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솔직히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보다 훨씬 덩치 큰 남자와 단둘이 컴컴한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심지어 칼까지 들고 있었다. 라펠의 낯선 모습에 겁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라펠…….”
하지만 아네트는 이대로 자리를 피하고 싶진 않았다. 무서운 건 사실이었지만, 늘 강하기만 했던 라펠의 가장 숨기고 싶었던 약한 부분을 고스란히 목격한 기분이었다. 아네트는 어쩐지 이 점에 대해 강한 부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양손으로 라펠의 뺨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쉬잇, 라펠. 전쟁은 이미 다 끝났어요. 당신은 이제 안전하고,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검을 내려놓고 이리로 와요. 네?”
아네트가 다정하게 그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녀의 작고 따뜻한 손이 라펠의 얼굴과 목덜미, 팔을 몇 번이고 반복해 쓸어내렸다. 그의 괴로운 표정이 점차 평온해지고,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천천히 이완될 때까지.
쨍그랑―
드디어 라펠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행히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소리는 그닥 크지 않았다. 아네트는 그 흉흉한 물건을 발로 살그머니 밀어 치워버렸다. 그리고 라펠의 드러난 상반신을 반쯤 끌어안다시피 해서 소파에 앉혔다.
작은 양손으로 그의 단단한 맨가슴을 살며시 내리누르자, 드디어 라펠이 쓰러지듯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아네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소파에 기대앉은 라펠은 멍하니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라 자신의 손을 바지춤에 거칠게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문질렀는지 그 우아한 손등이 금방 벌겋게 물들었다.
“이걸 좀 봐. 피, 피가 나…… 그렇지? 나는, 로베르트.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난……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어.”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라펠이 이윽고 자신의 얼굴을 고통스러운 듯 양손에 파묻었다. 점차 힘이 들어가는 손등에 핏줄이 서는 모습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옆으로 붙어 앉으며, 그 힘겨워 보이는 손을 잡아 다독여 주었다.
“다 알죠, 그럼요. 당신은 전혀 나쁘지 않아요, 라펠. 그러니 이제 그만 괴로워하고 쉬어요. 자, 이쪽으로 누워볼래요? 네. 그렇게요.”
라펠은 조금 버티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녀의 손길을 따라 무릎을 베고 누웠다. 워낙에 키가 커서 소파 밖으로 다리가 조금 삐져나왔지만, 적어도 아까보단 훨씬 편해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라펠에게 평온한 잠을 주는 것뿐이었다.
내리뜬 긴 속눈썹 밑으로 그의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악몽의 끝자락을 헤매는 듯한 그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네트는 안쓰러움에 손을 뻗어 그의 눈꺼풀을 감겨주고,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나 라펠은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이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잠들까?’
아네트는 자신이 라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해보았다. 다행히 기억을 뒤져 희미한 자장가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아네트의 부모는 어린 딸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만큼 다정한 위인들이 아니었으니, 그녀의 유모가 불러준 것이겠지. 목을 가다듬은 아네트가 조금 어색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잘 자요, 사랑스러운 그대
은빛 구슬 같은 달이 검은 능선에 걸릴 때
꽃에게 입 맞추고 온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올 때
바다 너머에서 거품들이 잘게 부서지며 키득거릴 때
그대는 고운 잠이 들 거에요
내 품 안에서 사르르 잠이 들 거에요.
아네트의 낮고 온화한 흥얼거림이 고요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보드라운 손길이 라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그가 정말로 무력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그가 정말로 사랑스러운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아네트의 자장가는 생각보다 효과가 뛰어났다. 라펠의 거친 숨결이 평온해지더니, 감은 눈꺼풀 뒤로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동자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잠시 후,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라펠이 드디어 깊은 잠 속에 빠져든 것이었다.
아네트는 이제 멜로디만 남은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제 무릎을 벤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잠든 라펠의 얼굴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상당히 오랫동안 수면 문제에 시달렸던 게 틀림없었다.
이제야 아네트는 그가 왜 밤마다 술에 취해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지금도 라펠의 고른 숨결에선 희미하게나마 술 냄새가 풍겼다.
‘불면증 때문에 그랬던 거야.’
아네트는 바이에른 공작가의 엄격한 훈육 아래, 부지런한 생활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녀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반면, 라펠은 정오를 넘겨서야 충혈된 눈으로 어슬렁어슬렁 나타나곤 했다. 아네트는 내심 그런 라펠의 모습을 못마땅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라펠의 나약한 모습을 본 지금은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아네트는 라펠의 이런 증상을 뭐라고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참전 후유증이겠지? 전쟁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나 봐.’
델티움 왕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이었다. 그들이 100여 년 전 점령했던 이웃 국가, 르탄의 저항 세력들이 기어이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합병된 르탄의 독립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심지어 외세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웠다. 이 때문에 델티움에서도 진압에 꽤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라펠은 그 전쟁에서 최전선에 나가 싸웠다. 그는 압도적인 실력과 냉혹한 손속으로 큰 전공을 세웠고, 그 대가로 많은 것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고도 시종일관 ‘당연한 일이지.’라는 오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실제로 라펠은 독선적이고 자존심 강한 남자였다. 그는 꼭 잘 벼려진 미스릴처럼 차갑고 단단해서, 무엇도 그를 상처입힐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심지어 그의 아내인 아네트조차도 라펠의 자존심 뒤에 숨겨진 어둠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여튼 고집 센 바보 같으니라고.”
아네트는 라펠의 잘생긴 뺨을 어루만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잠든 와중에도 그가 섬세한 눈썹을 찡그리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짐승 같은 육감으로 아네트가 제 흉을 본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네트는 어쩐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라펠이 아무리 화를 내고 고함을 쳐도 전처럼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또한 무서운 게 있고 마음의 상처도 입는, 평범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잘 자요, 라펠. 내 용감한 남편.”
아네트는 부디 라펠이 오늘만큼은 편히 잠들길 바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자 라펠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펴졌다. 이를 본 아네트는 소리 죽여 가만히 웃었다. 그렇게 부부 사이의 평화로운 밤은 깊어져 갔다.
창가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린 라펠은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이변을 느꼈다. 뭔가가 평소와는 달랐다.
라펠은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자신의 컨디션이 최근 몇 년 중 가장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처럼 아주 푹 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떠 보는 방의 풍경은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그는 소파의 팔걸이 너머로 튀어나와 있는 자신의 발을 보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간밤엔 소파에서 잠든 모양이군.’
잠자리가 바뀐 건 그리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라펠도 자신의 몽유병 증세를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또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이리저리 움직이다 소파에 누워 잔 모양이었다. 이렇게 작은 소파에서 웅크리고 잤는데, 어느 때보다 더 편히 잤다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었다.
어쨌든 가뭄의 단비 같은 숙면을 취한 라펠은 기분이 꽤 좋았다.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당장이라도 나가 검을 휘두르며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전하고 싶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문득 자신이 뭔가를 베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주 푹신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따뜻한 그 무언가를.
자신이 베고 잔 것의 정체를 확인한 라펠은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잠이 덜 깬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다.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소파의 가장 귀퉁이에 끼어 앉다시피 잠들어 있는 아네트가 보였다. 어제 다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유독 더 작고 창백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침 햇살이 닿으면 스르르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라펠은 그녀의 내리깐 금빛 속눈썹과 살짝 벌어진 꽃잎 같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아네트의 뺨과 목덜미를 매만졌다. 체온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아네트를 만지고 싶은 것도 있었다. 손끝에 와 닿는 그녀의 살결은 꼭 실크처럼 보드라웠다.
다행히 아네트의 체온은 조금 낮긴 했지만, 무난하게 정상의 범주에 속했다. 상처가 덧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손을 거둔 라펠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다쳤으면 방에나 틀어박혀 쉴 것이지. 여긴 왜…….’
여기까지 생각하던 라펠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불길한 가정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라펠은 저도 모르게 아네트의 어깨를 움켜쥐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깊은 잠 속에서 난폭하게 끌려 나온 아네트가 놀라서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라펠?”
라펠은 덫에 걸린 토끼 같은 그 반응을 보면서도 여전히 차가운 눈빛이었다. 아네트가 도망가지 못하게끔 그녀를 제 팔 안에 가둔 라펠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살벌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아네트를 추궁했다.
“봤나?”
“네? 무엇을…….”
“어젯밤, 내 모습을 봤냐고.”
잠에서 막 깨어 어리둥절하던 아네트는 이내 라펠이 뭘 묻는지 깨달았다. 코앞에서 자신을 쏘아보는 그의 푸른 눈은 화가 난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지만, 불안감 때문에 조금씩 흔들렸다. 자존심 강한 라펠은 아네트의 앞에서 제 몽유병 증세를 들켰을까 봐 걱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네트는 고민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