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제라드는 바이에른 공작가에서도 제법 촉망받는 집사였다. 타국의 귀족 출신인 그는 완벽한 예의범절과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제라드는 좋은 집사였고, 아네트도 어릴 적부터 그의 세심한 보살핌을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내 남편에게 무례한 건 좌시할 수 없어.’
아네트는 입술을 깨물며 현관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눈에 반듯이 서 있는 제라드가 보였다. 그는 겉보기엔 전과 다를 바 없이 우아하고 차분해 보였다. 그러나 아네트는 오랜만에 보는 제라드의 모습에서 단번에 문제점을 찾아냈다.
‘자세가 왜 저러지?’
제라드는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 당당한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별문제 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자세가 저리 꼿꼿해선 안 되었다. 다름 아닌 라펠 카네시스 후작의 앞이었으니까.
설마 제라드가 그 정도 기본 예의도 모를 리 없으니,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이를 본 아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인기척에 민감한 라펠이 가장 먼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이쪽을 본 제라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강녕하셨습니까, 카네시스 후작 부인.”
“제라드.”
제라드는 곧바로 아네트를 알아보고 머리를 공손히 숙였다. 아무래도 제라드의 목뼈는 오직 바이에른 가 사람들 앞에서만 유해지는 모양이었다. 이를 본 라펠의 푸른 눈이 살기를 품고 가늘어졌다. 어디 저 모가지에 칼집을 내도 계속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미 라펠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아네트는 그 살벌한 눈빛에 찔끔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사달이 벌어지기 전, 황급히 목을 가다듬고 제라드에게 물었다.
“제라드,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소란이야?”
“죄송합니다, 부인. 저는 그저 공작님의 명을 이행하러 온 것뿐입니다. 도중에 일 처리가 매끄럽지 않아 폐를 끼쳐드렸다면 사죄드립니다.”
제라드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아네트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긴, 아네트가 결혼한 이상 이게 맞는 호칭이었다. 결혼 후엔 제라드를 본 적이 없어서 잠시 낯설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 아네트가 곧바로 제라드의 말에 반박했다.
“명을 이행하러 온 건 좋아. 제라드, 그대가 언제부터 바이에른 가를 위해 봉사했었지?”
“이제 12년이 되어갑니다, 아가씨…… 후작 부인.”
습관처럼 붙이던 호칭을 뒤늦게 정정한 제라드가 진땀을 흘렸다. 그는 지금 그만큼 아네트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었다. 모든 싸움에선 먼저 흐트러지는 쪽이 지기 마련이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아네트는 본격적으로 제라드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12년이라……. 그 정도 세월이면 예의범절을 배우기엔 충분하지. 근데 내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제라드? 누가 보면 그대가 윗전인 줄 알겠어.”
“부인, 그게 아니오라……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에 오해가 있는 듯한데, 제가…….”
제라드가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서둘러 아네트의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네트는 집사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에 쉬이 넘어가 줄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바이에른 가 출신이었고, 집안의 고용인들 기강을 바로잡는 건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아네트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집사를 매섭게 힐책했다.
“오해는 무슨!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찌 내 남편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가 있어, 제라드? 이제 내가 출가외인이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남편에게도 예를 갖추지 않는 건가?”
말하다 보니 서운함이 폭발할 것 같았다. 아네트는 겉보기엔 제라드를 나무라는 듯했지만, 그녀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라드는 절대 라펠을 얕잡아봐서 멋대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원래 공작가에 드나드는 손님이라면, 평민이라도 정중히 접대할 줄 아는 모범적인 집사였으니까.
‘제라드가 지금 이러는 건 아마…… 아버님이 시켜서겠지.’
그랬다. 아네트의 부친, 알라만드 바이에른은 지독한 혈통 우월주의자였다. 그는 아네트의 결혼 전부터 공공연히 라펠을 무시했었다. 이는 라펠이 왕가의 사생아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왕의 혈통일지언정, 나머지 절반이 어디서 온 줄도 모를 천박한 피라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이런 알라만드의 멸시는 심지어 라펠이 사위가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덕분에 미숙했던 아네트는 친정과 남편 사이를 중재하느라 쩔쩔맸었다. 그렇지만 설마 이런 일까지 있었을 줄이야.
‘너무 치졸하잖아!’
사위로 대우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결혼을 허락했단 말인가. 아네트는 차갑고 이기적인 자신의 부친이 원망스러웠다. 덕분에 아네트의 분홍색 눈에 약간의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차마 등 뒤의 라펠을 볼 낯이 없어서, 애꿎은 제라드만 빤히 노려보았다.
약간 울음기가 섞인 아네트의 얼굴을 본 제라드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이 반쯤 키우다시피 한 아가씨에게 무척 약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부인. 제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사과는 나 말고 내 남편에게 해.”
아네트의 똑 부러진 요구에 제라드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초록색 눈은 고집스럽게 라펠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었다. 제 주인에게 지시받은 바가 있는 한, 제라드는 절대로 라펠에게 사과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제라드는 어떻게든 아네트를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가씨라면 내 편을 들어주실 거야. 잘만 말해본다면…….’
제라드가 모셨던 아가씨는 비록 영리했지만, 마음이 좀 약한 편이었다. 제라드는 그 점을 한번 파고들어 볼 요량이었다. 지금은 남편이 보는 앞이라 제라드를 꾸짖는 척하지만, 알고 지낸 세월은 이쪽이 훨씬 길었다. 그러니 한번 해 볼 만한 시도였다.
제라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그게 아니오라, 부인. 저는 바이에른 공작가의 정식 용무로 방문한 것입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제 행동에는 그 어떠한 ‘개인적인 의사’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바이에른 공작가의…….”
제라드의 유창한 변명을 듣던 아네트는 생각했다. 역시나 부친이 시켜서 한 짓이 맞았다. 알라만드는 사위가 된 라펠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아네트를 ‘시집보냈다.’라고 생각하기보단, 라펠에게 ‘버렸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그러니 라펠을 이리도 무시하는 거야. 그에게 시집간 딸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아네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고작 집사를 시켜 어엿한 귀족인 사위를 모욕하게끔 하다니. 이 때문에 화난 라펠이 그녀를 냉대하더라도, 자신은 알 바 아니란 이기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실제로 아네트가 전생에 최악의 결혼 생활을 할 때도 그녀의 부친은 이를 방관했었다. 그녀가 기어이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까지 말이다. 아네트가 마지막으로 부친을 본 건 자신의 결혼식장이 유일했고, 그마저도 부친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참석한 것이었다.
아네트는 이로써 자신이 부친에게 버려졌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왕세자비가 되지 못한 그녀는 알라만드에게 있어서 아무 쓸모도 없는 모양이었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혈관에 붉은 피 대신 새파란 피가 흐를 냉혈한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버려진 딸도 이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시간이었다.
‘라펠은 내 남편이야. 이제 그가…… 내 가족이야.’
그랬다. 라펠은 자신의 남편이었고, 그녀는 응당 남편을 보호해 줄 의무가 있었다. 비록 전생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를 터였다.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정한 아네트의 분홍색 눈동자가 고고하게 집사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제라드. 그럼 어디 네 입으로 말해 봐. 내 혈통엔 어엿한 바이에른의 피가 흐르고, 혼사를 치른 지금도 나의 중간 이름에는 바이에른이 들어있지. 그럼 네 눈앞에 서 있는 지금의 나는 네 상전인가, 아닌가?”
예상 밖으로 단호한 아네트의 태도에 제라드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고고하게 치켜든 턱과 서늘한 눈초리를 한 아네트는 그 누구보다도 바이에른다웠다. 이를 본 제라드는 그녀가 결코 타협해 줄 마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부인께선 언제나 바이에른이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겁니다. 저는 바이에른 가에 충성을 다하는 몸이며, 그 고귀한 혈통을 위해 헌신하는 자입니다.”
제라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네트가 원하던 답을 주었다. 어차피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아가씨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보며 활짝 웃던 어린 아네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제라드는 늘 속절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이제 존중받아 마땅할 내 남편에게도 사과해 주면 좋겠군.”
아네트는 보란 듯이 라펠에게 팔짱을 척 끼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제법 야무지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라펠은 이런 아네트의 모습이 다소 낯설었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살아생전 내 편을 드는 바이에른을 보게 될 줄이야.’
라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늘 혼자였고, 밑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혼자 힘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다고 여겼다. 설령 친부인 셀그라티스 왕조차 만약 라펠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그를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게 라펠이 아는 비정한 세계였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갑자기 아네트 바이에른이란 천재지변이 나타났다. 그녀는 라펠이 자신의 스타일대로 문제를 ‘직접’ 해결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 대신 저 가녀린 체구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친정에서 보낸 집사를 손수 혼쭐내었다. 어디서 감히 제 남편에게 무례를 저지르냐면서 말이다.
이건 라펠이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 본 타인의 ‘보호’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지금 제 어깨에나 간신히 닿는 여자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라펠의 출세를 가장 방해하고, 앞장서서 멸시했던 바이에른 가문의 딸에게! 이는 라펠에게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상한 여자.’
라펠은 힐끗 아네트를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라드가 보였다. 라펠이 보기에 이 시건방진 집사는 아네트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더 잘 아는 법이었으니까.
제라드의 오만방자함은 그 뒤에 있는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라펠을 향한 적개심은 제라드 본연의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제라드는 낭패 어린 얼굴을 하면서도 기어이 라펠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제 아가씨의 명에 따라 공손히 사죄했다.
“제 무례에 대해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카네시스 후작 각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라펠은 싸늘한 눈으로 머리 숙인 제라드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건방의 대가로 반병신을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처가’에서 보낸 고용인을 그렇게 만들면 세간에서 뭐라 떠들진 안 봐도 뻔했다. 아네트는 세상에 다시 없을 가엾은 희생자, 자신은 무자비한 도살자로 묘사되겠지.
그런 소리를 듣느니 한 번쯤 자비를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라펠은 솔직히 아네트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체면을 세워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내로서 훌륭하게 처신했으니, 그 또한 남편답게 부인의 입장을 배려해 줘야 했다.
마음을 정한 라펠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거기, 이름이 제라드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