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라펠이 뛰쳐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던 아네트는 힘없이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라펠은 꼭 자신과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 진저리를 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차피 그의 매정한 태도에는 익숙했지만, 몸을 섞은 직후라 그런가. 오늘따라 유독 더 섭섭하긴 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라펠은 날 싫어했지.’
아네트는 곰곰이 전생을 되돌아보았다. 얼마나 자신을 싫어했으면 5년 내내 단 하루도 함께 잠든 적이 없을까. 라펠은 매번 관계를 끝마치기 무섭게 쌩하니 가 버렸다. 그런 남자가 고작 한 번 관계했다고 다정해질 리 없었다.
아네트는 너무 우울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까짓것 죽었다 살아 돌아온 몸인데, 남편이 좀 쌀쌀맞다고 해서 그게 뭐 대수겠는가. 애초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을지니,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게 편했다.
사실 아네트의 가장 큰 적은 라펠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회귀해서 좀 나아졌지만, 전생엔 어지간히 섬세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는 쉽게 그녀의 건강을 해쳤고, 종국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병사했다. 아네트는 두 번 다시 그런 죽음은 사절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전생보다 나아진 것들도 있어.’
이를테면 방금 한 첫 관계가 그랬다. 비록 라펠이 여기저기 물고 빨아서 몸이 울긋불긋하긴 했지만,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전생의 첫날밤이 지나치게 혹독해서 3일간 앓아누웠던 거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아네트는 아주 느리게나마 자신의 미래를 조금씩 바꿔 나가고 있었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아네트는 이불을 끌어안고 마음을 다졌다. 이번 생엔 꼭 누명도 벗고, 가능하다면 라펠과 더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라펠이 정 밉살스럽게 군다면, 그와 이혼하는 것도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할 것 같았다. 이제 아네트는 전생의 수동적인 여자가 아니라, 죽었다 다시 살아난 기적의 당사자였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꽉 닫혀 있었던 침실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네트는 놀라서 이불로 몸을 가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열린 문 틈새로 나타난 건 아네트가 방금 전까지 이혼을 고려하던 남자였다.
“라펠?”
드래곤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네트는 내심 찔끔했다. 라펠은 묘하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이 때문에 아네트는 ‘혹시 내 생각이 들리기라도 했나?’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고민을 잠깐 했다.
당연하게도 라펠은 그녀의 생각을 듣지 못했다. 애초에 그가 되돌아온 건 순전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성큼성큼 아네트에게 다가온 라펠이 협탁에 뭔가를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아네트는 저게 뭔가, 싶어서 의아한 눈으로 협탁 위를 바라보았다. 라펠이 내려놓은 건 웬 납작한 대접이었다.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뜨거운 물이 담긴 모양이었다. 대접의 테두리에 비죽이 걸쳐져 있는 부드러운 천도 보였다.
‘어머.’
이를 본 아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라펠이 자신을 위해 가져다준 걸까? 그녀의 어리둥절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라펠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가 갑자기 손을 불쑥 내민 탓에, 아네트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맞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네트의 코앞에서 멈춘 그 커다란 손에는 물컵이 하나 들려 있을 따름이었다.
“이, 이게 뭐예요? 라펠?”
라펠의 흉흉한 기세에 놀라 반사적으로 물컵을 받아든 아네트가 물었다. 그러자 이를 악문 라펠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이 대꾸했다.
“아프다며.”
그제야 아네트의 눈이 물컵 밑바닥에 가라앉은 새하얀 가루약을 발견했다. 아마도 진통제를 타 온 모양이었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라펠의 흉흉한 얼굴만 보면 진통제 대신 독약이라도 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생각지도 못한 배려가 고맙긴 했다. 라펠의 처음 보는 면에 놀란 아네트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펠은 미간을 찡그리며 내심 초조하게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왜 이딴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네트의 ‘아프다.’라는 하소연은 이상하리만큼 신경을 긁었다. 왜 저 멀쩡한 여자가 저렇게 병약해 보이는 건지.
그래서 기껏 진통제까지 타다 줬더니, 아네트는 물컵을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자신이 떠다 준 것은 마시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역시 쓸데없는 짓을 했군.’
라펠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짜증스럽게 아네트의 손에서 물컵을 도로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아네트가 한 발 더 빨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네트가 물컵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라펠.”
라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든 아네트가 사르르 웃었다. 곱게 접힌 그녀의 속눈썹은 금빛이었고, 그 밑에서 꽃잎처럼 고운 분홍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반짝였다. 꼭 향기가 날 것처럼 어여쁜 미소였다.
이를 본 라펠은 역시 바이에른 가의 여자는 요망하다며 진저리를 쳤다. 허리에 안겨드는 팔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라펠은 얼른 이 거북한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휙 돌렸다. 해 줄 건 다 해줬으니 나머진 아네트가 알아서 할 터였다.
라펠은 혹 그녀의 입에서 또 아프네, 어쩌네 하는 소리가 나올까 두려웠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라펠이 쌩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그 매정한 뒷모습에 대고 아네트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자요, 라펠!”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네트는 라펠이 가져다준 진통제를 먹은 후, 대접으로 손을 뻗었다. 따뜻한 물에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다리 사이를 닦아내자 통증이 훨씬 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연히 아네트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설마 라펠이 이렇게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아네트는 빙그레 웃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라펠과도 늘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전생에서 라펠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꽤 열심히 병간호를 해 주었다. 아네트가 아예 병상에 드러누운 후에는 시비를 거는 일도 그만뒀다. 라펠은 전쟁을 겪어 본 사람이라 그런지, 타인의 신체적인 고통에 민감했다.
몸을 어느 정도 닦아낸 아네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진통제의 효과가 돌기 시작해서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홀로 남은 침대는 여전히 크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네트의 막연히 어둡기만 했던 미래에도 조금씩 희망이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 * *
불행히도 아네트의 낙관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네트는 어쩐지 밖이 소란스럽다고 느꼈다. 뭔가를 어수선하게 나르는 소리와 말다툼하는 소리, 중간중간에 라펠의 고함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네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여기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해 볼 때, 현관인 것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네트는 나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제 카네시스 후작가의 안주인이었고, 저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란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바닥으로 내려와 몇 걸음 걷자 다리 사이가 조금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본디 왕세자비가 되려고 혹독하게 교육받은 아네트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재빨리 옷차림을 가다듬은 아네트는 초조하게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아네트는 방을 나서면서 혹 전생에도 이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게 딱히 없었다. 왜냐하면 전생의 아네트는 이때 앓아누워 있었으니까.
라펠은 신혼 초엔 그녀를 몹시 싫어했다. 당연히 오해를 품은 첫날밤은 지독했고, 아네트는 그 여파로 단단히 앓았다. 그때의 자신은 꼭 곰처럼 미련해서 ‘아프지 않게 해 줘요.’라는 쉬운 말 한마디를 못했다. 그렇게 말하면 왠지 자신이 지는 것 같아서 오기가 앞섰다.
쓸데없는 고집의 대가는 3일간의 몸살이었다. 병상에서 그녀가 핼쑥해진 얼굴로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본 것은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라펠의 얼굴이었다. 그는 꼭 아픈 아내를 원수라도 보듯이 굴었다. 저 때문에 앓아누운 아네트에게 일말의 미안함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땐 정말 서러웠었는데…….’
싫은 기억이 떠올라서 아네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부터 자신도 본격적으로 라펠을 미워했다. 자신을 믿지 않아 아프게 한 주제에, 반성하긴커녕 증오를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라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의 그는 꼭 아네트의 부친만큼이나 차가웠고, 심지어 그보다 더 잔인했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첫날밤을 보냈다. 라펠은 여전히 밉살스럽게 굴었지만, 한편으론 아네트의 편의를 봐 주었다. 덕분에 아네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일어났고, 지금의 소란을 눈치챌 수 있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네트의 심장은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두근거렸다. 자연히 현관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복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저 멀리서 라펠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내가 보낸 예물이 고고하신 바이에른의 눈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말인가?”
라펠은 이미 한 차례 고함을 실컷 지른 모양이었다. 지금은 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따져 묻고 있었지만, 아네트는 그 안에 담긴 흉흉한 살기를 감지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라펠의 기분이 최악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성질에 여태 칼부림이 안 난 게 용할 지경이었다.
“송구합니다, 카네시스 후작 각하. 각하께서 보내주신 예물은 참 훌륭합니다만…… 제 주인 되시는 분께선 오직 최상등품에만 익숙하신 분이십지요. 부디 타 가문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견해의 차이를 너그러이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고한 목소리를 들은 아네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가 잘 아는 목소리였다. 외국의 악센트가 약간 남아 있는 이 고상한 말투는 친정의 집사, 제라드가 틀림없었다. 금발에 온유한 인상을 한 제라드는 꽤 좋은 집사였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아네트는 곧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 제라드가 했던 말이 뇌리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라드가 좀 이상한데. 왜 라펠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예의 없잖아.’
그랬다. 친정인 바이에른 가의 집사, 제라드는 지금 대단히 무례한 말투로 라펠을 깔아뭉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