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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오늘은 아네트의 두 번째 결혼식 날이었다. 남들은 첫 번째인 줄 알 테지만, 회귀한 아네트에겐 사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새하얀 카라 꽃과 연한 보랏빛 리시안샤스로 된 부케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같은 남자와 두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



그것도 하필이면 상대가 ‘그’ 라펠이라니. 꼭 취미 나쁜 누군가의 장난 같았다. 그러나 병으로 죽었던 아네트는 분명 5년 전으로 회귀했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네트는 천천히 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도, 식장 곳곳에서 풍기는 연한 재스민 향기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웅성거림까지도 5년 전 그대로였다.



아네트의 회귀 시점은 하필이면 결혼식 날 아침이었다. 덕분에 ‘이번 생엔 라펠과 혼인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꼼짝없이 자신을 차갑게 쏘아보는 라펠의 손을 잡고, 회귀 전처럼 웨딩 로드를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꼭 다르게 살 거야. 전처럼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은 하지 않겠어.’



아네트의 인형 같은 얼굴에 단호한 결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최고 명문가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무척이나 수동적으로 살았다. 온실 속 화초라는 말은 아마 전생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덕분에 그녀는 끝끝내 힘든 삶을 이겨내지 못하고, 비참하게 병들어 죽고 말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죽음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아네트는 당장 눈앞의 것부터 하나하나 바꿔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두 번째 결혼식처럼 말이다. 다행히 전생의 기억 덕분에 이번 결혼식은 훨씬 수월했다. 사실 이보다 더 잘 풀릴 순 없을 것 같았다.



과거의 아네트는 결혼 당일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녀는 누명을 쓴 채 쫓겨나듯이 시집가게 되었고, 남편인 라펠은 무서우리만큼 냉랭했다. 잔뜩 겁먹은 아네트의 귓가로 날아드는 하객들의 악의 어린 수군거림은 큰 상처를 남겼다. 아직 미숙했던 그녀는 끝끝내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결혼식 도중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를 본 라펠의 표정은 당연히 험악해졌다. 그는 아네트가 자신과 결혼하기 싫어서 운 것으로 오해했고, 그녀를 더욱 미워했다. 라펠은 원래부터 사생아라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격지심이 강했으니까.



여기에 아네트의 눈물은 또 다른 악영향을 가져왔다. 사람들의 음습한 호기심을 더욱 커지게 만든 것이다. 하객들은 그녀가 자신의 결혼식에서 얼마나 불행해 보였는지, 어찌나 슬프게 울었는지에 대해 신나게 입방아를 찧어 댔다. 이는 신혼 내내 라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제 두 번 다신 그런 실수는 하지 말자.’



그래서 아네트는 이번엔 행복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까짓것 자신도 여우처럼 살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뺨을 붉히며 라펠의 팔짱을 꼈고, 새신부답게 설레는 미소를 계속 유지했다. 당당히 고개를 들고 앞만 바라보며 타인들의 악의 어린 수군거림을 무시했다. 그러자 그들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참으로 우습게도 말이다.



“……정략결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것치곤 공녀의 표정이 참 좋아 보이네요. 신랑에게 홀딱 반한 사람처럼 보여요.”



“어쩐지 바이에른 가에서 귀한 딸을 내어준다 싶더라니. 혹 공녀가 먼저 카네시스 후작과 결혼시켜 달라고 떼쓴 건 아닐까요? 그는 외모 하나만큼은 참 근사하잖아요. 저 예복 차림 좀 보세요, 세상에나!”



“하긴. 바이에른이 너무 대단해서 그렇지, 카네시스 후작도 꽤 괜찮은 신랑감이거든요. 곧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소문도 있어요. 지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어마어마한 보상도 받았다잖아요? 철광석과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니! 저라도 홀딱 반하겠어요.”



“쉿! 저기, 바이에른 공작이 이쪽을 봤어요. 다들 입조심들 하자고요.”



킬킬대던 하객들은 아네트의 부친, 알라만드의 눈길 한 번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네트의 친정인 바이에른 공작가는 그만큼 큰 권세를 가진 가문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그들의 명성과 세는 감히 견줄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를 질시한 자들은 간혹 바이에른의 냉혈함을 비꼬며 ‘푸른 피의 바이에른’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따라서 아네트의 부친은 이 혼사를 크나큰 치욕으로 여겼다. ‘그 사건’만 없었어도 애초에 아네트가 라펠 같은 사생아와 결혼할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네트는 할 수 없이 라펠과 결혼했고, 전생에서는 내내 친정과 남편 사이를 중재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당연히 난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지. 참 어리석었어.’



아네트는 과거의 미숙했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 결혼 뒤에 숨겨져 있는 속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지금은 행복한 신부를 연기할 때였다. 아네트는 애써 수줍은 미소를 유지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당당하게 걷자, 주위의 수군거림은 곧 뒤로 밀려나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저 멀리 주례가 기다리고 있는 단상이 보였다. 이를 본 아네트가 문득 걸음을 늦추었다. 지금껏 생글생글 웃으며 잘 걷던 아네트답지 않은 망설임이었다.



“아…….”



단상을 본 순간, 아네트는 불현듯 현실감이 덜컥 들었다. 저 단상 위로 문득 과거의 비참했던 결혼식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결혼 생활은 그토록 힘겨울까? 그래서 또 시름시름 앓다 요절하게 될까? 아네트는 어쩐지 눈앞이 낭떠러지인 걸 알면서도 돌진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아찔했다.



아네트가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잠시 망설이던 찰나였다. 별안간 옆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끄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그녀를 옆에서 에스코트하던 라펠이었다.



‘라펠? 갑자기 왜…….’



흠칫 놀란 아네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라펠을 바라보았다. 거미줄보다 얇은 면사포 너머로 흑발의 잘생긴 남자가 보였다. 아네트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라펠은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콧날 밑으로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가 싶더니, 그녀에게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계속 웃어, 그리고 두 번 다신 멈추지 마. 어차피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반쯤 으르렁대는 강압적인 말투에 아네트가 씁쓸하게 웃었다. 라펠의 말이 맞았다. 그는 아네트를 윽박지르고도 영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반쯤 그녀를 끌고 가다시피 했다. 덕분에 아네트는 별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웨딩 로드를 걸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지, 자신의 팔을 단단히 움켜쥔 그의 손아귀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아네트는 한결 진정된 마음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자신의 부친이 보였다. 그는 늘 그렇듯 바이에른 공작답게 완벽한 모습이었다.



아네트의 모친은 이미 병사했고, 오라비는 타국에 있는지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친인 알라만드만 혼자 그녀의 혼주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백금발에 매끈한 얼굴을 한 알라만드는 다 큰 자녀가 둘씩이나 있다곤 믿기 힘들 만큼 젊어 보였다.



알라만드 바이에른 공작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어서, 아무도 감히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하객들은 저 좋을 대로 수군대었다.



“어쩜, 공작님의 표정 좀 보셔요. 딸이 시집가는 게 서운한가 봐요. 저렇게 예쁜 딸인데 그럴 만도 하죠.”



“반면에 아네트 공녀는 꽃처럼 활짝 웃고 있네요! 귀엽기도 하지. 아무래도 신랑에게 홀딱 반한 게 틀림없어요.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무지한 하객들의 입방아는 이번엔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아네트는 비록 라펠에게 반해서 결혼을 조른 철없는 공녀가 되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그 대신 옆에서 걷는 라펠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를 화나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번 결혼식은 성공이었다.



아네트는 길디긴 주례사를 들으며 티 나지 않게 하객석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왕세자와 그의 새로운 약혼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네트의 결혼식에 불참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불편한 얼굴들이 없는 걸 확인한 아네트는 한시름 놓았다. 가문에서 어지간히 입막음을 잘해놨는지, 하객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이대로 가면 결혼식은 잘 마무리될 것 같았다. 예식의 마지막 절차만 잘 거행된다면 말이다.



“자, 신랑은 이제 신부와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주례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은 꼭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적어도 아네트에겐 그랬다. 바짝 긴장한 아네트는 저도 모르게 부케를 꽉 움켜쥐었다. 라펠은 과연 이번엔 자신에게 맹세의 키스를 해 줄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전생의 라펠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말했듯이 결혼식 도중 아네트가 울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둘 다 하기 싫은 결혼이긴 마찬가지인데, 표정 관리를 못한 건 아네트의 잘못이 맞았다. 이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라펠은 키스하라는 주례의 말에 보란 듯 싸늘하게 대꾸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서약이나 마무리하시지.’



그렇게 그들의 첫 결혼식은 최악의 형태로 끝났다. 아네트는 신랑에게 키스를 받지 못한 최초의 신부가 되었고, 이 때문에 부친인 알라만드는 대단히 노했다. 물론 그가 아네트를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알라만드는 ‘바이에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무시당했다고 여겼다. 그것도 무려 라펠 같은 사생아에게. 당연히 진노한 알라만드는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피로연에서 라펠과 크게 다퉜다. 졸지에 싸움의 원인이 된 아네트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죽고만 싶었다.



‘제발 이번만큼은 내 결혼이 그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네트는 입술을 꼭 깨물며 초조하게 라펠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이윽고 머리에 쓰고 있던 투명한 베일이 걷히는가 싶더니, 눈앞에 라펠의 얼굴이 보였다.



희고 잘생긴 얼굴에 짙은 흑발을 늘어트린 그는 무척이나 고혹적인 미남이었다. 하지만 아네트를 바라보는 짙푸른 눈동자는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라펠의 얼굴엔 이 키스가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차가운 표정을 본 순간, 아네트는 직감했다.



‘아, 이번에도 라펠은 내게 키스하지 않겠구나.’



아네트는 실망감을 추스르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이따 피로연에서 라펠을 맹렬히 비난할 제 부친을 어찌 말려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그 순간, 아네트의 머릿속에 불현듯 좀 미친 것 같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 굳이 신랑의 키스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그냥 내가 먼저 해버리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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