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펠의 얼굴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흑발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꼭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차가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그 손만큼은 가면 뒤에 감춰진 라펠의 당혹감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순간, 아네트는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예감이었지만, 만약 그녀가 지금 약한 소리를 내뱉는다면 라펠이 받아줄 것만 같았다. 아네트는 자신의 예감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나 아파요, 라펠…….”
그 순간, 아네트의 이마를 지혈하던 라펠의 손에서 힘이 저절로 빠졌다. 화가 난 듯한 그의 얼굴이 아네트의 울먹이는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라펠은 평소 하던 것처럼 못된 이죽거림을 내뱉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초 후, 가까스로 입을 연 그가 대꾸했다.
“당연히 아프겠지. 이마가 찢어졌는데.”
빈말로라도 다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느릿한 대답엔 평소 날카롭게 돋쳐 있던 가시가 누그러들어 있었다. 이에 용기가 생긴 아네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 말려드는 셔츠는 그의 체온을 품고 있어 따뜻했다.
라펠의 시선이 자연히 제 옷자락을 쥔 아네트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있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아네트가 흠칫하며 손을 떼었다. 셔츠가 짙은 색이라 티는 나지 않았지만, 옷에 피를 묻혔는데 라펠이 좋아할 리 없었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변명조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난 그냥 좀 어지러워서…….”
아네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라펠이 허리를 숙였다. 아네트는 그가 옷자락을 쥔 자신의 손을 떨쳐 내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라펠은 뜻밖에도 그녀의 무릎 뒤쪽을 받치는가 싶더니, 아네트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저택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친절에 아네트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시야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느낌에 눈앞이 아찔했다. 저도 모르게 라펠의 어깨를 더듬더듬 붙잡던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떠올리고 아차 싶었다. 이로써 두 번째였다.
“미안해요, 라펠. 당신 옷에 피가…….”
오늘따라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았다. 라펠은 그녀의 사과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좀 더 재촉했다. 시선을 힐끗 내리자, 아네트의 금발을 흠뻑 적신 핏자국들이 보였다. 본인 머리가 저 지경인데 하는 걱정이라곤 고작 내 셔츠라니. 라펠은 내심 기가 막혔다.
품 안에서 흔들리는 아네트의 몸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아주 부드러웠고, 가냘팠으며,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가 났다. 쓸데없이 약해 보이는 여자라서 별 것 아닌 상처마저 괜히 안쓰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럴 터였다.
라펠은 자꾸만 누그러지는 제 모습이 낯설어서 부러 걷는 데 집중했다. 단숨에 현관을 돌파한 그는 아네트를 안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2층까지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아네트의 침실 앞 소파에 그녀를 천천히 눕혔다.
“고마워요, 라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네트가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라펠은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돌리고 나가 버렸다. 어찌나 휙 나가 버리는지, 그가 일으킨 찬바람이 아네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익숙하기까지 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네트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세 명이나 되는 하녀들이 황급히 달려와 아네트를 살폈다. 라펠이 보낸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은 따뜻한 물을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아네트의 피를 닦아내고, 지혈제를 뿌려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충분한 양의 물을 먹인 후 아네트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조금 주무세요, 마님. 피를 많이 흘리셔서 좀 쉬셔야 해요.”
안 그래도 지친 아네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오후인지라 창밖에서 해가 길게 들어왔지만, 스르르 감기는 눈을 뜰 재간이 없었다. 아네트는 늪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빨려들었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독 환했다. 잠에서 깬 아네트는 눈처럼 새하얗게 빛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친 머리가 좀 띵하긴 했지만, 푹 자서 그런지 아까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았다. 오후에 잠들었던 터라 새벽에 깬 모양이었다.
‘목이 마르네.’
아네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마도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일 터였다. 본디 아네트는 어둠을 무서워해서 밤엔 잘 나가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빛이 환해서인지 용기가 생겼다. 그녀는 머리맡에 켜진 등불을 들고 조심조심 복도로 나섰다. 물만 얼른 마시고 돌아와 마저 잘 생각이었다.
휘이잉―
복도의 닫힌 창 너머로 꼭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네트는 그 무시무시한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낮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더라니, 내일은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별생각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아네트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라펠?”
바람 소리에 섞여 라펠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그들은 일단 부부라서 같은 층을 썼지만, 각자의 방은 서로 복도 끝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둡고 컴컴한 복도를 가로질러 라펠의 방까지 가는 길은 무서웠다. 하지만 아네트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라펠이 걱정되기도 했고, 오늘 그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었으니까. 아네트는 신중하게 등불을 들고 한발 한발 내디뎠다.
‘라펠이 괜찮은지 확인만 해 보는 거야.’
라펠은 술을 좋아했다. 특히 밤에는 더 많이 마셨다. 어쩌면 그가 술 때문에 토하거나 괴로워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간혹 토사물이 목에 걸려 질식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라펠도 그러면 어쩌지? 아네트는 어딘지 불안정한 구석이 있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등불을 든 아네트는 조심조심 그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 희미하게 금속 부딪히는 소리와 웬 고함이 얼핏 들려오는 듯했다. 이 늦은 시간에 침실에서 들릴 만한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놀란 아네트가 서둘러 방문에 대고 노크했다.
“라펠, 괜찮아요? 나 아네트예요.”
안쪽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네트는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 문을 노크했지만, 라펠은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두꺼운 문 너머로 희미하게나마 그의 신음이 들려왔으니,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
“라펠, 어디 아파요? 미안하지만 안으로 좀 들어갈게요.”
아네트는 용기를 내어 과감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그녀와 달리, 라펠은 딱히 불을 켜놓진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달빛이 밝은 날이라 커다란 침실의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네트는 두리번거리며 그 안에서 라펠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소파에도, 침대 위에도 그는 없었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제가 혹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 의아해졌다. 만약 구석진 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네트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챙―
돌과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기묘한 마찰음이 작게 들려왔다. 아네트는 침대의 그림자에 가려진 구석 쪽을 돌아보았다. 이 묘한 금속성은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네트는 무서워서 손이 떨렸지만, 용기를 내 등불을 들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라펠?”
다행히 구석에 서 있는 사람은 그녀가 잘 아는 남자였다. 라펠은 밤에는 으레 그렇듯, 셔츠를 걸치지 않은 반라의 모습이었다. 눈에 익은 그 실루엣에 아네트는 반가움을 느끼고 다가서려다 멈칫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라펠은 현재 델티움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검사였고, 기척에 대단히 예민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네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라펠의 손에는 웬 장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는데, 그는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이것을 벽에 대고 휘두르는 중이었다. 아네트가 들은 기묘한 마찰음은 바로 이 칼날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라펠의 기행에 놀란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꽤 요란한 기척이었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벽만 노려보았다. 라펠의 검이 벽을 내리칠 때마다 칼날이 길게 긁히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라펠? 당신 괜찮아요?”
아네트가 덜덜 떨며 물었다. 하지만 라펠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쯤 내리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눈은 평소와 달리 흐릿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넋이 나가 있었다. 그 비정상적인 모습을 본 순간, 아네트는 이와 흡사한 병증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몽유병이구나.’
아네트는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전생에 라펠과 무려 5년간 결혼 생활을 했지만, 그에게 이런 병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펠은 단 한 번도 아네트와 같은 침대에서 잠든 적이 없었다. 그녀와 밤을 보내고 나면, 라펠은 더 볼일이 없다는 듯 쌩하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곤 했다. 선을 긋는 라펠의 냉랭한 태도는 아네트에게 꽤나 상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라펠은 어쩌면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는 대단히 자존심 강한 남자였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아네트는 어쩐지 울컥하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챙그랑―
이 와중에도 라펠은 계속 흐느적거리며 벽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처음엔 어두워서 미처 몰랐지만, 한두 번 되풀이된 일이 아닌 듯했다. 달빛에 드러난 벽은 온통 칼자국 투성이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라펠의 이마는 어느덧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어쩌지?’
아네트는 망설였지만, 이런 상태의 라펠을 그냥 두고 갈 순 없었다. 자신마저 그를 외면한다면 라펠은 밤새도록 이 행위를 홀로 되풀이할 터였다. 아무도 없는 크고 어두운 방에서, 끝없이 긴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 생각을 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라펠…….”
아네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칼자루를 쥔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라펠이 흠칫하며 혼몽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지독히 혼란스러워 보여서, 아네트는 그가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펠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만하고 이리 와요, 라펠. 네? 이쪽으로요. 내 손을 잡고 따라와요.”
아네트는 일단 근처에 있는 소파로 그를 이끌었다. 다행히 라펠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아네트는 그를 자리에 앉히기 전 검부터 받아들려 했지만, 라펠은 단단히 쥔 그것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라펠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로베르트, 네가 여긴 어떻게…… 너는, 넌 분명 최전선 방어 전투에서…… 아니, 아니군. 살아있었던 건가? 맞아, 그랬을 거야. 난 그럴 줄 알고 있었지.”
라펠의 흐릿한 동공은 아네트를 똑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횡설수설하는 말에 아네트는 당혹감을 느꼈다. 지금 라펠의 마음은 몇 년 전 있었던 전장으로 되돌아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피와 함성, 죽음이 만연한 그 산지옥으로 말이다.
라펠은 본디 왕가의 사생아에 불과했다. 현왕 셀그라티스는 밖에서 본 자식이 제법 있었고, 그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라펠은 타고난 검술 천재였고, 전쟁에서 당당히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이 때문에 셀그라티스는 라펠을 직접 친자로 인정하고, 작위까지 내려주었다.
오래된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라펠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여봐란듯이 늘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녔다. 하지만 라펠의 당당한 뒷모습에는 아직 전쟁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괴로워하는 병사 한 명이 숨어있었다.
“적들은 어디 있지? 그들은…… 아아, 그들의 함성이 들려. 저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로베르트. 다 죽여야겠어.”
라펠의 미간이 괴롭게 일그러지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검을 갑자기 치켜드는 바람에 아네트는 하마터면 팔을 베일 뻔했다. 다행히 나풀거리는 실내복의 소매가 조금 베었을 뿐, 피를 보진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네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