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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네트는 일단 거짓말을 해서 라펠의 마음을 지켜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라펠에게 제 거짓말이 들킬까 봐 눈을 내리깔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아뇨, 당신이 뭘 말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전 그냥 방을 잘못 찾은 것뿐이에요. 어제 새벽에 목이 말라 깼는데, 물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려니 너무 캄캄해서…… 그래서 당신 방으로 잘못 들어왔어요. 날이 밝으면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소파에 앉아있다 깜박 잠들었나 봐요. 미안해요.”



다행히 아네트의 얼굴은 무척 성실해 보이는 편이라, 라펠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아네트는 슬그머니 그의 팔 밑으로 빠져나오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두 번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 꺄악!!”



뒤에서 아네트의 허리를 낚아챈 라펠이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가 뭔가 속이는 게 있는 것 같긴 한데, 간밤의 기억이 없으니 추궁할 수가 없었다.



라펠은 괘씸함을 담아 아네트의 귓가를 몇 번 깨물다가 이윽고 살 내음이 풍기는 목덜미를 쭉 핥아 올렸다. 혀끝에 착 감기는 살결에선 뭐라 형용할 수 없이 달큼한 맛이 났다. 반쯤 화풀이로 시작한 일인데, 그의 건장한 하반신이 아침이랍시고 자꾸만 일어나려 들었다.



그냥 해 버릴까? 라펠은 제 품에 순순히 안겨 있는 아네트를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저 작은 머리통에 감겨 있는 흰 붕대가 거슬렸다. 라펠은 거친 섹스를 선호했는데, 아네트를 그렇게 굴렸다간 머리에 피가 몰려서 기껏 아문 상처가 터질지도 몰랐다. 하여튼 약해빠진 여자 같으니.



“가 봐. 한 번만 더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면 그땐 이걸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



라펠이 쌀쌀맞게 그녀를 밀어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못마땅한 듯 등을 돌린 그 모양새가 꽤 화난 것처럼 보였다. 아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라펠이 자신의 거짓말에 속은 것 같진 않지만, 상황을 모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네트는 라펠의 타액으로 축축해진 자신의 귓가와 목덜미를 소매로 훔쳤다. 그는 유독 아네트를 핥고 깨무는 걸 좋아했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하여튼 그녀의 남편은 이래저래 짐승 같은 남자였다.









* * *









며칠 후, 오후 수련을 마친 라펠은 땀을 닦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지 며칠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오랜 수면 부족은 라펠의 검 성취도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확실히 잘 잤을 땐 훨씬 컨디션이 좋았는데.’



라펠은 며칠 전, 아네트의 허벅지를 베고 잤을 때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날은 몸이 날아갈 듯 개운해서 성취가 유독 탁월했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정말로 손에 잡힐 듯 근접했었다. 라펠은 그날 밤, 잠들면서 다음날에야말로 소드 마스터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라펠의 착각이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수면 장애에 시달렸고, 검에 대한 성취도도 뒷걸음질 쳤다. 이쯤 되니 차라리 아네트에게 같이 자자고 윽박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라펠의 그린 듯한 섬세한 눈매에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그 여자가 날 우습게 볼 텐데.’



기껏 두 번 다신 자신의 침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윽박질러 놨는데, 이제 와 같이 자자니. 안 그래도 콧대 높은 바이에른 가 출신인 아네트가 자신을 어찌 생각할 진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차피 자신의 아내였고, 잠자리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이쯤 되면 머리의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을 테니 도로 터질 걱정은 없겠지.



라펠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날 밤만 유독 잘 잔 게 아네트의 덕인지, 그저 심술궂은 우연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도 수면 부족으로 새파란 눈 주위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선 그는 갈급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다 지나가는 하녀 한 명을 잡고 캐물었다.



“아네트는?”



처음으로 라펠과 대화를 하게 된 하녀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녀가 카네시스 후작가에서 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 젊고 사나운 주인과 말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하녀는 지나치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답했다.



“마님께선 오늘 외출하셨습니다. 메모를 남기신 게 있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외출이라고? 라펠의 잘생긴 미간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아네트가 혹 친정에라도 간 건가 싶어서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라펠은 아직 제 앞에서 시건방을 떨던 집사 놈과, 되돌아온 결혼 예물에 대한 모욕감을 잊지 않았다.



‘앞에선 내 편을 들어주는 체하더니.’



라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런 여자를 믿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네트는 역시 제 친정의 편이었고, 지금쯤 그곳에서 자신의 욕이나 소곤소곤하고 있을 터였다. 간교한 바이에른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라펠은 이를 악물며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메모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하녀가 내민 메모를 낚아챈 라펠이 이를 눈으로 쭉 훑어내렸다.



― 라펠에게



저는 오늘 궁에 다녀올 예정이에요. 샤펠 제국에서 온 저의 새언니, 클레어 루시드 바이에른이 모처럼 델티움 왕궁에 머물고 있거든요. 그래서 클레어 언니에게 안부 인사도 할 겸, 왕궁 동쪽의 제국 대사관에 다녀올게요. 늦지 않도록 돌아올게요.



향기 나는 연분홍색 메모지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뭐, 아네트가 그 지긋지긋한 바이에른 공작가에 간 건 아닌 듯하여 급격하게 화가 식었다. 그러나 라펠의 표정이 이렇듯 묘해진 건 단순히 예상이 어긋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공작 영애로 타고난 것 같은 우아한 아네트 바이에른은…… 뜻밖에도 악필이었다. 제 딴에는 꾹꾹 눌러 쓰면서 열심히 적은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잉크가 얼룩지며 더더욱 메모지를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분명 최고급 펜과 질 좋은 편지지를 썼는데도 결과가 이딴 식일 수 있다니, 실로 놀라웠다.



“왕궁이라…….”



편지지를 쥔 라펠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네트는 아마 지금쯤 자신의 새언니라는 클레어와 마주 앉아 다정하게 차를 마시고 있을 테지. 커다랗게 부풀린 드레스와 리본, 깃털로 장식된 두 여자가 핑크색 디저트를 집어 먹는 모양새가 상상이 갔다. 어쩌면 그 디저트에 곁들일 화제는 자신의 욕이 될지도.



라펠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바이에른을 혐오했다. 특히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은 왕궁에서 라펠을 볼 때마다 꼭 얼룩이라도 보는 듯한 눈을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장인어른이라니, 세상은 때론 희극보다 더 희극 같았다.



‘그래도 아네트 바이에른은 뭐, 그 정도까진 아니긴 하지.’



무심코 아네트에 대해 관대한 평가를 내리던 라펠이 혀를 찼다. 어쩌면 이게 아네트의 속셈일지도 몰랐다. 얌전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며 자신을 속이고, 뒤에서 어리석다 그를 비웃고 있을지도.



그 생각을 하니 라펠은 어쩐지 기분이 더러웠다. 그녀가 샤펠 제국에서 왔다는 자신의 새언니에게 제 흉이나 늘어놓게 놔둘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라펠 또한 왕궁에 갈 필요성을 느끼던 차였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자, 현 델티움의 왕인 셀그라티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아주 많았다. 특히나 아네트 바이에른에 대해서 말이다.



라펠은 늘 의뭉스럽게 웃고 있는 자신의 아비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왕궁에 가는 건 싫었지만, 때론 싫은 것도 참아야 하는 게 귀족의 거지 같은 단점이었다. 오늘도 썩 마음에 안 드는 하루가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  *  *









아네트의 티타임은 기실 라펠의 예상과 달리 그렇게 핑크핑크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새언니의 손목은 각이 딱 잡혀 있었다. 우아한 찻잔보다는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는 게 더 익숙한 손이었다. 테이블 밑으로 보이는 것도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아닌, 선명하게 라인이 잡혀 있는 기사의 바지였다.



아네트는 자신의 새언니인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머리칼을 턱밑에서 짧게 자른 그녀는 중성적인 느낌의 미인이었다. 여기에 샤펠 제국의 제 3기사단 단장을 맡은 뛰어난 기사이기도 했다. 아네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대뜸 사과부터 했다.



“결혼식에 참석 못 한 것 미안해, 아네트. 그때 진짜로 중요한 임무 중이었어.”



샤펠 제국 억양이 섞인 클레어의 악센트는 유독 더 딱딱하게 들렸다. 하지만 클레어는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잔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녀는 지금도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아네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녜요, 이해해요. 당시 제국이 난리도 아니었다지요? 군부 사령관의 암살 시도라니, 세상에. 일이 무사히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아네트가 빙그레 웃으며 클레어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사령관이 암살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기사인 클레어가 어찌 자신의 결혼식에 올 수 있겠는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클레어뿐 아니라 자신의 오라비인 아르옌까지 덩달아 정신없이 바빴으리라.



다정한 아네트의 반응에 눈을 깜박이던 클레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껴안았다. 웬만한 귀공자보다 훨씬 준수한 클레어의 얼굴이 아네트에게 친애 어린 키스를 퍼부었다.



“요 예쁜 것 같으니라고! 어쩜 이리 착할까? 내가 남자였다면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랑 결혼했을 거야, 아네트 바이에른.”



“이제는 아네트 바이에른 카네시스예요. 결혼했는걸요.”



클레어의 팔 안에서 휘둘리던 아네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동작을 뚝 멈춘 클레어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어느새 클레어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괜찮아, 아네트? 네 남편이 그…… 라펠 카네시스라며.”



아네트의 얼굴에서도 덩달아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그녀는 다른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 클레어가 라펠의 혈통을 걸고넘어질 거라 생각했다. 남편이 자꾸 사생아 소리를 듣는 건 아네트에게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전장의 살인귀 라펠, 맞지? 심지어 게이라면서? 자신의 부관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정말로 남색가야?”



뜻밖의 소리에 아네트의 미소가 경직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 남편이 게이라니, 남색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