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네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키며 라펠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키스할 생각을 하자 갑자기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생처럼 또 수동적인 삶을 사느니, 어떤 노력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설령 그게 좀 미친 것 같은 노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차피 아네트의 연기 때문에 하객들은 그녀가 신랑에게 홀딱 반한 줄 알 터였다. 그렇다면 몸이 단 신부 쪽에서 먼저 키스를 해온다 해도 크게 비난하진 않겠지. 아니, 오히려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 보인다며 웃어넘길지도 몰랐다.
‘그래, 그냥 해 버리자.’
잠깐 입술만 붙였다 떼는 것 정도는 라펠도 크게 불쾌해하지 않겠지. 결심을 단단히 굳힌 아네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라펠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각오한 듯한 아네트의 얼굴을 마주 본 라펠이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저 여자가 대체 왜 저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라펠의 옷깃을 움켜쥔 아네트가 그를 있는 힘껏 밑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두 입술이 맞닿았고, 아네트의 금빛 속눈썹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평소에 잘 놀라지 않는 라펠의 푸른 눈이 이 순간만큼은 크게 벌어졌다.
“……!”
입술을 맞댄 아네트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맞닿은 라펠의 입술에서 얼어붙은 숨결이 느껴졌다. 설마 아네트가 이렇게 나올 줄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분명 자신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해, 해냈어!’
아네트는 긴장감 때문에 덜덜 떨며 입술을 떼었다. 밀착되었던 두 입술이 떨어지며 촉, 하는 부끄러운 소리가 났다. 과도하게 빨리 뛰는 심장박동 때문에 눈앞이 다 어지러웠다. 아네트는 숨을 헐떡이며 라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라펠은 여전히 충격 때문에 딱딱해진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아네트는 찔끔하며 저도 모르게 그의 옷깃을 움켜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곧 다가올 라펠의 분노를 대비해 눈을 내리깔았다.
‘분명히 화낼 거야.’
라펠은 자존심이 강하고 불같은 성미의 소유자였다. 이런 자리에서도 본인이 불쾌하면 얼마든지 화를 낼 만한 사람이었다.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았다. 그 순간, 턱밑으로 불쑥 들어온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고개를 잡아 올렸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를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얼굴을 바짝 맞댄 라펠이 이를 악문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혼자 멋대로 시작하고, 멋대로 끝내버리면 곤란하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아네트는 라펠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라펠의 잘생긴 입가에 그녀만 알 수 있는 비딱한 냉소가 떠올랐다. 전체적으로 차가운 미모와 달리, 그의 입술만큼은 지독히 붉고 육감적이었다.
움켜쥔 아네트의 얼굴을 비스듬히 치켜든 라펠은 그 상태로 입술을 내리누르듯 키스했다. 예상하지 못한 키스에 놀란 아네트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예식을 위한 형식적인 접촉은 이미 다 끝났는데,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라펠이 보복하듯 되돌린 입맞춤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남들의 시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 그대로 질척하기 짝이 없는 키스를 해왔다.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야하게 핥고, 입안으로 파고들어 샅샅이 맛을 보았다. 그 혀끝이 예민한 입천장을 느릿하게 훑자, 저도 모르게 등골에 전율이 내달렸다.
아네트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라펠의 반대쪽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어 감고 좀 더 바짝 잡아당겼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라펠은 숫제 그녀의 고개가 뒤로 꺾일 만큼 사납게 키스하고 있었다.
고개를 몇 번씩이나 비틀며 집요하게 키스하는 그의 입술은 아찔하리만큼 틈을 주지 않았다. 여린 혀를 낚아채 빠는 그의 혀 놀림에 저도 모르게 숨이 할딱할딱 넘어갔다. 지나치게 깊은 키스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것 같아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라, 라펠…….”
겁이 덜컥 난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질식할 듯한 키스에 놀라 그를 밀어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네트의 손에선 이윽고 힘이 스르르 빠졌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라펠을 거부할 순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분명 크게 상처 입으리라.
다행히 아무것도 모르는 하객의 눈엔 그들이 서로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입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기나긴 입맞춤을 바라보던 하객들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세상에…… 이게 정략결혼이라고요? 그럴 리 없어요. 내 살아생전 이런…… 이토록 정열적인 결혼식은 처음 보는 걸요!”
“어머 어머, 이게 웬일이야! 정말로 둘 사이에 뭐가 있나 봐요.”
다행히 하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신랑 신부의 뜨거운 입맞춤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기꺼이 박수를 쳐 주었다. 처음엔 이 의외의 결혼에 숨겨진 가십 거리를 찾으러 왔지만, 더 엄청난 걸 봐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돌아가는 하객들의 머릿속엔 온통 열렬한 키스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아네트는 키스 때문에 어지러운 나머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델티움 왕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검사인 라펠은 좀 달랐다. 자신의 날카로운 청각에 잡힌 속삭임들을 들은 라펠이 가늘게 웃었다. 이 거지 같은 결혼식에서 설마 웃게 될 줄이야, 그로서도 참 뜻밖이었다.
‘생각만큼 기분 더럽진 않군.’
이 결혼이 내키지 않았던 건 라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출생이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네트 바이에른과 결혼해야만 했다. 설령 그녀가 부왕이 말한 것처럼 악독한 여자라 한들, 라펠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서 라펠은 이 결혼식이 아주 끔찍할 거라 예상했다. 사람들의 음습한 호기심도 지긋지긋했고, 피해자인 척할 아네트의 꼴도 가증스러웠다. 본디 왕세자비가 됐어야 할 여자인데, 고작 사생아인 자신과 결혼하게 됐으니 아주 세상이 끝난 기분이겠지.
여기서 만약 아네트가 남들 보는 앞에서 눈물이라도 흘리며 청승을 떨었다면, 아주 끔찍했을 터였다. 기어이 참았던 라펠의 화가 폭발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네트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시종일관 기쁜 듯 웃는 얼굴이었다. 어찌나 표정 관리를 잘하던지, 하마터면 라펠 또한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하지만 감이 좋은 라펠은 곧 눈치챘다. 아네트의 미소가 환해지면 환해질수록, 부케를 쥔 그녀의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간다는 것을. 그랬다. 아네트 바이에른은 자신에게 반한 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을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라펠은 그런 그녀가 조금은 대견하고, 아주 많이 괘씸했다. 남들 앞에서 현명하게 처신하는 건 만족스러웠으나, 제까짓 게 뭐라고 자신을 싫어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왕세자비가 되려고 별 수작을 다 부리던 여자 주제에.
라펠은 그녀가 못마땅했다. 때마침 저 멀리 주례가 보이자, 머뭇거리던 아네트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그녀가 이 상황에서도 아직 왕세자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듯하여 짜증스러웠다. 아네트를 반강제로 주례 앞에 끌고 온 것까진 좋았는데, 미처 그 뒤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자, 신랑은 이제 신부와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그제야 잊고 있던 마지막 절차를 떠올린 라펠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뱀 같은 바이에른 가의 여자와 입을 맞추라니, 진심으로 안 내켰다. 라펠은 베일 너머로 드러난 아네트의 얼굴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꼭 인형처럼 예쁜 금발의 미인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딱히 입을 맞추고 싶은 욕구는 들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감히 자신의 옷깃을 잡아끈 아네트가 입을 맞춰 온 것은. 바스락거리는 면사포의 촉감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기가 막히게 좋은 향기가 훅 풍겨왔다. 묘하게 떨리는 입술이 그를 밀어붙여 오는 순간, 라펠은 선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지금… 이 무슨……?’
입맞춤은 짧았다. 눈 깜짝할 새 입술을 뗀 아네트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한 짓이 후회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라펠의 눈치를 살피던 아네트가 이윽고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새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라펠은 묘하게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벌써부터 교활한 바이에른 가의 여자에게 휘둘릴 순 없었다. 그래서 라펠은 보란 듯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핥고, 달큼한 향이 나는 숨결을 남김없이 집어삼켰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아네트와의 키스는 빌어먹을 만큼 좋았다. 자신의 혀끝에 딸려오는 수줍고 작은 혀의 감촉은 감질날 만큼 몽글몽글했다. 그 혀를 강하게 휘감으며 빨아들이자, 놀라서 떨리는 숨결이 그를 즐겁게 했다. 물론 아네트가 순진한 척하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라펠을 꽤 동하게 했다. 그는 꼭 꿀처럼 감겨드는 그 입술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아…….”
떨어지는 두 입술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은빛 액체가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아네트는 완전히 혼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늘 차분하고 얌전하던 그녀는 지금 꼭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라펠은 뜻밖에도 웃음이 비죽 나왔다. 음험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귀여운 면이 있는 것도 같았다. 뜻밖의 키스는 결코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하반신을 제법 동하게 했다. 이따 그녀와 치를 첫날밤이 기대되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 실린 그의 숨결이 가까운 거리에서 아네트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그제야 그 장미꽃 같던 분홍색 눈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아.”
정신을 차린 아네트의 얼굴이 이윽고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많은 하객 앞에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람! 어쨌든 라펠이 고작 키스로 넘어가 준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네트는 곧 다가올 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일단 안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