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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선물의 힌트를 들은 아네트의 동공이 대지진을 일으켰다.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클레어가 귀엽다는 듯 소리 내어 웃으며 아네트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 순간,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얏!”



“어? 아팠어? 미안해, 아네트.”



놀란 클레어가 허둥지둥 손을 치우고 아네트의 머리를 살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이윽고 아네트의 이마에 남은 작은 상흔을 발견했다. 그 순간, 클레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거 누가 그랬어, 아네트?”



순식간에 장난기가 걷힌 클레어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입으로는 누가 그랬냐고 묻고 있었지만, 범인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애초에 바이에른 공작가의 적녀인 아네트를 다치게 할 사람은 몇 없었다. 클레어의 오해를 알아차린 아네트가 황급히 부정했다.



“아녜요, 클레어 언니. 그런 게 아니고 제가 그냥…… 실수로 부딪힌 거예요.”



이상하다. 분명 사실만을 말한 건데, 이상하게도 매 맞고 사는 아내들의 전형적인 변명처럼 들렸다. 자연히 클레어의 초록색 눈은 불신으로 그득해졌다.



“아니긴 뭐가 아냐? 라펠, 이 빌어먹을 남색가 놈이 감히 내 동생을……!!”



화가 머리끝까지 난 클레어가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때문에 기껏 클레어가 준 선물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네트는 이 와중에 ‘내 동생’이란 클레어의 말에 감동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라펠이 ‘아내나 때리는 남색가 놈’으로 확정되기 직전, 얼른 클레어를 진정시켰다.



“정말로 라펠이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날아가는 책을 주우려다 기둥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친 거예요. 자, 보셔요. 여기 제 상처를 잘 보시면 맞아서 찢어진 게 아니고, 날카로운 데에 찍힌 모양일 거예요. 그렇죠?”



아네트가 손수 금발을 쓸어넘기며 클레어에게 상처를 더 자세히 보여주었다. 사실 출혈량에 비해 상처는 썩 대단치 않았고, 며칠이 지난 후인지라 상당히 아물어 있었다. 머리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를 발견해 낸 클레어가 대단한 것이었다.



클레어는 가재눈을 뜨고 아네트의 상처를 샅샅이 살폈다. 어릴 적부터 기사 훈련을 받아온 클레어는 부상에 익숙했다. 그래서 아네트의 말처럼 그 상처가 맞아서 난 것이라기보단, 어디 모서리에 부딪힌 모양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하지만 앞으로 지켜볼 거야, 아네트. 그가 혹시라도 네게 손을 올리면 언제든 얘기해. 아주 그냥 으깨 버릴라니까.”



대체 뭘 으깬다는 걸까. 클레어의 살벌한 당부에 아네트가 속눈썹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비록 클레어가 라펠을 이길 순 없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었다. 이러니 자신의 오라비인 아르옌이 클레어에게 홀딱 반한 것이겠지.



아네트는 항시 차갑고 삭막한 바이에른 가의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게 너무도 당연한지라 가족의 정이 고픈 줄도 몰랐다. 오라버니인 아르옌은 그나마 자상했으나, 두뇌가 워낙 비범한지라 늘 바빴다. 고독한 천재는 저보다 대여섯 살 어린 여동생에게 관심을 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으로 가족의 사랑을 받고자 했다. 특히나 부친인 알라만드의 기대를 충족시키면, 어쩌면 자신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고 착각했었다. 과거의 자신은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어차피 왕세자비가 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다 틀렸지만.’



이제 아네트의 남은 가족은 아르옌과 클레어, 그리고 라펠뿐이었다. 물론 라펠은 자신을 싫어했지만, 어쩌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네트는 가능하다면 그와 잘 지내고 싶었다. 그는 난폭한 겉보기와 달리 생각보다 좋은 남편이었으니까.



“아참!”



때마침 클레어가 허리를 숙이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선물을 도로 주워들었다. 아까 흥분한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녀는 화를 낸 것이 쑥스러운 듯 아네트에게 선물을 도로 쥐여주며 웃었다.



“어휴, 라펠 카네시스가 아내나 때리는 개새끼가 아니라니 천만다행이야. 기껏 남편과 사이가 좋아졌으면 해서 어렵게 구한 선물이거든. 지금이라도 도로 뺏어야 하나 싶었어.”



“근데 이 안에 정말로 뭐가 든 거예요?”



“궁금해? 궁금하면 집에 가서 풀어봐. 이왕이면 라펠 카네시스와 같이. 아주 오붓하게.”



원래의 미소를 되찾은 클레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아네트를 놀렸다. 짓궂은 그녀는 헤어질 때까지 끝내 선물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덕분에 아네트는 아리송한 얼굴로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도대체 이 상자 안에 뭐가 든 걸까?’



남색가도 발정하게 만들 물건이라니, 무섭기 그지없는 뉘앙스였다. 설마 미약은 아니겠지? 그거 불법인데. 아네트는 마치 폭탄이라도 보는 것처럼 찜찜한 얼굴로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상자 속 물건이 투시되어 보일 리는 없었다.



아네트는 얼른 집에 가서 이 수상쩍은 선물을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클레어를 만났던 곳은 왕궁의 서쪽이었다. 이 때문에 마차가 대기하는 남문으로 가려면 꽤 많이 걸어야 했다. 자연히 아네트의 발은 더 바삐 종종걸음을 쳤다.



그때였다. 별안간 아네트의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델티움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아네트.”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대상은 다름 아닌 루드비히 왕세자였다. 한때나마 결혼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 그리고 누명 사건 이후, 두 번 다신 만날 일 없었던 남자.



아네트는 오랜만에 보는 그를 앞에 두고 내심 당황했다. 사실 현생으로 치면 그리 오랜만은 아니었지만, 회귀한 시간까지 합치면 근 5년 만의 재회였다. 루드비히 앞에서 예를 갖춘 아네트의 눈동자가 남몰래 지진을 일으켰다. 하필이면 마주친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선물상자 안에 든 게 불법 미약일지도 모르는데.’



기껏 5년 만에 재회한 왕세자 앞에서 이딴 걱정이나 해야 하다니. 아네트는 슬퍼졌다. 그런 아네트를 내려다보는 루드비히 왕세자의 얼굴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몇 초간 침묵하던 그가 이윽고 예전 약혼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대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어, 아네트. 일어나도록 해.”



다행히 루드비히는 아네트가 들고 있는 상자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오직 아네트를 향해서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은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네트는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다른 남자와 혼인한 몸이니 이게 옳았다. 아네트의 간접적인 거절을 눈치챈 루드비히가 손을 거두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간곡한 어조로 아네트에게 청했다.



“괜찮다면 잠시 걷지. 그대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뜻밖의 제안에 아네트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기 싫었다. 루드비히와 하는 산책은 지금으로선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만약 호사가들의 눈에 띈다면, 아네트가 왕세자비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며 입방아를 찧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말이 라펠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런 아네트의 망설임을 눈치챈 루드비히가 손을 뻗었다. 우아한 그의 손끝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레이스로 장식된 그녀의 옷소매 끝을 조심스레 잡은 루드비히가 쥐어짜듯이 힘겹게 속삭였다.



“제발, 아네트…… 부탁이야.”



예전과 똑같이 미려한 그의 얼굴은 불안감과 초조함 때문에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루드비히가 지금 왜 이러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아네트가 결국 조건부로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대신 시중인을 최소 넷 이상 동행시켜 주세요. 더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 봐야 하니, 딱 삼십 분만 대화하는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야, 아네트.”



루드비히의 애절했던 얼굴에 그제야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아네트가 왜 이러는지 금방 눈치챘다. 루드비히가 저만큼 떨어진 시중인들을 향해 손짓하자, 정확히 네 명의 시중인들이 뒤에 따라붙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내심 작게 안도했다. 적어도 루드비히와 단둘이 걷는 것보단 이편이 남들 보기엔 훨씬 나았다.



다행히 루드비히가 그녀를 이끈 곳은 왕세자 궁의 후원이었다. 이곳이라면 누구도 루드비히의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자연히 그들의 산책이 사교계의 가십거리에 오를 확률도 그만큼 낮아졌다. 실로 탁월한 장소 선정이었다.



후원의 벤치에 앉은 루드비히는 한동안 침묵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아네트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루드비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억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다. 이를 본 아네트의 눈빛이 딱해졌다.



‘가여운 사람 같으니.’



루드비히는 겉보기엔 완벽한 남자였다. 큰 키에 후리후리한 체격, 흰 피부, 여기에 이목구비는 여자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은 달빛처럼 반짝이며 루드비히의 순은 같은 외모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는 누가 봐도 왕이 될 고귀한 재목이었다.



하지만 루드비히에겐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아네트…… 어억!!”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루드비히가 휘청했다. 혼자서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이었다. 아네트는 익숙하게 허공을 휘젓는 그의 팔을 붙잡아 도로 앉혀주었다. 루드비히는 어디 한 군데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쪽이 좋았다. 그의 신변에도, 델티움의 미래에도.



“괜찮으세요, 전하?”



“고, 고마워. 아네트. 정말 면목이 없군.”



그랬다. 루드비히는 뭐든지 잘할 것 같은 완벽한 외양과는 다르게 지독한 몸치였다. 그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게 다 형편없었다. 검술과 승마 같은 운동은 아예 꿈도 못 꿨고, 평평한 바닥에서도 혼자 넘어져 무르팍을 깨 먹었다.



방금도 아네트에 의해 엉덩방아 찧는 걸 만회한 루드비히가 얼굴을 붉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이윽고 고개를 돌려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아네트는 대체 루드비히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나 싶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루드비히의 아름다운 얼굴에 꼭 물들듯이 고통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그의 산호색 입술이 달싹이며 아픈 듯 속삭였다.



“미안해, 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