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라펠은 소스라치게 놀란 아네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기쁜 듯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간교한 바이에른다워. 화를 돋우는 덴 뭐가 있군.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어.”
그 말을 들은 아네트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이번엔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 착각인 모양이었다. 역시 라펠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였다. 충격 때문에 희게 질린 아네트의 낯빛을 본 라펠이 차갑게 웃었다.
“좋아, 오늘은 그대가 이긴 셈 치지. 첫날밤은커녕 꼴도 보기 싫으니 어디든 가 버려.”
부서진 문에서 손을 거둔 라펠이 무정하게 돌아섰다. 아네트는 그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여튼 저 성질머리 하나는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딱히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언젠간 반드시…… 이 누명을 벗고야 말겠어.’
그리고 라펠에게도 지금의 오해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어두운 복도를 맨발로 걷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생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여자로 살다 죽지는 않을 테니까. 아네트는 애써 용기를 끌어모으며 자꾸 수그러드는 고개를 치켜세웠다.
* * *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첫 결단은 빨랐다. 카네시스 후작가에 불려온 의원은 30대 초반의 젊은 남성이었다. 윤기 흐르는 밤색 머리에 짙은 눈썹을 한 의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아네트에게 되물었다.
“네? 지금 무슨…… 원하시는 진료가 뭐라고 하셨지요?”
의원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공은 당장이라도 아네트가 자신의 말을 철회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그러나 이미 결단을 내린 아네트는 차분하게 방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 여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검사가 따로 있다고 들었네. 부인과 쪽의 검사라고 하던데. 혹 아는 의원이 있으면 소개해 줄 수 있나? 이왕이면 여자 의원으로.”
아네트는 겉보기엔 침착해 보였지만, 내심 부끄러움에 떨고 있었다. 의자의 양 손잡이를 움켜쥔 아네트의 손에 새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없던 일로 하고 의원을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아네트를 싫어하는 라펠은 백날 천날 호소해도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의원을 통해서라도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가만히 손 놓고 있는다고 해서, 누군가 자신의 누명을 대신 풀어주진 않았다. 그게 아네트가 배운 전생의 교훈이었다.
아네트는 속으로 시름시름 곪아갔던 지난 5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를 되풀이하느니, 차라리 잠깐의 부끄러움을 참는 게 훨씬 나았다.
“저어, 마님. 정 그러시다면…….”
아네트가 자신의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침묵하던 의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아네트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네트가 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던 순간, 갑자기 응접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히익!!”
예상치 못한 큰 소리에 놀란 의원이 비명을 질렀다. 전형적인 엘리트 같은 얼굴과 달리, 의외로 겁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네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뜻밖의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라펠?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듯, 라펠은 흰 셔츠에 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츠 너머로 잘 단련된 근육이 두드러져 보였다. 큰 키에 단단한 체구만 봐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라펠은 심지어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날이 새파랗게 선 그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이며 아네트의 앞에 선 의원을 향했다. 그는 숫제 으르렁거리듯 살벌한 목소리로 의원에게 물었다.
“검사는 이미 한 건가?”
“네, 네? 무슨, 무슨 검사를…….”
잔뜩 겁을 집어먹은 의원이 덜덜 떨며 되물었다. 그러자 라펠의 얼굴에 한층 더 흉흉한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분기를 애써 참는 듯 이를 악물며 의원을 윽박질렀다.
“그 빌어먹을 검사 말이야! 이미 했냐고!!”
“아뇨! 안 했습니다!! 진, 진짜입니다!! 맹세컨대 저는 부인께 손끝 하나도…….”
그제야 라펠이 뭘 묻는지 깨달은 의원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의원은 어찌나 떨고 있었던지 하마터면 말하다 혀를 깨물 뻔했다. 아네트는 저러다 그가 경기라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의원의 얼굴에서 진실을 본 라펠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곧장 의원의 멱살을 잡아끈 라펠이 그를 응접실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어찌나 세게 닫았는지 방 전체의 공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하여튼 성질머리 하곤. 저렇게 문을 쾅쾅 닫아대니, 조만간 저택의 문이란 문들은 죄 남아나지 않을 듯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어제 자신의 침실 문도 부숴버렸지. 성질 더러운 남편과 사는 데 익숙해진 아네트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라펠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라펠? 뭐가 잘못됐나요?”
라펠은 대답 대신 아네트가 앉아 있던 의자의 양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이제 아네트는 일어서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무슨 토끼몰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라펠은 그녀를 추궁하기 전에 도주로를 차단해 놔야 속이 편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잘생긴 얼굴이 한기를 품고서 아네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화가 난 라펠이 그녀에게 대뜸 따져 물었다.
“의원까지 불러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이번엔 진단서라도 위조할 계획인가? 그거참 바이에른다운 교활한 수법이로군. 하는 짓이 아주 여간내기가 아니야.”
예전의 아네트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모멸감에 입술을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비참함을 라펠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말다툼을 시작했겠지. 아네트는 꼭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라펠. 어제 말했듯이 당신이 정 저를 믿지 못하겠으면, 의학의 힘을 빌려서라도 결백을 증명하려는 것뿐이에요. 혹시 제가 증명서를 위조할까 봐 걱정된다면 당신이 직접 의원을 고르세요.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요.”
“정말 검사를 받을 작정이었다고? 온실 속 화초 같은 그대가, 저딴 의원 나부랭이에게 손수 치마를 걷고 다리를 벌려 그 치욕스러운 검사를 받겠단 말인가? 퍽이나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하는군.”
라펠의 빈정거림을 들은 아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도 아니면서, 의원의 진찰을 받겠다 해도 의심하다니.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라펠은 심각한 인간 불신병이 있었다. 저 정도면 정말로 병이었다.
보아하니 라펠은 자신이 남자 의원에게 진료받겠다고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인이랍시고 자신이 딴 남자 앞에서 다리를 벌리지 못하게 득달같이 쫓아오다니, 이거 감동을 받아야 하는 부분인 걸까. 분노조절장애 남편을 둔 아네트는 고심했다.
라펠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성마른 인간이었지만, 다행히 아네트를 해치진 않았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인지 아네트는 전처럼 라펠이 두렵거나 증오스럽진 않았다. 이번 생도 또 라펠과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는 없으니, 이참에 그를 좀 길들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아네트가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펠.”
라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네트는 그의 목덜미에 천천히 팔을 둘렀다. 라펠은 몸을 빼진 않았지만,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는 표정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눈을 깜박이며 라펠을 올려다본 아네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속눈썹을 내리깔며 수줍게 속삭였다.
“의원에게 보이는 게 안된다면… 당신이 직접 확인해 주지 않을래요?”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로 타오르던 라펠의 눈동자가 허공에 딱 멈추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네트에게 뭔가를 쏘아붙이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정작 그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아네트의 과감한 발언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네트도 자신의 낯선 모습에 충격을 좀 받긴 했다. 그녀는 원래 보수적인 여성이었고,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당황하는 라펠의 표정을 보자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네트는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들어 그에게 속살거렸다.
“우린 부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당신이 확인해 주세요. 의원 대신에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벌려서 눈으로 직접…….”
불행히도 아네트는 하던 말을 다 끝맺을 수 없었다. 별안간 라펠이 허리를 숙여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탓이었다. 고작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아네트의 침실이었고, 그는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며 곧장 침대로 향했다.
“꺄악!”
침대 위에 엎어진 아네트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펠은 상체에 걸친 셔츠를 반쯤 찢듯이 벗어던지느라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이 곧바로 하의를 벗자, 벌써 힘을 받아서 꺼떡거리는 성기가 튀어나왔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라펠이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아네트는 곧 다가올 일을 짐작하고 조금 겁을 먹었다. 전생의 첫날밤은 지독하리만큼 아팠는데, 이번에도 그럴까 봐 겁이 났다.
라펠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곧바로 그녀의 옷을 벗겨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심하려고 애쓰던 그 손에 이윽고 조바심이 더해졌다. 거친 탈의에 옷의 솔기가 투둑―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지레 놀란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울먹이며 라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라펠…….”
“왜, 직접 확인하라더니? 설마 이제 와 그만두자고 할 작정은 아니겠지.”
라펠이 차갑게 빈정거리며 그녀의 마지막 속옷을 벗겨냈다. 이제 아네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이대로라면 또 전생처럼 지독하게 당할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