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부친에 대한 아네트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푸른 피의 바이에른은 결코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단순히 라펠을 모욕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거라면, 예물을 돌려보낼 필요도 없이 그냥 갖다 버리면 그만이었다.
아네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당분간 부친의 동태를 잘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대체 뭘 꾸미는진 모르겠지만, 이대로 라펠을 계속 괄시하게 놔둘 순 없었다. 오늘 그가 친정에게 당한 대우를 떠올리면 화가 울컥 치밀었다.
‘날 이곳으로 시집 보내 놓고, 정작 라펠은 사위 취급해 주지 않다니. 너무 무책임하잖아!’
라펠은 비록 사생아이긴 했지만, 무려 왕가의 사생아였다. 심지어 현왕 셀그라티스는 라펠을 꽤나 아낀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왕세자인 루드비히가 라펠에게 경쟁심을 느낄 지경이었다. 심지어 루드비히는 정식 왕가의 후계자이고, 라펠은 그저 사생아일 뿐인데도 그랬다.
아마 아네트의 부친이 라펠을 홀대하는 이유도 왕세자의 눈치 때문일 터였다. 루드비히는 분명 다음 왕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가 미워하는 라펠을 어쩔 수 없이 사위로 맞아들이긴 했지만, 그 이상은 선을 긋겠다는 차가운 태도였다.
아네트는 머리로는 제 부친의 입장을 이해했다. 하지만 감정적으론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누명을 쓴 걸 알면서도 쫓아내듯 시집 보내고, 남편인 라펠마저 홀대하다니. 부친에게 화가 단단히 난 아네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 * *
참으로 소란한 오전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검술 수련을 마친 라펠은 땀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저택으로 들어섰다. 어젯밤도 술을 마시다 잠들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영 나빴다. 검을 휘두르는 팔도, 보법을 밟는 다리도 움직임이 시원찮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을 쉬는 건 안 될 노릇이었다.
라펠은 느슨한 사생활과 별도로, 검술 훈련만큼은 단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왕의 사생아가 카네시스 후작이 되기까지, 그를 지켜준 건 오직 검에 대한 재능뿐이었다. 셔츠를 벗고 땀범벅이 된 자신의 몸을 닦아내는 라펠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닿을 듯하면서도 닿질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방향이라도 알려 준다면 그에게 천금이라도 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 술을 마시지 않으면 좀 더 나아질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길!!”
제 성질에 못 이겨 수건을 내팽개친 라펠은 창가로 향했다. 그는 이렇듯 기분이 나쁠 땐, 탁 트인 창을 통해 자신의 저택을 내려다보는 걸 즐겼다. 자신이 직접 얻어낸 카네시스 후작가의 웅장한 저택과 드넓은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탁 트인 정경도 라펠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진 못했다. 매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이 정원에 앉아 있는 작은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카네시스 저택과 마찬가지로 그가 얻어낸 또 다른 전리품, 아네트 바이에른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의 성은 이제 카네시스였다. 그러나 라펠은 그녀를 아직 제 테두리 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역겨운 바이에른 공작가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다만 조금 특이한 부속품일 뿐.
눈을 가늘게 뜬 라펠은 제 손가락만큼 작게 보이는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웬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내 관심을 끌려는 수작인가?’
라펠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방 창가에선 아네트가 앉아 있는 벤치가 썩 잘 보였다. 간교한 바이에른 가의 여자라면 충분히 의도할법한 행동이었다.
연녹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금발을 땋아 올린 아네트는 확실히 시선을 끌 만한 자태였다. 저 새하얀 어깨를 깨물면 연한 분홍색 잇자국이 남겠지. 아네트는 그의 눈에 아주 정교한, 그리고 대단히 값비싼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한낱 사생아 따위인 자신이 절대 가질 수 없을 그런 최고급품 말이다.
라펠은 저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는 게 생소했다. 그러나 정작 아네트 본인은 자신이 이미 카네시스 가에 속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녀가 바이에른 가의 집사와 벌였던 말다툼을 떠올린 라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존중받아 마땅할 내 남편에게 사과하라니. 하여튼 교활하기는.’
라펠은 속으로 아네트를 비꼬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한번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건방진 바이에른 가의 집사는 제 편을 드는 아네트의 모습에 대단히 절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꼴을 떠올리자 속이 다 시원했다.
사실 라펠도 아네트가 그렇게까지 제 편을 들어줄 줄은 미처 몰랐다. 뭐, 어쩌면 보여주기식으로 벌인 가식일지도 모르겠지만 제법 흡족한 대처이긴 했다. 창밖의 아네트를 노려보던 라펠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휘잉―
오늘은 햇살이 그리 강하지 않은 날이었지만, 그 대신 바람이 불었다. 아네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흘러내린 잔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의 금발은 흐린 날엔 꼭 아마실처럼 연한 백금색으로 반짝였다. 시야가 선명해지자, 아까까지 읽었던 책의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 ……회귀는 극히 드문 경험이지만, 일단 한번 회귀하면 전에 없던 특수한 능력이 생긴다. 대표적인 사례가 탕녀 나탈리인데, 그녀는 회귀 후 특수한 페로몬을 내뿜어 남자들을 매혹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이처럼 회귀자들은 크게는 정령술부터, 작게는 각설탕을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별별 희귀한 능력들을 하나씩 얻는다.
아네트는 ‘각설탕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란 대목에서 작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과연 자신의 특수한 능력은 뭘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설마 콧구멍에서 감자튀김이라도 만들어내는 건 아니겠지. 참고로 아네트는 튀김류의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제발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으면 좋겠어.’
불행히도 이 책에는 회귀자들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깨닫게 되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애초에 회귀자에 대한 사례들이 지나치게 적어 알려진 바가 극히 드물었다. 아네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혹 제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앞장을 도로 뒤적였다.
그 순간, 갑자기 거세진 바람이 그녀가 읽던 책을 휙 낚아채 갔다. 그와 동시에 아네트의 풍성한 드레스 자락도 휙 뒤집혔다. 놀란 아네트가 서둘러 자신의 치맛자락을 끌어내리다, 저 멀리 굴러가 버린 책을 발견했다.
“어머, 어떡해!”
벌떡 일어난 아네트가 허둥지둥 책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은 날도 습한데, 혹 바닥에서 얼룩이라도 묻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모처럼 카네시스 후작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인데, 훼손되기라도 하면 라펠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았다.
휘이잉―
변덕스럽게 부는 바람이 그녀의 땋아 올린 머리칼을 헝클었다. 어느새 가느다란 핀에서 빠져나온 머리칼이 절반을 넘어섰다. 가느다란 금발이 흩날리며 자꾸만 시야를 가렸다. 이 때문에 다급하게 책을 주우러 고개를 숙이던 아네트는 그 앞의 기둥을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
“아얏!!”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왼쪽 관자놀이에서 제법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아네트는 한 손으론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자신의 이마를 더듬었다. 부딪힌 곳이 화끈하다 싶더니, 손가락 사이로 미지근한 액체가 주룩 흘러내렸다. 결국은 피를 본 것이다.
‘피, 피잖아?’
아네트는 화들짝 놀랐다. 곱게 자란 아가씨인 그녀는 살면서 다쳐볼 일이 거의 없었다. 평소에 조심성 많은 성격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아네트는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피를 무의미하게 훔쳐내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다행히 곧 책에서 본 지식이 떠올랐다. 이럴 땐 상처 부위를 압박해서 피가 멎도록 지혈해야 했다. 아네트는 애써 침착해지려 노력하며 상처를 꾹 눌렀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야!!”
막상 손에 힘을 주자, 세게 부딪힌 상처 부위가 너무나 아려왔다. 얼얼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아네트는 결국 상처를 지혈한다는 계획을 포기한 채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주르르 흘러내린 피가 떨어지며 드레스를 더럽혔다.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네트는 비틀거리며 저택의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아네트의 눈앞에 웬 단단한 벽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다쳤나? 어디 좀 봐.”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벽이 아니고 라펠이었다. 그가 워낙에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지라, 혼란한 아네트의 눈이 잠시 착각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아네트를 내려다본 라펠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살폈다.
다행히 아네트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하필이면 혈관이 지나가는 곳의 피부가 찢어져서, 출혈이 유독 심해 보이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전쟁터에서 구르다 온 라펠의 입장에선 별 것 아닌 상처였다.
그래도 아네트의 새하얀 얼굴과 연한 금발에 묻은 새빨간 피는 이상하리만큼 불길했다. 라펠은 꼭 절벽에서 등을 밀쳐진 사람처럼 가슴이 섬뜩했다. 아네트가 아파하는 모습은 그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어쩐지 전에도 이런 일을 겪어본 듯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라펠은 이 더러운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부러 신랄한 질책을 내뱉었다.
“하여튼 멍청하기는. 그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지?”
아네트는 입술을 달싹이다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서 있는 기둥에 제 발로 가서 박은 건 사실인지라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피를 보고 놀란 가슴에 라펠마저 저런 식으로 말하니, 괜스레 섭섭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네트는 울지 않으려고 눈을 깜박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본의 아니게 조금 훌쩍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아네트의 이마를 더듬던 라펠의 손이 흠칫 굳어졌다. 아네트는 그가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