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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라펠의 부름에 제라드가 마지못해 입을 열어 대꾸했다.



“……네, 후작 각하.”



“네놈의 어처구니없는 무례를 생각하면 바이에른 가의 명성이 의심스러울 지경이군. 이번엔 내 아내를 봐서 용서하겠지만, 두 번은 없어.”



라펠이 살기 어린 눈으로 제라드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라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라펠은 막 자다 나온 흐트러진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정도의 기백을 뿜어냈다. 꼭 맹수를 코앞에 둔 공포감에 눈앞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제야 제라드는 한발 늦게 라펠의 위험성을 감지했다. 그가 곧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만큼 뛰어난 검사라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몇 년 전까진 전장을 누비는 악귀로 불릴 만큼 잔혹한 도살자였다지.



제라드의 등골이 이내 얼음처럼 서늘해졌다. 그는 라펠의 ‘두 번은 없다.’라는 경고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지금도 형형하게 빛나는 살기 어린 눈은 제라드의 팔다리를 오가며 어느 쪽을 자를지 재 보는 것 같았다. 이를 깨달은 순간, 제라드의 턱이 짧게 경련했다.



“관,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카네시스 후각 각하.”



이번에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난 정중한 인사를 건넨 제라드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이대로 돌아가면 제 주인에게 단단히 혼이 날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라드는 등 뒤에 따라붙는 섬뜩한 시선을 느끼며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급히 재촉했다.



“…….”



이제 이 자리에 남은 건 아네트와 라펠, 단둘뿐이었다. 아네트는 자신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라펠의 시선을 느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아네트는 떨리는 눈망울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미안해요, 라펠. 기분 많이 나빴죠?”



의기소침해진 아네트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녀는 담대한 체했지만, 사실은 너무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전생엔 첫날밤 때문에 앓아누운지라 이런 일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자신의 친정에서 저토록 심하게 라펠을 무시했을 줄이야.



아네트는 이제야 왜 전생에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 라펠이 자신에게 그토록 찬 눈빛을 보냈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아네트가 앓아누운 사이, 친정으로부터 이미 한 차례 모욕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라펠을 냉혈한이라고 미워했던 게 미안했다.



다행히 아네트를 내려다보는 라펠의 눈은 건조했다. 그는 모처럼 빈정대거나 화를 내지 않고, 아네트의 사과를 선뜻 받아주었다.



“딱히 신경 안 써.”



라펠은 방금까지만 해도 제라드의 사지를 분해할 작정이었던 주제에, 태연히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네트가 저 작은 몸으로 열심히 집사를 갈구던 모습을 떠올리니 화가 푸시식 식는 느낌이었다. 사실 좀 재미있기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넘어가 줄 마음은 없었다. 아네트는 비록 그의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뒤에선 또 어찌 행동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바이에른에 대한 라펠의 불신과 증오는 그만큼 뿌리가 깊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네트에게 가시 돋친 말을 툭 내뱉었다.



“바이에른 가는 집사 교육에 신경 좀 써야겠군. 꼴이 저래서야, 원.”



라펠은 어쩌면 제 말을 들은 아네트가 발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이에른 가의 사람들은 오만했고, 특히나 제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네트의 반응은 매우 뜻밖이었다.



“그러게요. 뭐, 알아서들 하겠지요. 이제 전 카네시스 가의 사람인걸요.”



아네트는 저를 버린 부친을 떠올리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전생엔 착한 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번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신이 병상에서 죽을 때까지 얼굴 한번 안 내비친 부친보다야, 투덜대면서도 끝까지 병간호를 해 준 라펠이 훨씬 더 가족다웠다.



그러나 아네트의 대답을 들은 라펠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녀의 앞에서 줄곧 차가웠던 라펠의 표정이 처음으로 허물어지며, 솔직한 표정을 내비쳤다. 이를 본 아네트는 어쩐지 그가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아네트는 불쌍한 표정으로 라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설마 이제 와 저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요? 방금 친정이랑 싸워서 갈 곳도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녀의 농담에 라펠이 대놓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아네트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러나 아네트는 딱히 상처받지 않았다. 어찌 보면 심각한 집안 갈등이 될 수도 있었는데, 라펠이 이 정도로 넘어가 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라드는 여길 왜 온 거지요? 아까 심부름 운운했던 것 같은데.”



잠시 잊고 있었던 제라드의 방문 목적을 떠올린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라펠이 싸늘한 얼굴로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까까지 제라드가 서 있었던 곳이었다. 그곳에는 웬 고급스러운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네트는 대체 저 상자들이 뭔가, 싶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포장지에 금박으로 새겨진 로고가 눈에 띄었다. 델티움의 유명한 공방들 것으로, 대부분이 주얼리 업체들이었다. 그것도 특히 결혼 예물을 메인 상품으로 다루는.



“설마 저것들…….”



아네트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상자들의 모양새가 어째 낯익은 것 같기도 했다. 뭔가를 깨달은 아네트의 뺨이 창백해졌다. 지금 땅 위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저 상자들은…… 아마도 결혼 예물일 터였다. 그것도 무려 라펠이 결혼하기 전, 자신의 친정으로 보냈던 귀한 예물들.



‘지금…… 사위가 보낸 결혼 예물들을 돌려보낸 거야?’



차라리 이쯤 되면 제라드의 무례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친정의 멸시에 아네트는 숨을 헐떡였다. 라펠이 나름대로 신경 써서 보냈을 예물들을 어찌 이리 모욕적으로 돌려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는 보도듣도 못했었다. 때맞춰 입을 연 라펠이 아네트의 의혹에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예물이 눈에 차지 않는다고 퇴짜 놓더군. 바이에른 공작가의 격에 맞지 않는 물건들이라, 어차피 효용성이 없다나? 그러니 나나 가지라는군.”



팔짱을 끼고 선 라펠은 씹어 뱉듯이 비아냥거렸다. 지금 보니 그는 앞섶을 풀어헤친 느른한 차림이었고, 새파란 눈 주위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 잠을 잘 못 이룬 모양이었다. 그런 상태로 아침 일찍부터 이런 소란을 겪었으니, 이쯤 되면 아네트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네트는 단단히 풀이 죽었다. 결혼 예물에 효용성을 따지다니,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아예 작정하고 라펠을 모욕하며 기를 죽이려는 의도가 선연했다. 자신의 부친인 알라만드라면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결혼에 동의하지나 말지.’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슬펐다. 아네트가 쓴 누명 때문에 그녀는 왕세자비가 되지 못했다. 다행히 아네트의 가문에서 뒷수습을 해 주었으나, 이 과정에서 왕가의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한 마디로 약점을 잡힌 셈이었다.



그래서 부친인 알라만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아네트를 버리듯 라펠에게 시집 보냈다. 셀그라티스 왕은 자신의 사생아인 라펠을 아꼈으니까. 왕은 라펠의 부족한 혈통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번듯한 명문가의 영애를 짝지어주고자 했다. 때마침 ‘누명을 쓴’ 아네트가 거기에 당첨된 것이었고.



부친인 알라만드는 이 혼사가 몹시 못마땅했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알라만드는 이 혼사를 주도한 왕에게 직접 항의하는 대신, 만만한 라펠을 모욕하는 걸 선택했다. 아네트는 부친의 이런 점이 참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미안해요, 라펠. 당신을 볼 낯이 없네요. 내가…… 다음부턴 이런 일 없게끔 잘 중재할게요.”



라펠은 제 앞에서 양손을 움켜쥐고 사과하는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성미가 더러운 라펠조차도 누그러질 만큼 절절한 목소리였다.



라펠은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네트 역시도 바이에른 가의 일원이었다. 언제 또 간교하게 태세를 바꿔서 ‘당신이 예민한 거예요.’ 식으로 친정 편을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라펠은 단단히 아네트를 윽박지르고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내뱉을 만한 못된 말들이 생각나질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라펠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아네트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형식적인 경고뿐이었다.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알아서 잘 처리해. 내 말 알아들어?”



“이해했어요.”



아네트는 슬픈 눈으로 돌아서는 라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풀이를 잔뜩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별말 하지 않았다. 등을 돌려 사라지는 라펠의 뒷모습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 정도로 끝난 게 기적이었다. 그나마 아네트가 노골적으로 그의 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마음을 누그러트린 게 틀림없었다.



홀로 남겨진 아네트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방금 친정에 절연 선언을 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후회는 되지 않았다. 어차피 먼저 손을 놓은 쪽은 그녀의 친정이었지, 자신이 아니었다.



‘괜찮아. 잘한 결정이었어.’



아네트는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그녀는 라펠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옳았다. 라펠은 비록 사생아 출신이긴 했지만, 왕가의 인정을 받은 어엿한 귀족이자 전쟁 영웅이었다. 아무리 바이에른 공작가라 해도 라펠을 이렇듯 깔아뭉갤 권한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은 있었다. 아네트는 눈을 깜박이며 속으로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왜 굳이 번거롭게 예물을 돌려보낸 걸까?’



아네트는 어쩐지 부친이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것도 아주 음험한 의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