고 했다.



‘내가 누명을 썼을 땐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덕분에 아네트는 왕세자비 후보에서 제명되었고, 셀레스틴이 그의 새 약혼녀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루드비히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건 아네트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딱 루드비히가 한 ‘노력’의 전부였다.



루드비히는 늘 부왕인 셀그라티스에게 약했다. 아비의 엄한 불호령 한 번에 찔끔한 루드비히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났고, 아네트가 라펠과 결혼할 때까지 이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근데 이제 와 분위기를 척 잡고서 한다는 말이, ‘나의 왕세자비는 오직 너뿐.’이라고?



아네트는 어이가 없었다. 만약 5년 전의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분노에 눈이 멀어 루드비히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랬다간 왕족의 몸에 손을 댄 현행범으로 왕궁 지하감옥 503호로 끌려가겠지만.



아네트는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삼켜 잘 갈무리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루드비히의 아픈 곳을 푹 찔러주었다.



“전하, 그런 말씀 마셔요. 이제 전하께는 셀레스틴 키어스 양이 있잖아요? 그녀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하겠어요. 그녀가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랬다. 셀레스틴은 왕세자비가 너무 되고 싶은 나머지 자신을 진창에 처박을 만큼 루드비히를 좋아했다. 뭐, 아직은 가정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네트의 가시 돋친 상냥한 어조는 루드비히의 귓바퀴를 새빨갛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도무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바닥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틈새로 고통스러운 사과가 연거푸 흘러나왔다.



“미안, 정말 미안해. 아네트. 하지만 난 도무지 키어스 영애를 사랑할 수가 없어.”



“그래도 이제 전하의 약혼녀인걸요. 부디 잘 지내도록 노력해 보셔요.”



“하지만 키어스 영애는…… 그대와 너무 달라. 그녀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걸. 난 도무지 키어스 영애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어. 같이 있기만 해도 피곤해.”



루드비히의 말을 들은 아네트는 의아했다. 셀레스틴 키어스가 그렇게 예민한 성격이었나? 같은 왕세자비 후보로 얼굴을 종종 마주했었을 땐 비교적 무던한 편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루드비히를 제법 좋아했으니,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굴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셀레스틴이 자작극을 꾸며 아네트를 몰아내고, 왕세자비 자리를 차지한 장본인일지도. 그렇다면 승자가 된 후 본성이 슬슬 나온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네트에게 그런 누명을 씌울 정도라면, 어지간히 악독한 여자 정도로는 안 될 테니까.



뭐가 됐든 지금은 아직 섣불리 이러쿵저러쿵할 때는 아니었다. 아네트가 침묵하자, 루드비히의 고개가 점점 더 밑으로 수그러들었다. 이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헐떡임을 닮아 있었다.



“미안해, 아네트. 내가 이런 남자라서…… 난, 나는 그대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야.”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고요한 후원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루드비히의 숨소리뿐이었다. 안 그래도 빨라지던 그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루드비히는 꼭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헐떡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스트레스에 약한 그가 가벼운 공황에 빠진 것이었다.



다행히 아네트는 그의 이런 발작에 익숙한 편이었다. 루드비히가 발작을 일으킬 때, 옆 사람이 당황하면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네트는 꼭 나지막한 콧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어조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전하, 괜찮아요. 이미 다 지난 일인걸요. 저는 결코 전하를 원망하지 않아요. 저도, 전하도 힘든 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괜찮아질 일만 남았어요. 그러니 부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네트의 대답은 얼핏 듣기엔 단조롭게 들렸다. 하지만 이는 루드비히의 신경질적인 발작을 가라앉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다행히 아네트의 도란도란한 말소리를 들은 루드비히의 호흡이 조금 가라앉았다. 효과가 있음을 확인한 아네트는 여기서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 다른 생각을 해 볼까요? 음…… 샤펠 제국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밀밭이 있다지요. 여름에 바람이라도 불면 사방이 온통 녹색의 물결로 뒤덮인대요. 밀들이 서로 사박거리며 비벼지고, 그 사이에서 신선한 풀 내음이 솔솔 풍기겠지요. 언젠가 그곳에 누워 종달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낮잠을 청하고 싶네요. 아마 그 경쾌한 노랫소리는 전하의 류트 음율만큼이나 아름답겠지요?”



아네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무척이나 듣기 좋은 차분한 톤이었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소리를 듣던 루드비히의 숨소리가 어느덧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예전에 곧잘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네트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루드비히는 비록 델티움의 하나뿐인 왕세자였지만, 그의 성향은 지배자보단 솔직히 예술가에 더 가까웠다. 태어날 때부터 길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게 적성에 안 맞으니 괴로울 수밖에. 이것이 루드비히를 가끔 발작하게 만드는 주된 고통이었다.



‘하긴, 가엾은 분이긴 하지.’



루드비히는 특히나 류트를 연주하는 걸 좋아했다. 그는 무척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리 자주 하진 못했다. 부친인 셀그라티스 왕이 이러한 루드비히의 취미를 못마땅해했기 때문이다.



셀그라티스 왕은 하나뿐인 왕세자인 루드비히가 좀 더 권력욕이 있길 바랐다. 이를테면…… 그래, 라펠처럼 말이다. 셀그라티스 왕은 이 점을 위해 루드비히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혹독한 아비였다. 그는 때로는 루드비히를 라펠과 비교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고 해댔다. 덕분에 루드비히는 라펠이라면 치를 떨었다.



이를 잘 아는 아네트는 조금 애잔해진 눈빛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얼굴을 든 루드비히가 약간 붉어진 눈시울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날 이해할까, 아네트? 이제 와서 그대가 아닌 딴 여자와 새롭게 혼사의 연을 맺어야 한다니…… 난 싫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은 루드비히의 눈이 물끄러미 아네트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그는 어렵지 않게 아네트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언제나 그대의 금발에 왕세자비의 관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 관에는 아주 아름다운 붉은 루비가 박혀 있거든. 관을 쓴 그대의 금발은 더욱 진하게 반짝이고, 분홍색 눈은 더욱 돋보여서 꽃잎처럼 생기를 머금겠지. 그래서 언젠가… 내가 그대의 머리 위에 직접 관을 씌워줄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었어.”



말을 마친 루드비히가 아련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의 손끝이 아네트의 금발을 만지고 싶은 듯 허공을 맴돌았지만, 차마 그녀에게 가 닿진 못했다. 이제 아네트는 다른 남자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 이복동생 라펠의.



아네트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나쁘게 헤어진 게 아닌 만큼, 아네트도 그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루드비히는 왕세자였기 때문에 안전했지만, 역으로 왕세자이기 때문에 불행했다. 그는 차라리 제4, 제5 왕자로 태어나 왕위에서 밀려난 채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편이 훨씬 행복했을 남자였다.



“아네트.”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루드비히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아네트의 치맛자락에 애틋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내리깐 은빛 속눈썹에 어느덧 축축한 물기가 고여 흘러내렸다.



“미안해. 그대의 결백을 믿는데도 부왕의 강경한 뜻을 거스를 수 없었어. 내가 비겁했던 거 알아. 하지만 난 역시…… 그대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되겠어. 오직 아네트 바이에른, 당신이어야만 해.”



고개를 들어 아네트를 올려다본 루드비히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뜻밖의 말에 황망해진 아네트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초에 그녀가 루드비히의 대화 요청을 수락한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아네트의 누명 사건 이후로 변변찮은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으니, 마지막으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자꾸 엉뚱하게만 흘러갔다.



“전하, 이러지 마세요. 저는 이미 라펠과 결혼한 몸…….”



황급히 말을 하려던 아네트가 문득 제자리에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이 루드비히의 옆에 떨어져 있는 선물상자에 가 닿았다. 가벼운 상자는 아까 아네트가 놀라서 일어날 때, 엉겁결에 떠밀려 같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상자가 바닥에 좀 떨어진 것까진 괜찮았다. 아까도 클레어가 한번 떨어트렸으니까. 하지만 두 번 연속으로 땅에 떨어진 상자는 꼭 항의하듯이 제 안의 내용물을 퉤! 하고 뱉어버렸다.



그리고 남색가마저 발정하게 만든다는 그 무시무시한 선물의 정체는 무려…… 가죽 초커와 채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