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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네트는 진한 키스의 여파로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뺨을 식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얼굴은 점점 더 달아오를 뿐이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빨개진 아네트를 보고 귀엽다는 듯 웃자, 더욱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네트는 결국 고개를 드는 걸 포기하고 자신의 부케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숨었다.



코앞에서 아네트를 지켜보던 라펠은 그 필사적인 모양새가 퍽 귀엽다고 느꼈다. 그녀의 태도는 어쩐지 굴속으로 파고드는 토끼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인형처럼 조용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느낌이 좀 색달랐다. 라펠은 그녀의 우아하게 틀어 올린 금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새빨개진 걸 본 순간, 결국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하하!”



크게 웃은 라펠이 다정한 체하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네트가 이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으니, 그 또한 장단을 맞춰 줄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보는 눈이 많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어깨에 맞닿은 그의 가슴이 웃음으로 약간 들썩이는 걸 느꼈다. 더욱 창피해진 그녀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종종걸음으로 퇴장했다.



눈앞에서 펼쳐진 진한 키스 장면 덕에 결혼식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하객들은 전생과 달리, 이번엔 아네트와 라펠이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분명 같은 결혼식인데도 불구하고 평가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피로연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아네트의 두 번째 결혼식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부친인 알라만드는 비록 좀 못마땅해 보이긴 했지만, 사위가 된 라펠에게 아무 비난도 던지지 않았다. 모든 게 정말로 잘 풀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행사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신랑과 신부의 ‘첫날밤’이었다.









* * *









‘라펠은 언제 올까?’



아네트는 가물가물한 눈을 비볐다.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결혼식이란 거사를 치른지라 너무나 피로했다. 여기에 따뜻한 물로 목욕까지 끝마쳤으니, 잠이 솔솔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몸에 가운만 걸친 라펠이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직까지 물기를 머금은 그의 흑발과 탄탄한 가슴팍이 불빛 아래 색정적으로 빛났다. 라펠의 새파란 눈동자가 꼭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똑바로 그녀를 향했다.



“아직 안 잤군.”



라펠은 워낙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 그가 방안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갑자기 침실이 비좁게 느껴졌다. 반라에 가까운 그는 꼭 한 마리 커다란 흑표범처럼 위압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네트는 어쩐지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살그머니 눈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묘하게 순진한 아네트의 대답에 라펠의 눈빛이 좀 더 짙어졌다. 별 것 아닌 대답인데도 이상하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고요한 방 안에 단둘이 남은 남녀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행히 먼저 이 어색한 침묵을 깬 쪽은 라펠이었다.



“이리 와, 술이나 한 잔 하지.”



뜻밖의 제안에 눈을 깜박이던 아네트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결혼식이 잘 끝나서 그런지, 라펠의 반응도 전과는 달랐다. 그는 전생에는 술 따윈 권하지도 않았다. 홀로 잔뜩 취해서 나타난 라펠은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달려들어…… 아니다, 괜히 아픈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아네트는 차분하게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라펠이 병을 기울여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투명한 황금빛 액체에선 향긋하면서도 독한 냄새가 풍겼다. 라펠이 즐겨 마시는 고급술이었다. 아네트의 잔을 반쯤 채워준 라펠이 시험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쯤은 마실 줄 알겠지?”



아네트는 라펠과 달리 술을 그리 즐기진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 라펠이 호의적으로 나오는데,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아네트는 그가 권하는 대로 자신의 잔에 찰랑이는 술을 쭉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꼭 불이 붙는 것처럼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벌써 잔을 비운 라펠이 그런 아네트를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네트의 작은 얼굴과 순한 눈매, 발그레한 뺨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윽고 그 눈이 멈춘 곳은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그녀의 입술 위였다.



그 순간, 라펠은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아네트에게 어떤 종류의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자신을 사생아라고 멸시하는 바이에른 가의 여자에게 발정하다니. 라펠의 푸른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런 라펠의 변화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아네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화끈 달아오르는 뺨을 매만졌다. 그리고 라펠을 바라보다 이내 흠칫했다.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라펠과 이미 결혼 생활을 해 본 아네트는 금방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펠은 지금 심사가 꽤 뒤틀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펠이 붉은 입술을 잡아당기며 못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술도 들어갔으니 솔직하게 말해 봐.”



“네? 그게 무슨…….”



불길한 예감을 느낀 아네트가 애써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라펠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잔인하게 속삭였다. 그녀를 상처 주고 싶어하는 의도가 역력한 어조로.



“아직도 그대가 왕세자비가 될 수 있다고 믿나?”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이는 아네트가 아주 잘 아는 오해였다. 그녀가 왕세자비가 되기 위해 악독한 수를 꾸몄다는 누명. 전생에도 라펠은 이 누명을 믿었었고, 덕분에 그들의 신혼은 온통 싸움과 눈물들로 점철되었다.



‘사실 지금은 기억마저도 좀 가물가물한데.’



회귀한 아네트는 벌써 5년 전에 깨진 혼담 따윈 개의치 않았다. 한때 결혼하리라 믿었던 왕세자 루드비히의 얼굴도 이제 흐릿한 윤곽만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왕세자비가 안 된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아네트가 한 가지 억울한 건, 죽기 전까지도 자신의 누명을 풀지 못했던 점이었다. 설령 왕세자비에 관심이 없다 해도, 어디까지나 아네트가 제 발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억울한 누명을 써서 억지로 끌려 내려오는 게 아니라.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이를 본 아네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알면서도, 전생에 수백 번 되풀이했던 자기변호를 시도했다.



“그건 오해에요, 라펠.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누군가 제게 누명을 씌운 거예요.”



“누명? 웃기는군. 증언들이 아주 명백하던데. 그토록 왕세자비가 되고 싶었던 분이 나 같은 놈과 결혼해서 퍽이나 섭섭했겠어.”



아네트의 힘겨운 항변은 시작과 동시에 가로막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펠의 눈빛이 너무 악의적이라서, 그녀는 모멸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라펠은 자신이 들은 헛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꼭 5년 전처럼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늦었으니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아네트는 피곤해서 같은 말다툼을 반복하기 싫어졌다. 그녀는 라펠이 못되게 굴 땐 으레 그러했듯,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났다. 어차피 라펠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대화가 길어질수록 말꼬리를 잡혀, 또 다른 빈정거림을 듣기 일쑤였다. 차라리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피하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신혼 초라 악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라펠은 그녀를 쉬이 보내주지 않았다. 어느새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팔목 전체를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결혼식에서도 그러했듯이.



“신혼 첫날밤인데 어딜 가려고? 날 섭섭하게 만들지 마, 아네트.”



작고 가냘픈 아네트는 체격이 좋은 라펠에게 도무지 힘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강한 손아귀에 이끌려 도로 주저앉자, 모처럼 메이드들이 곱게 빗어 준 금발이 흐트러졌다. 그러자 손을 뻗은 라펠이 오싹하리만큼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크고 뜨거운 남자의 손이 귓바퀴의 곡선을 따라 머리칼을 넘기는 감촉은 너무 생생했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라펠이 이번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자신을 향해 똑바로 되돌렸다.



“쉬이, 자꾸 그렇게 피하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왜, 내가 왕세자가 아니라 그런가? 고귀하신 바이에른은 나 같은 사생아 놈은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이거야?”



라펠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점점 더 많은 가시가 돋쳤다. 싸우려고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간혹 오늘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품고 아네트에게 싸움을 걸어오곤 했다.



전 같았으면 아네트도 이쯤에서 더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며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더 상처 주지 못해 혈안이 되어 말다툼을 했겠지.



그러나 회귀한 아네트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이런 소모적인 공방전은 이미 전생에 지겹도록 했었다. 아네트는 라펠의 말에 상처를 받는 것도 아팠지만, 그를 상처 주는 것도 똑같이 아팠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볼 차례였다.



“이 손 놔 줘요, 라펠. 네?”



아네트는 화를 내는 대신, 제 뺨을 움켜쥔 라펠의 손등 위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손을 놓아줄 것을 요구했다. 라펠에게 강하게 틀어 잡힌 턱과 뺨이 불편했다. 뛰어난 검사 출신인 라펠은 그 악력부터 남달랐다.



당연하게도 라펠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손을 그리 순순히 놓아주진 않았다. 차가운 증오를 담은 그의 눈빛이 바늘처럼 살갗을 찌르는 듯했다. 라펠은 배다른 형제인 루드비히 왕세자를 싫어했고, 그와 결혼하려 했던 아네트는 더욱 싫어했다.



그러나 아네트는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라펠은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아네트를 때린 적이 없었다. 아네트는 전과 달리, 이번만큼은 좀 더 영악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녀는 라펠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놔 줘요, 라펠. 정말로 아파서 그래요.”



짐짓 처연하게 속삭인 아네트가 입술을 살짝 떨었다. 그러자 그 떨림이 아네트의 뺨을 타고 올라가 그의 손아귀에도 전달되었다. 그 순간, 라펠이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손을 스르르 풀었다.



‘진짜로 아픈 건가?’



여우 같은 아네트의 행동에 라펠은 반신반의했다. 그의 시선이 아네트의 가냘픈 턱선과 그 밑으로 쭉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줄기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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