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라펠이 고민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아내는 모든 게 참 작았다. 손발도 인형처럼 아담했고, 섬세한 흰 얼굴도 그랬다. 이 때문에 라펠은 그녀를 대하는 게 조금 어려워졌다.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지만, 검으로 단련된 라펠의 악력은 충분히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네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아네트는 냉큼 라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최대한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오늘은 먼저 방으로 돌아갈게요, 라펠. 당신은 지금 좀 취한 것 같아요. 만약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내일 날이 밝았을 때 맨정신으로 이야기해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물 흐르듯 유려하게 말을 마친 아네트는 내심 뿌듯해졌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이성적으로 잘 빠져나온 것 같았다. 전생에는 왜 이렇게 못했던 걸까? 이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라펠과 얼굴을 붉히며 싸웠었다.
‘그땐 정말 지독하게 싸워댔었지.’
아네트는 돌아서며 조금 아쉬워졌다. 만약 그때도 지금처럼 잘 대처했었다면, 서로 상처가 덜했을 텐데. 하지만 라펠을 등 뒤에 두고 방심하는 건 너무 경솔한 짓이었다. 라펠은 그녀를 순순히 보내줄 만큼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아네트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모든 신경이 쭈뼛 곤두서며 위험을 알려왔다. 그건 꼭 뒤에서 덮쳐드는 맹수를 감지한 초식 동물 같은 반응이었다.
아네트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어느새 문에 밀착되다시피 달라붙은 상태였고, 등 뒤에선 라펠이 그녀를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아네트. 오늘은 신혼 첫날밤이고, 그대는 결코 내게서 도망갈 수 없어.”
귓가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는 꼭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들렸다. 말을 마친 라펠이 혀를 내밀어 그녀의 둥근 귓바퀴를 질척하게 핥아 올렸다. 그 순간, 아네트는 위기를 감지하고 파르르 떨며 도망치려 했다.
“어딜 가려고.”
그러나 뒤에서 그녀를 가둔 팔은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네트는 문과 라펠의 몸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후였다. 어느새 그의 손이 아네트의 얇은 슈미즈 뒤쪽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악력 때문에 옷이 반쯤 찢어지며, 그녀의 등 중앙까지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아……!”
아네트는 얼른 흘러내리려는 자신의 슈미즈 앞쪽을 움켜쥐었다. 가까스로 노출은 막았지만, 불행히도 등 쪽은 새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라펠이 꼭 토끼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네트의 뒷목을 꽤 세게 깨물며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연약한 목덜미를 물린 아네트는 숨을 헐떡이며 멈추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녀의 우아한 목과 등으로 거친 숨결이 쏟아져 내렸다. 이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솜털이 쭈뼛 곤두서며 몸이 덜덜 떨려왔다.
뒤에서 뻗어 나온 라펠의 손이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끔 어깨를 내리눌러 문에 더 바짝 밀착시켰다. 그는 그 상태로 아네트의 쭉 뻗은 등줄기를 따라 입술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우아하게 도드라진 그녀의 날개뼈 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는 감촉이 유독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쉬이, 가만히 있어야지? 싫어도 그대는 이제 내 아내니까 말야.”
라펠이 그녀의 드러난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이로 자근자근 깨물며 빨아들였다. 귀 안쪽을 후벼 파는 혀끝 때문에 젖은 소리가 그득하게 차올랐다.
아네트는 몸을 움츠리며 자꾸 흘러내리려는 슈미즈 자락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렇게나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주제에, 등과 목덜미에 와 닿는 그의 입술은 더없이 뜨거웠다.
라펠이 만약 첫날밤을 ‘진짜로’ 치르길 원한다면 어쩌지? 차가운 문에 몸을 바짝 붙인 아네트는 겁에 질렸다. 전생의 첫날밤은 정말 지독하리만큼 아팠었다. 아네트는 부디 라펠이 잠깐의 변덕으로 지분거리다, 이 행위를 끝내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그러나 목덜미에 쏟아지는 키스는 점점 더 뜨거운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아네트, 아네트. 내 고결한 아내. 부디 그 입으로 직접 말해 봐. 그대는 이미 루드비히 왕세자에게 몸을 내줬나? 응?”
라펠이 입술을 내리누르는 중간중간에 들뜬 신음을 섞어 그녀를 추궁했다. 그는 여전히 아네트의 억울한 누명을 굳게 믿는 눈치였다. 그녀가 왕세자비가 되고 싶어서 루드비히에게 몸을 내던지고, 경쟁자를 해하기까지 했다는 그 누명을.
아네트는 그 가당치 않은 오해에 수치심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회귀 시점이 차라리 ‘그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아네트는 자신이 아주 잘 아는, 그 악의적인 함정을 제대로 맞받아쳤을 텐데. 그리고 자신의 미래도 아주 많이 달라졌을 터였다.
그러나 신은 불행히도 사건 직후로 아네트를 돌려보냈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린 아네트는 그저 몸을 떨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할 따름이었다.
“난 그런 적 없어요, 라펠. 루드비히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당신이 처음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저 얼토당토않은 추궁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라펠이 첫날밤을 치르길 원한다면, 더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다. 어리석은 침묵의 대가는 무척이나 아픈 첫날밤의 고통으로 돌아올 게 틀림없었으니까.
하지만 라펠은 그녀의 힘겨운 고백을 이번에도 웃어넘겼다. 악의 어린 새파란 눈을 번뜩인 라펠이 조소했다.
“역시 바이에른은 거짓말도 완벽하게 하는군. 가문에서 그대를 그리 교육시키던가? 제법이야.”
아네트의 곧은 등줄기를 따라 살짝살짝 깨물던 라펠의 치아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그는 꼭 아네트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그녀의 여린 살결에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이에 놀란 아네트가 파르르 떨면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믿어 줘요, 라펠. 난 정말로…….”
“저런. 멋대로 돌아보면 안 되지.”
라펠은 잔인하게도 그녀의 고개를 다시 앞쪽으로 잡아 돌렸다. 아네트와는 얼굴도 마주 보기 싫다는 무정한 태도였다. 차가운 벽과 마주한 아네트는 절망 때문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번 생에선 반드시 달라지고 싶었는데, 왜 라펠은 저리도 자신을 싫어하는 걸까.
아네트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패닉과 절망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좋은 해결책을 떠올린 아네트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등 뒤의 짐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러 나긋나긋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증명할 수 있어요. 나는 한 번도 루드비히에게 몸을 던진 적이 없어요, 라펠.”
그 순간, 라펠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었다. 아네트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그의 팔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라펠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래서 아네트는 한층 더 간곡하게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정말이에요, 라펠. 우리 이렇게 할까요? 내일 날이 밝으면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의원을 부르세요. 그리고 그에게 아주 자세한… 진찰을 받을게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내 말을 믿겠어요?”
아네트는 억울함을 감추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제안했다. 대체 그놈의 누명이 뭐길래 환생을 한 지금도 이렇게 변명을 해야 하는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다행히 델티움의 현 의술은 아네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났으니, 그나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전생에도 진즉에 의원을 불렀으면 좋으련만, 아네트는 차마 수치심 때문에 왕진을 받을 결심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녀는 라펠의 오해 속에서 지독하리만큼 고통스러운 첫날밤을 맞이했다. 아네트의 출혈이 어찌나 심했던지, 라펠이 도중에 행위를 멈추고 의원을 부르러 직접 뛰쳐나갔을 정도였다.
‘그 끔찍한 첫날밤을 두 번 다신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아네트는 결의를 다지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다행히 라펠은 그녀의 확신 어린 어조에서 뭔가를 느낀 듯했다. 행동을 멈춘 그가 아네트의 매끄러운 등줄기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라펠의 새파란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네트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만약 그가 또 아네트의 얼굴을 잡아 돌린다 해도, 까짓것 백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돌아보면 그만이었다. 아네트는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할 권리가 있었고, 라펠은 그걸 막을 수 없었다.
“라펠……?”
마주 본 라펠의 얼굴은 차가웠다. 칠흑처럼 검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꼭 피가 흐르지 않는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오직 날카로운 콧날 밑으로 자리한 붉은 입술만이 그의 인간성을 증명했다. 그 육감적인 입술이 찬웃음을 머금는가 싶더니, 별안간 귓전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쾅!
“꺄악!!”
아네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뭔가 후두둑 떨어져서 고개를 숙여 보니, 부서진 문의 잔해였다. 화가 난 라펠이 주먹을 휘둘러 문을 부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