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16화





















아네트는 애써 당혹감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라펠이 남색가가 아니란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게이라고 하기엔…… 너무 집요했다. 라펠에게 한번 잡히면 탈진할 때까지 그 밑에서 헐떡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를 떠올린 아네트가 얼른 부정했다.



“아녜요, 클레어 언니. 제 남편은 그…… 여자를 좋아해요.”



“확실해?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아.”



별생각 없이 되묻던 클레어가 갑자기 침묵했다.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부부니까 당연히 같이 잤겠지. 클레어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 요즘 하도 검만 휘둘렀더니 뇌가 녹슨 모양이었다.



본의 아니게 시누이의 섹스 라이프를 추궁한 셈이 된 클레어는 난처하게 자신의 짧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을 떠올린 클레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제 그도 알겠네? 아네트, 네가 그…… 루드비히 왕세자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그렇죠.”



첫날밤을 떠올린 아네트의 뺨이 한층 더 붉어졌다. 그날 밤, 충격에 빠진 라펠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아네트의 대답을 들은 클레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당연히 알아야지! 아네트, 너만큼 성실하고 착한 애가 어디 있다고. 만약 네 남편이 몸 로비니, 뭐니 하는 헛소문을 믿고 널 홀대했다면 결투를 신청할 작정이었어.”



클레어의 눈은 진심 같았다. 아네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럴 필요 없다고 그녀를 만류했다. 라펠은 성격이 더러운 게 흠이었으나, 순전히 검술 하나로 후작위를 따냈을 만큼 뛰어난 수재였다. 아네트는 비록 클레어를 사랑하긴 했지만, 만약 둘이 싸운다면 라펠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클레어가 짙푸른 속눈썹을 내리깔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그녀의 분홍색 입술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때 널 모함했던 너희 집 마부, 이름이 이반이랬나? 그 배후가 누군진 아직 안 밝혀졌어?”



“……네. 아마 그렇게 쉽진 않을 거예요.”



이반, 언제 들어도 아네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이름이었다. 고작 마부 한 명이 씌운 누명 때문에 아네트는 왕세자비가 되지 못했다. 입술을 비튼 클레어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간 큰 놈이었어. 네게 감히 그런…… 엄청난 누명을 씌우다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네트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전생에는 이 얘기만 나와도 억장이 무너지고, 몸에서 열이 절로 치솟을 만큼 원통했다. 하지만 회귀해서 그런지 이번엔 좀 더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왕세자에게 몸으로 로비했다는 모함은 귀여운 수준이었어.’



아네트에게 씌워진 ‘진짜’ 누명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델티움은 왕세자비를 간택할 때, 후보를 둘 이상 두는 쓰잘데기없는 관례가 있었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관례일 뿐이었다.



당시 아네트의 경쟁자는 셀레스틴 키어스라는 후작 영애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문은 감히 아네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가 약한 데다, 결정적으로 루드비히가 아네트를 더 좋아했다. 누가 봐도 다음 왕세자비는 아네트가 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세상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곳이었다. 어느 날, 왕세자를 만나고 돌아오던 셀레스틴이 행방불명되며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경쟁자인 셀레스틴은 귀갓길에 웬 무뢰한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었다.



다행히 납치된 셀레스틴은 하루 만에 무사히 되돌아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셀레스틴을 납치한 범인의 정체였다. 예상했듯이 범임은 바로 아네트의 개인 마부, 이반이었다. 심문을 받은 이반은 조금 버티는 척하다 이내 배후로 아네트를 지목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그저 아네트 아가씨의 명을 따른 것뿐입니다. 어찌 저 같은 마부가 감히 고귀하신 아가씨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니, 부디 제 억울함을 참작해 주소서!!”



이반의 연기력은 참으로 뛰어났다. 그가 어찌나 절절하게 부르짖는지, 아네트조차도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잠깐 고민할 정도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오죽 설득력이 있었을까?



그 뒤는 뭐, 뻔한 몰락이었다. 이반은 놀랍게도 왕궁의 시종들을 제 공범으로 삼았다. 아네트도 왕궁을 출입할 때 종종 보았던 낯익은 시종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바이에른 공녀가 사주한 짓’이라고 증언했다.



덕분에 아네트는 질투에 눈이 멀어 경쟁자를 납치, 살해하려 한 끔찍한 악녀가 되었다. 셀레스틴이 속한 키어스 후작가는 몹시 분노하며 아네트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네트의 친정인 바이에른 공작가의 권세가 워낙에 대단한지라, 이는 무마되었다. 왕은 이 일을 조용히 넘기자며 바이에른 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날 라펠과 혼인시켰지.’



모처럼 아픈 기억을 떠올린 아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반은 무려 십 년 가까이 그녀를 위해 마차를 몰았던 마부였다. 마음 같아선 대체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 시점에선 불가능했다. 아네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배후가 누군지는 아직 몰라요. 심지어 이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길이 없는걸요. 누군가 그를 왕궁 감옥에서 빼돌렸으니까요. 아마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벌써 죽였을 거예요.”



클레어도 사실 이반이 죽었을 거라 짐작했다. 자신이 그 배후였어도 이반을 살려두진 않을 터였다. 그나마 아네트의 끔찍한 누명이 세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철저한 입막음 덕에 이 사건을 아는 건 당사자들뿐이었다.



뭐, 사실 피해자인 셀레스틴에게도 그편이 좋았다. 하루 이상 납치당했던 몸인 만큼,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만약 셀레스틴이 납치당했었던 걸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 대겠는가.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 셀레스틴이 못된 짓을 당했을 거라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트릴 터였다. 그럼 왕세자비가 되어도 앞날이 가시밭길이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네트.”



클레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의 이지적인 눈매가 가늘어지며 한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이 모든 게 셀레스틴 키어스라는 그 여자의 자작극이 아닐까?



아네트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도 사실 셀레스틴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번 누명 사건에서 셀레스틴은 아무것도 잃은 게 없었다. 납치범들은 그녀의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입막음이 잘 되어 명예가 실추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원래는 절대 불가능했을 왕세자의 약혼녀 자리까지 차지했다.



반면에 아네트는 모든 걸 다 잃었다. 왕세자비가 되려고 온갖 혹독한 교육들을 견뎌 왔던 그녀는 졸지에 가문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여기에 라펠을 비롯해서 그녀의 누명을 믿는 몇몇 사람들에겐 비난 어린 눈초리까지 받았다.



‘너무 불공평해.’



아네트는 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전생에는 끝끝내 누명을 벗지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제 결백을 증명할 것이라고. 바로 그때, 손을 뻗은 클레어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아네트. 배후가 누가 됐든 상관없어. 네게 그런 누명을 씌운 놈들을 반드시 잡아서 족쳐 줄게. 감히 네 미래를 망가트렸으니, 그들도 망가져야 공평하지 않겠어?”



클레어가 지적인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하지만 범인을 직접 잡을 계획인 아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클레어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꼭 자신의 일처럼 나서 주는 클레어 덕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녀는 아네트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언젠간 라펠도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생에는 라펠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이 했던 대화라곤 오직 말다툼과 격렬한 비난뿐이었다. 아네트가 병으로 죽어갈 때쯤에야 라펠은 그녀에게 친절해졌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그래도 역시 루드비히보단…… 라펠이 좋아, 난.’



아네트는 자신이 한 생각에 스스로도 놀라 멋쩍게 뺨을 붉혔다. 아무래도 라펠과 너무 오래 부부로 산 모양이었다. 전생엔 절대 하지 않았을 이런 생각까지 다 하게 되다니.



루드비히 왕세자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남이었지만, 라펠은 여자라면 누구나 눈이 돌아갈 만큼 관능적이고 남자다운 외모였다. 라펠의 더러운 성미를 익히 잘 아는 아네트조차도 가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으면 괜히 가슴이 뛰었다.



처음엔 왕의 권유로 울며 생강 먹기로 한 결혼이었지만, 늘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라펠은 아네트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갈 때도 그녀를 버리지 않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라펠은 대단히 책임감 있는 남편이었다. 최소한 부왕의 명을 거스르지 못해 아네트를 외면한 루드비히보단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아르옌 오라버니는 요즘 좀 어떠세요? 아직도 일 중독인가요?”



아네트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엔 클레어의 남편에 대해 물었다. 물론 새언니인 클레어의 남편은 아네트의 친오빠, 아르옌 바이에른이었다.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클레어의 얼굴이 확 찡그려졌다. 그녀는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잘생긴 눈썹을 꿈틀대며 불만을 토로했다.



“말도 마, 아네트. 벌써 3주째 집에도 안 들어오고 있어. 듣자 하니 왕궁 집무실에서 아예 씻고 자고 한다더라. 누가 보면 집도 없는 노숙자인 줄 알겠어.”



아네트는 자신의 오라비인 아르옌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는 일찍이 비상한 두뇌를 인정받아 샤펠 제국의 아카데미로 유학 갔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수료한 후, 샤펠 제국의 고위 관료로 취임해 버렸다. 아무래도 아르옌의 재능은 델티움 왕국에 한정되기엔 너무 특출했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부친인 알라만드는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유학이 끝나는 대로 아르옌을 귀국시켜, 바이에른 가의 후계자로서 교육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려 샤펠 제국이었다! 결국 알라만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아르옌을 놓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은 최초의 일이겠지.’



아네트는 자신의 대단한 오라비를 떠올리며 부러움을 느꼈다. 제국은 델티움 왕국보다 훨씬 거대한 곳이었고, 덕분에 아르옌은 늘 바빴다. 그래서 갑작스레 거행된 아네트의 결혼식에 도무지 올 수 없었다.



씩씩한 기사단장인 클레어와 달리, 아르옌은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문관 타입의 미남이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클레어와 아르옌은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적어도 아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간 나와 라펠도 그런 커플이 될 수 있을까?’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네트는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달라지는 만큼 라펠도 달라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아네트를 곁눈질하던 클레어가 이윽고 테이블 위에 뭔가를 꺼내 놓았다. 바스락거리는 금빛 포장지로 감싸인 작은 상자였다. 이를 본 아네트가 눈을 깜박이자, 클레어가 기대 어린 표정으로 해맑게 웃었다.



“짜잔! 늦었지만 결혼 선물이야, 아네트. 비록 원했던 결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이건 내 진심이야.”



아네트의 손을 마주 잡은 클레어가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클레어의 가문은 온통 우락부락한 남자들로 가득했는데, 이 때문에 클레어는 시누이인 아네트가 참 귀엽고 예뻤다. 그녀의 축하에 기쁜 듯 웃은 아네트가 선물을 집어 들며 별생각 없이 물었다.



“고마워요, 클레어 언니. 근데 이 안에 뭐가 든 건가요? 무척이나 가벼운데요.”



“아, 그거?”



클레어가 갑자기 음흉하게 웃었다. 이윽고 목소리를 낮춘 클레어가 국가 기밀이라도 토설하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놀라지 마. 그건…… 남색가도 발정하게 할 엄청난 물건이란다.”



…그런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